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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59화 (159/166)

〈 159화 〉 파샨의 고향

* * *

파샨은 고타마를 공터에 착지시키고, 페렛을 내려주었다.

“조용조용 다녀와.”

“응...”

“존댓말 쓰라고!”

“네!”

페렛은 허겁지겁 바위 뒤로 숨었다.

파샨은 내가 깰까 조마조마한지 자꾸 눈치를 살폈다.

길 한 번 돌아왔다고 뭐라 하진 않을 건데 말이야.

꿀밤은 한 대 먹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깨지 않기를 바랐던 파샨에게는 불행하게도, 횃불을 든 촌민들이 소란을 피우며 달려왔다.

“고타마다!”

“파샨이 온 거야?”

“공작님이 오셨을지도 몰라!”

파샨은 새끼 고타마를 껴안고 고타마에서 내려서 촌민들에게 일갈했다.

“쉿! 쉬잇! 도련님 주무신다고!”

“나 일어났다. 한참 전에.”

“너희들 때문에 도련님 일어나셨잖아!”

나도 고타마에서 뛰어내려서 당당하게 책임전가를 하는 파샨에게 꿀밤을 먹여주었다.

나를 본 촌민들은 횃불도 아무데나 던져버리고 넙죽 엎드렸다.

“아이쿠. 공작님!”

“위대하신 공작 나으리!”

서로 나를 모시겠다고 난리가 났다.

지금이라도 꽃과 꿀과 향유를 가져와서 뿌리겠다고 하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제 딸이 이제 나이가 찼다며 바치겠다는 부부도 있었다.

파샨은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나도 이렇게 환대해주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졸린데 하루 이틀 정도는 여기서 자고 가지 뭐.

어차피 급한 일정도 아니고.

“촌장, 여기 있나?”

“예. 위대하신 레시아르 공작 각하!”

촌장은 파샨의 아비였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고, 파샨이 출세한 후에 그렇게 됐을 거다.

“자네 집에서 묵어가지.”

“영광입니다. 위대하신 레시아르 공작 각하!”

“그렇게 꼬박꼬박 각하 운운할 필요는 없어. 여하튼 가자고. 피곤하군.”

나와 파샨, 페렛의 뒤를 촌민들이 줄줄이 따라오다가 파샨의 본가 앞에서 만세삼창을 부르고 해산했다.

파샨의 본가도 마찬가지로 파샨의 출세 이후에 개축된 것이었다.

으리으리한 저택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대가족이 각기 방 하나씩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쾌적한 집이었다.

파샨의 방은 그 중에서도 가장 넓고 안락했다.

거의 내려올 일이 없는 파샨의 방이 이렇게 좋다는 건, 이 가족의 부흥을 이끌어 낸 게 전부 파샨 덕분이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파샨은 자기 방이 영 어색한 듯했다.

하기는, 여태껏 내 곁에 계속 붙어 다닌 탓에 자기 방에 와본 적이 손꼽을 거다.

“여기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야?”

“한 이 년 정도... 그래도 편지는 계속 보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부하들 휴가도 안 챙겨주는 악덕 영주 같잖아. 앞으로는 일 년에 며칠 정도는 휴가를 줄 테니까 본가에서 쉬고 와.”

“저는 도련님 옆이 더 편합니다!”

파샨은 히히 웃었다.

나는 괜히 파샨의 꼬리를 잡았다.

“이리 와. 졸린데 베개로나 써야겠어.”

“네. 안녕히 주무세요. 도련님.”

나는 파샨이 페렛을 조용히 꾸짖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응. 간만에 잘 잤네.”

“아침상이 준비됐는데, 들일까요?”

“그래.”

파샨은 페렛에게 눈짓을 보냈다.

페렛은 주춤주춤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여우 수인들이 면보로 덮인 상을 들고 줄줄이 들어왔다.

파샨과 비슷하게 생긴 걸 보니 아마 자매들이지 싶다.

“공작님. 이 폭샨이 직접 만든 요리랍니다. 이것부터 드셔보세요.”

“공작님. 이건 저 푸샨이 손질부터 다 한 요리에요.”

“언니들. 수작 부리지 말고 상만 놔두고 나가.”

파샨의 말에 여우 수인 자매들은 툴툴거리면서 나갔다.

시골 촌에 무슨 대단한 요리사가 있을 리는 없어서, 그냥 고기 요리가 많았다.

정성을 표현한답시고 소와 돼지, 양, 닭, 오리까지 한 마리씩 다 잡은 모양이다.

나는 적당히 먹다가 상을 물리고 밖으로 나왔다.

“위대하신 공작 각하! 기체후 일향만강 하셨습니까!”

파샨의 형제들이 어설픈 말로 충성맹세를 하는 걸 들어 넘기며 마을길로 산책을 나갔다.

날이 밝고 보니 마을 곳곳에는 내 동상이나 목상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그 밑에 잘 말린 꽃잎과 반쯤 증발한 술잔이 놓여 있는 걸 보니, 평소에도 신경 써서 관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저택이 있는 아티아에서도 이 정도로 나를 모시진 않았는데.

“도련님이 이 마을을 살펴주셨으니까 당연한 겁니다.”

살펴주었다고 하기엔 한두 번 생각났을 때 은전을 내렸을 뿐이다.

마을 기금이랄 건 거의 다 파샨의 봉급에서 나왔겠지.

