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58화 (158/166)

〈 158화 〉 대운하

* * *

그 말에 마리안은 눈을 크게 뜨더니 입을 살짝 가리고 웃었다.

하지만 이내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하고 말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공작님의 위신을 스스로 낮추는 행위에요.”

“미안하군. 천박해서.”

“하지만... 공작님께서 스스로 저 밑으로 내려가 그 사실을 깨우치신 건 정말 존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귀족들 중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무니까요. 알아도 다들 눈을 돌리려고 하죠.”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잠깐 잊고 있었을 뿐이지.

사실, 삶은 누구에게나 좆같다.

지금쯤 동부에서 한창 고문당하고 있을 폰세르크 국왕이나 세자, 이미 땅에 묻혀 반쯤 썩어버렸을 친중앙파 귀족들, 전장에서 죽어간 기사들에게도 삶은 꽤 좆같았겠지.

하지만 그 작자들이 이반과 페렛 앞에서도 삶이 좆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 앞에서 그 말은 공허하게만 울릴 것이다.

“그리고 저 밑에는 아랫것들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내 말에 갬블과 카산드리아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갬블은 친우인 방랑기사 파이선과 대머리 덩치들을 통해서, 카산드리아는 칼을 찬 여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무리를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했다.

마리안은 꼼꼼한 성격이고, 감독관들을 통해서 대운하 작업을 감시했지만 저 말단의 하부까지는 지배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건 봉건제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내 것이다. 신민들의 목숨도, 그들의 질서도. 그러니 그것들을 다루는 것도 내 몫이어야겠지.”

당장 관료들을 파견해서 촘촘하게 행정력을 투사할 수는 없다.

그건 지금 아티아 인근에 짓고 있는 아카데미가 완성된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할 거다. 관료들은 당장 나오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 저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내 밑으로 포섭한다.

포주와 도박장 주인, 폭력배와 술꾼, 도둑까지 전부.

“음지에 있는 것들을 양지로 끌어올리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그 대신 세금은 세금대로 내야하고, 내가 내린 법도 지켜야 할 거야.”

“그게 가능할까요?”

“여기 있는 카산드리아와 갬블이 도와줄 테니 가능하겠지.”

그들은 또 한 번 어깨를 움찔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그들이 안 하겠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마리안은 잠깐 생각하고 말했다.

“확실히 그렇게 된다면 세수도 늘어나고, 공작님의 지배도 더 확고해지겠죠. 그렇지만 쉬운 일은 아닐 거예요. 기득권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민감한 거니까요. 다들 자기가 가진 권리를 순순히 내놓으려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마리안이 어떻게든 켈자르의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것처럼 말이지?”

“그건...”

“뭐,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지금 해두려는 거야.”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들이 강인하고 전리품 금고가 가득할 때.

내 패권이 공작령 전체에 울릴 때.

대운하 사업으로 금화가 사방에 흘러넘치고 있을 때.

이런 호기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다.

도박장과 암시장, 유흥가의 수괴들을 휘어잡아 내 지배 안에 끌어넣는다.

그렇게 되면 레시아르의 낮과 밤은 모두 내 손아귀 안에 들어올 것이다.

대운하가 완성되면 켈자르 카르마시아에서 레시아르 아티아, 파티스트롬 파티스, 그리고 항구도시 헤시아스까지 배로 오갈 수 있게 되겠지.

유통이 편해지면 유흥거리도 지역을 넘나들게 될 테고.

그러니 지금 미리 뒷골목을 장악해두면 나중에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수월할 거다.

아직은 얼개만 있는 계획이지만, 마리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밑바닥 질서에 익숙한 카산드리아와 갬블이 한두 마디씩 거드는 것도 꽤 도움이 되었다.

이제 아티아로 돌아가서 타라와 이오시스에게 본격적인 입안을 맡기면 되겠지.

식사를 마치고, 나는 이만 아티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만하면 파레트 누님도 나와 이데트 누님의 사이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을 테고... 아니면 적어도 모른 척은 해주기로 마음을 정했을 테니.

나는 고타마에 오르기 전에, 이번에 발견한 이들에게 하나씩 지시를 내렸다.

“갬블.”

“예, 대공작님.”

“도박장은 그대로 운영해도 좋은데, 사기도박은 없애도록 해. 인부들은 적당히 등쳐먹고, 매출과 수익은 마리안에게 신고해서 세금을 내도록 하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도박장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되면 믿을 만한 부하에게 맡기고 아티아로 오도록. 위로 올라갈 수 있고 싶다고 말했지? 공을 세울 기회를 줄 테니 열심히 해 봐.”

“감사합니다...!”

카산드리아는 갬블이 잘 되는 게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카산드리아.”

“예. 존귀하신 공작님.”

“갬블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알겠는데, 서로 피를 보진 마. 이건 갬블 자네에게도 하는 말이야.”

갬블과 카산드리아는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원한이 남았는지 슬쩍 서로를 노려보고는 있지만, 칼질만 하지 않는다면 상관은 없다.

이 둘이 충성 경쟁을 벌일수록 내게는 좋은 일이니까.

