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60화 (160/166)

〈 160화 〉 파샨의 과거

* * *

‘배고프다.’

파샨은 밤중에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두컴컴한 흙집에서는 손만 뻗어도 사방의 벽이 닿는다.

이 비좁은 집 안에 음식을 보관해두는 곳은 한 곳 뿐. 어두워도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코를 골며 자는 아버지의 베개 밑이겠지.

하지만 저 베개를 들어내고 구멍 아래 넣어둔 감자 자루를 꺼내 먹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전에 아버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죽기 전까지 얻어맞을 거고.

파샨은 엉겨 붙은 자매들의 팔을 조금 핥아보았다.

짠내가 느껴져서 아주 조금은 허기를 속일 수 있었다.

‘자자. 자야 해.’

적어도 자는 동안에는 배고픈 걸 잊을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밀로 만든 빵을 배불리 먹는 꿈을 꿀 수도 있다.

파샨은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의 아침은 귀리죽과 감자 한 알이었다.

그 소박한 식사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파샨은 허겁지겁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제자매들은 자기 걸 빼앗길까 무릎으로 그릇을 가리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누나.”

막내 동생이 파샨에게 다가와서 몰래 감자 한 알을 내밀었다.

파샨은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너 먹어.”

“나 배불러.”

“배부르다고?”

“응. 이상하게 계속 배가 불러.”

“그럼 정말 내가 먹는다?”

“누나 먹어. 대신에 나중에 내가 배고프면 누나 거 감자 주는 거야. 두 개.”

파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감자 한 알이 나중의 감자 두 알보다 훨씬 나았다.

하지만 감자 두 알을 갚을 일은 없었다.

그 해 겨울, 막내 동생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엄마 말고는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파샨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막내 동생의 입 안에 야생 베리를 두 알 넣어주었다.

'감자 두 알은 나중에 갚을게.'

막내 동생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았지만, 그대로 관도 없이 야지에 묻혔다.

“이봐. 이걸로는 부족해. 레시아르 백작께서 세율을 또 올리셨다네.”

“그렇다고 이렇게 다 가져가시면 저희는 뭘 먹고 삽니까?”

“말 조심해. 우리 마을은 그래도 다른 마을보다는 사정이 나은 거야.”

막내 동생을 묻는 날에도 아버지는 촌장과 싸웠다.

소득은 없었다. 베개 밑에 묻어둔 구멍에서 알곡 자루 두 개를 빼앗겼을 뿐이다.

원래도 없는 살림에 세금까지 뜯기니 먹을 것이 점점 더 부실해졌다.

삶은 감자가 감자 수프로, 그리고 종내에는 멀건 맹국으로 바뀌었다.

아직 겨울이 반이나 남은 차였다.

그 때쯤 노예상인이 마을로 찾아왔다.

파샨은 자매들과 함께 나가서 자신을 사줄 것을 간청했다.

노예로 팔려가서 좋은 주인을 만나면 적어도 배는 곯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같은 무게 고기로도 안 팔리겠다.”

노예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파샨과 자매들은 삐쩍 말라서 상품 가치가 없다고 했다.

그는 가슴이 큰 여자만 몇 사갔다.

팔려간 여자들과 그녀들의 가족들은 기뻐하며 은화를 세었다.

파샨은 그 모습을 부럽게 지켜보았다.

노예상인이 떠나고 며칠 뒤.

형제들 사이에서 기침병이 돌았다.

의원을 부를 돈 따위는 없었기에 아버지는 옆집 노인을 모셔왔다.

노인은 진맥을 하며 말했다.

“먹지 않아서 생긴 병이야.”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뭐라도 먹여야지.”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그렇게 말한 그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벽도 없는 흙집에서 이야기가 다 들린 거야 뻔한 일이었다.

“그래도 아들들을 살려야지 어떡하겠소.”

“돈이 있어야지 약을 사든 의원을 부르든 하지 않겠어요.”

“딸이 여럿이니까...”

“노예상인도 안 사갔다는데 무슨 수가 있다고.”

“그래도 아홉째가 똑똑하고 몸도 튼튼하니 병사로 입대를 시키면 어떻겠소? 마침 내가 아는 장교가 하나 있으니까 부탁을 해보겠소.”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샨은 눈을 감았다.

병사가 된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잘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드물게 파샨에게 죽을 두 그릇이나 떠주었다.

평소보다 든든하게 먹은 파샨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먼 길에 나섰다.

며칠을 걸어 도착한 아티아는 시골 마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보였다.

깨끗한 벽돌 건물과 멋있는 갑주를 입은 기사들.

귀부인은 마차를 타고 다니고, 상인들은 소리 높여 손님들을 불렀다.

파샨은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딸을 재촉해 병영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안다는 장교는 장교가 아니라 부사관이었다.