페렛은 신기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마을을 구경했다.

“이런 마을은 처음 봐... 요.”

굶주리는 자가 없고 무너져가는 빈 집도 없다.

사람들은 화목하고 거리는 깔끔하다.

이 정도면 훌륭한 전원 마을이지.

이 마을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파샨이 내 측근으로 성장하기 전에는 이 마을도 다른 마을과 별반 다를 바 없이 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한 수인들의 촌락이었다.

기근이 들었을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노예상인에게 가족을 팔기도 했다고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주변에서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잘 사는 마을이니 잘 된 일이다.

"참. 파샨. 이 근처에 가족 묘가 있다고 했지?"

"네...? 네... 그치만 그냥 별 거 없는 조그마한 묘입니다. 도련님이 보실만한 건 없을 겁니다."

"그래도 기왕 네 고향에 들렀으니 한 번은 가보고 싶은데."

파샨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 했지만, 내가 가고 싶다고 하자 그쪽을 향해 진로를 잡았다.

가족 묘는 마을 바깥 쪽에 위치해 있었다.

양 목장을 지나 한적한 초지를 좀 걷다보니, 울타리를 쳐 놓은 공터가 나왔다.

거기에는 작은 비석만 몇 개 쓸쓸히 놓여 있었다.

파샨의 조부모와 촌수 위의 친척들, 그리고 먼저 간 막내 동생의 묘비였다.

"막내 동생이 죽었다는 얘기는 못 들은 거 같은데."

"제가 도련님을 만나기도 전의 일이니까요."

그럼 아주 어렸을 때 죽은 모양이다.

딴 놈들에게는 막 대하는 나라도, 파샨의 가족들이라면 조금은 신경 써서 대하게 된다.

"이 묘지 말이야. 아티아 근처로 옮겨줄까? 하는 김에 크게 석상도 세우고 해서."

"괜찮아요, 도련님. 그렇게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파샨은 고개를 젓고는 주머니에서 감자 두 알을 꺼내서 막내 동생의 묘비 앞에 놔두었다.

"이거면 될 거예요."

파샨은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나도 더는 권하지 않고, 발을 돌렸다.

"가자."

"네. 도련님."

우리는 적당히 산책을 마치고 파샨의 본가로 돌아왔다.

파샨의 어미와 자매들은 벌써부터 부산스레 움직이며 요깃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촌장은 나를 다시 방 안으로 들이려고 했지만, 나는 그냥 정원에서 쉬기로 했다.

파샨을 닮은 여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보는 것도 꽤 재밌었거든.

파샨 가의 여자들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슬쩍슬쩍 치맛단을 걷거나 옷을 펄럭이거나 했다.

사실은 그녀들보다도 그녀들이 그럴 때마다 눈을 부라리는 파샨의 반응이 더 재밌어서 은근히 훔쳐보았다.

촌장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서 술을 바쳐 올렸다.

“위대하신 공작 각하. 변변치 않지만 마실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래? 그럼 촌장도 같이 들지.”

“황공스럽습니다...”

“그러지 말고 받아. 신분 차이가 있다고 해도 자네는 사사로이는 내가 아끼는 친위대장의 아비가 아닌가.”

“소인이 어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촌장은 두 손으로 공손히 빈 잔을 내밀었다.

나는 그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그래. 이 마을 호구는 어떻게 되던가?”

그는 급히 술잔을 비우고 대답했다.

“그것이, 집집마다 세자면 총 백스물 두 집입니다. 사람 수는 열여덟 살 이상의 남자가 삼백 명이고, 여자와 아이, 노인까지 합하면 이천오백 명을 조금 넘깁니다.”

한 집에 스무 명 가까이 산다는 말이었다.

먹고 살만 하니까 계속 낳는 거지.

“파샨에게 들으니, 이 마을 청년들이 친위대원에 계속 지원하고 있다면서?”

“예. 지금까지는 일반 병사로 지원해왔지만, 그보다는 친위대원으로 투신하는 것이 위대하신 공작 각하께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이 마을 촌민의 충성심이야 증명된 셈이니.

친위대원으로 계속 지원한다면 그거야 좋지.

나도 충성의 보상으로 작은 선물을 내려주기로 했다.

“내가 서부 일대를 통과하는 대운하를 만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예. 천 년에 한 번 있을 대공사라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대운하를 따라 육상 도로도 정비할 참인데, 이 마을에 역참 거점을 세워줄 테니까 자네가 한 번 잘 관리해 봐.”

촌장은 아주 빼어나지는 않지만 아둔하지도 않은 자였다.

역참 거점이 마을에 가져다 줄 혜택을 짐작했는지 그의 눈이 밤송이처럼 커졌다.

“위대하신 대공작 각하가 내려주신 은혜에 감읍하옵나이다...”

“거 말투가 참. 하여튼 됐어. 난 한숨 더 잘 테니까 자네도 편히 쉬어.”

"황공합니다!"

나는 다시 파샨의 방으로 돌아갔다.

파샨은 쫄쫄 내 뒤를 따라왔다.

“응? 따라오지 말고 가족들이랑 있지 그래. 일부러 비켜준 건데.”

“저는 가족보다 도련님이랑 있는 게 더 좋습니다!”

나는 픽 웃고 말았지만,파샨은 진지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렸을 때의 그 솔직한 눈동자와 한 치도 바뀌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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