“그런데 자네 춤 말이야, 그걸 다른 여자들에게 익히게 해볼 생각은 없나?”

“몇 번 가르쳐 본 적은 있습니다만...”

“자네 판단에 맡기겠지만, 한 번 본격적으로 가르쳐 봐. 의상이나 악기는 마리안에게 부탁하면 어느 정도 지원해줄 거야.”

카산드리아의 춤사위는 춤을 모르는 나나 파샨을 빠지게 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녀만큼 따라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녀가 스스로 제자들을 가르친다면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겠지.

그녀는 소녀들로 구성된 악단도 가지고 있었으니, 조금만 지원해준다면 순회공연을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까지는 안 되더라도, 위문공연을 다닐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거기 기사는 이름이...”

“파, 파이선입니다! 위대하신 공작 각하!”

파이선은 내가 자기를 호명한 것에 감동해서 덜덜 떨고 있었다.

방랑기사란 것은 말이 좋아 방랑기사지, 사실은 주군을 찾지 못해 도태된 기사였다.

나는 그에게 검 한 자루를 내렸다.

명검은 아니고, 그냥 흔한 검이었다.

그럼에도 파이선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고, 공작님...! 이 비루한 기사에게 검을 하사해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그래. 뭐, 당장은 시킬 일이 없으니 지금까지처럼 갬블을 옆에서 도와주게. 그 친구가 암흑가에서 해줄 일이 많다보니, 목숨을 노려질 일도 많을 거야.”

“제 목숨을 걸고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파이선이 물러나고, 그 뒤에 넙죽 엎드려 있던 이반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반은 평범한 사내지만 나는 그에게 금화를 몇 닢 주고, 갬블 밑에서 일하라고 일렀다.

“서부에 정착하고 싶다고 했지? 열심히 하게.”

“감사합니다! 나으... 대공작님!”

그리고는 페렛인데.

이 녀석은 눈치도 없고 배운 것도 없어서 어떻게 쓸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 녀석만 내치기에는 뭔가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다.

나는 슬쩍 페렛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파샨이 은근히 페렛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아, 생각해보면 개 수인 코코도 경계했지.

그걸 보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파샨.”

“네, 도련님.”

“저 애는 네가 맡아.”

“제가요?”

친위대원으로 키워도 좋고, 그냥 하녀로 삼아도 좋다.

방치해도 되고, 정 싫으면 죽여도 무방하다.

“어떻게 해도 뭐라고 하지 않을게.”

“알겠습니다! 도련님...”

파샨은 진지한 표정으로 페렛을 응시했다.

페렛은 어색해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어쩐지 이전의 파샨의 모습이 겹쳐졌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아. 잠깐 딴 생각을 좀 했네. 이제 가자.”

나와 파샨, 페렛은 마리안이 맡아두었던 새끼 고타마와 함께 커다란 고타마 위에 올랐다.

마리안은 병사들에게 횃불을 들게 해서 근처를 밝히고는 고타마 앞으로 다가왔다.

“밤이 늦었는데 주무시고 가시지요.”

“설마 그대가 먼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며칠 저택을 떠나 있었더니 돌아가서 푹 쉬고 싶어서 말이야. 고타마는 밤눈이 밝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마리안은 그러시다면, 하고 물러났다.

파샨이 고타마의 목줄을 잡아챘다.

­ 끼루루룩!

고타마는 크게 울고는 단번에 땅을 박차서 날아올랐다.

강한 풍압에 병사들이 들고 있던 횃불이 모조리 꺼지는 장면은 꽤 장관이었다.

­ 끼리릭!

새끼 고타마도 고타마의 울음소리에 맞춰서 높게 울부짖었다.

녀석의 눈동자에는 밤길이 선명히 비치고 있었다.

고타마는 영리한 편이니까 아티아까지라면 놔둬도 알아서 갈 거다.

나는 파샨의 몸을 뒤에서 안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뜰 때는 저택에 있겠지.

...

"저, 작은 나리..."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바로 근처에서페렛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파샨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페렛은 그래도 꿋꿋하게 용건을 말했다.

"오줌 마려워."

"그래서?"

"여기서 싸도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리고 너, 존댓말 쓰라고!"

"오줌 마려운데... 요."

"참아."

"모, 못참겠어... 요."

파샨은 으르릉거렸다.

"여기서 오줌 싸면 저 아래로 던져 버릴 거야!"

"못 참겠다고... 요!"

"에잇..."

파샨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타마야. 저기가 어디쯤이지?"

­ 끼루루룩!

"몰레라 바위인가? 이 근처면... 음... 그래도 도련님께 여쭤봐야 되는데... 페렛. 도련님 지금 주무시고 계셔?"

"응. 자고 있어... 요."

"존댓말... 아니, 됐다. 주무시고 계시면 깨워드릴 수도 없고... 그럼 잠깐만 들렀다 가는 거야."

파샨은 은근히 신이 난 목소리였다.

나는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고타마는 짧게 울고는 아래로 하강 중이었다.

커다란 바위가 있는 분지.

오두막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이 어둠 속에 쌓여 있었다.

파샨의 고향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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