그것도 촌수로 따지는 게 거의 민망할 수준으로,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아는 관계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게 마지막 동아줄이었으니 아버지는 부사관에게 굽실굽실거렸다.

“제 딸이지만 이게 아주 영리하고 튼튼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쪼끄만 년은 어디다가 쓰라고?”

“이 나이 때 애들은 또 금방금방 크지 않습니까.”

“글쎄... 발육도 부진한 것 같고. 제대로 칼을 휘두를 수 있을지나 모르겠는데.”

부사관은 별로 내키지 않는 듯 했지만, 결국은 파샨을 병적부에 올려주었다.

아버지는 입대증명서와 은화 한 푼을 받고는 훌쩍 돌아가 버렸다. 아마 파샨의 얼굴을 보기 어려워서 그랬겠지만.

파샨은 의외로 군대 생활에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게 요령이었다. 티나지 않고, 모나지 않게.

하지만 아무리 자기가 처신에 신경을 쓴대도 저 위에서부터 굴러 떨어져오는 문제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거 왜 이리 양이 부실해?”

병사들은 밍밍한 수프를 받고 투덜거렸다.

파샨은 그저 평소처럼 취사병이 재료를 조금 빼돌렸구나 하고 말았다.

며칠간 좀 부실하다가 다시 제대로 된 식단이 나올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식단은 점점 더 부실해져만 갔다.

사관이나 장교가 식사비를 착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반 보병의 식사는 기사단이나 마력병들의 식사와 분리하여 제공하고 있었으니, 그걸 착복하는 거야 쉬운 일이었다.

“이런 씨발! 이딴 걸 먹고 훈련을 받으라고?”

병사들은 알곡 껍질만 둥둥 떠 있는 수프를 받아 들고 거칠어졌다.

하지만 사관과 장교들에게 무어라 할 수 있을만큼 간 큰 이는 없었다.

결국 분노는 약자에게로 향했다.

“그거 내놔!”

“내, 내건데...”

“두들겨 맞고 내놓으려면 그렇게 하고!”

힘 좀 쓴다 하는 병사들은 다른 약한 병사의 식사를 빼앗아 먹었다.

그러니 체구가 작고 어린 파샨은 제 식사를 빼앗기기 일쑤였다.

파샨은 분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덤볐다가 두들겨 맞으면 그대로 죽어서 나가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루에 한두 스푼, 빼앗기기 전에 묽은 국을 먹는 게 식사의 전부였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훈련은 훈련대로 받아야 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오늘은 레시아르 백작님의 후계를 이으실 도련님께서 훈련을 참관하러 오실 테니까!”

부사관들은 보병들의 다리를 걷어차 가면서 연병장으로 내몰았다.

파샨은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오와 열을 맞추었다. 빈속이 쭈그러드는 감각이 심상치가 않았지만 지금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연병장에 나가보니, 시녀들이 몰려있는 곳이 보였다.

시녀들이 둘러싸고 꺌꺌거리는 속에 하얗고 잘생긴 도련님이 있었다.

그는 세상만사가 지루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파샨에게는 그것조차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무척 좋은 냄새가 났다.

막 구운 빵과 고소한 우유 냄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도 모르게 행렬에서 빠져나가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거기! 뭐하나! 멈춰! 돌아와!”

부사관이 급히 달려왔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파샨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도련님을 향해 달렸다.

그때처럼 간절히 달려본 적은 없던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파샨은 도련님 앞까지 달려가서 풀썩 엎어졌다.

그녀를 쫓아온 부사관은 안색이 새파래져서 넙죽 엎드렸다.

도련님은 그제야 약간 흥미가 생긴 표정을 지었다.

“뭔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한 거야 죄송한 거고. 뭐냐고?”

“이 년은 보병인데... 오늘 뭘 잘못 먹었는지 말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이렇게 작은 애가 보병이라고?"

도련님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앞으로 걸어가서 파샨의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시녀들은 손이 더러워진다고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렇지만 파샨은 꼬리를 만지는 손이 따뜻하다고 생각해서 입 꼬리를 올렸다.

도련님도 웃었다.

"얘, 웃고 있네."

"저 망할 년...! 아,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당장 데려가서 채찍을 치겠습니다!"

"됐어. 넌 가 봐. 얘는 내가 데리고 갈 테니까."

부사관은 멈칫했지만 시녀와 호위기사들의 눈총을 받고는 후다닥 돌아갔다.

한편, 한참 파샨의 꼬리를 만지던 도련님은 파샨을 안고 일어섰다.

"도련님! 천한 수인을 그렇게 안으시다니요!"

"우린은 그 떽떽거리는 것 좀 줄여."

"도련님! 수인은 불결하고 천박한 존재입니다!"

"땟국물이 좀 묻어나긴 하네. 세리야. 네가 좀 씻겨줘."

"알겠습니다. 씻기고 나서는 어떻게 할까요?"

"내 방으로 데려와."

도련님은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씩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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