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61화 (161/166)

〈 161화 〉 파샨의 과거

* * *

파샨은 고개를 두리번거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호화로운 저택 안에서도 한층 더 호화스러운 방이었다.

깨끗한 거울과 보석 같은 화분, 보드라운 양탄자까지 전부 처음 보는 것들뿐이다.

잠시라도 마음을 느슨하게 풀면 휙휙 고개를 돌려 이것저것 손에 쥐고 만져보고 싶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더러운 손으로 함부로 이 신성한 장소를 더럽히면 경을 치겠지.

파샨은 군침을 삼키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한참 그녀를 들여다보던 도련님은 킬킬 웃었다.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

“저는 이게 편합니다.”

“그래?”

도련님은 메이드들을 시켜서 간식상을 차려오게 했다.

설탕과 버터가 잔뜩 들어간 과자, 싱싱한 과일즙으로 만든 주스, 수십 가지의 견과류와 차가운 아이스크림까지 있었다.

당연히도 파샨에게는 전부 다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풍겨오는 냄새와 화려한 색깔은 무엇 하나 맛을 보기도 전에 침을 줄줄 흘리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 식사를 계속 빼앗겨서 배가 주리던 참이었다.

파샨은 당장이라도 두 손을 뻗어 저것들을 입에 쓸어 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힐끗 도련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특유의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파샨을 지켜보고 있었다.

‘참자. 참아야 해.’

파샨은 미칠 듯한 식욕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직 도련님이 먹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건 시험일지도 모른다.

시험이 아니더라도, 하늘같은 도련님의 심기를 거스르면 자신은 쓰레기와 함께 버려져 죽겠지.

파샨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뭐해? 안 먹어?”

“먹어도... 됩니까?”

“아니.”

‘역시.’

파샨은 한숨을 삼키고 배를 눌렀다.

꼬르륵 소리가 났다.

도련님은 그 소리를 듣고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름이 뭐야?”

“파샨입니다.”

“파샨... 좋아. 파샨, 먹어도 돼.”

파샨은 살짝 눈치를 보았다.

도련님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를 시중드는 메이드들은 파샨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서 과자를 집어 들었다.

입 안에 과자를 넣을 때까지도 정말 이 귀한 걸 먹어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 단맛이 와사삭 입 안에서 퍼져나가고 나자, 파샨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참아야 해. 참아. 참으라고.’

그렇게 되뇌면서도 파샨은 두 손으로 과자를 마구 집어먹었다.

부스러기를 사방에 뿌리면서 과자를 퍼먹다가 목이 메이면 허겁지겁 주스를 마시고, 견과류를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 꼭꼭 씹어 삼켰다.

파샨은 허겁지겁 먹다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메이드들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큰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될 대로 되라는 생각도 들었다.

‘먹다가 죽어도 돼.’

막내 동생은 감자 한 알도 먹지 못하고 죽었다.

이렇게 호화스러운 식사를 하고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바라마지 않는 바였다.

안타까운 점은, 오랜 절식으로 위장이 줄어들었는지 그렇게 먹어도 간식상의 반도 다 해치우지 못했다는 거다.

파샨은 안타까운 눈길로 간식상을 보다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이제 죽여주세요.”

“죽여? 내가 널? 왜?”

파샨은 대답이 궁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자신이 죽을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분위기에 짓눌렸던 것이었다.

“내가 기껏 너를 주워 와서 잔뜩 먹이기까지 했는데, 왜 이유도 없이 죽이겠어?”

“그럼 왜 저를 주워 오신...”

파샨은 흡하고 입을 다물었다.

배가 불러서 마음의 끈이 좀 느슨해졌던 게 분명했다.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감히 질문을 던지다니.

메이드들도 날 선 시선으로 파샨을 찔러댔다.

하지만 도련님은 오히려 메이드들을 쫓아냈다.

“너희들이 그러니까 쟤가 맥을 못 추리잖아. 계속 이럴 거면 나가.”

“하지만 도련님. 저희는 언제나 도련님 곁을 수행해야 합니다.”

“세리야가 있을 테니까 됐어. 나머지는 나가서 책이나 읽어. 아니면 볕이나 쬐든지.”

도련님은 안경을 쓴 메이드 하나를 남기고는 정말 전부 다 내보내버렸다.

그는 그리고 나서 자리에서 내려와 파샨의 옆에 앉았다.

“내가 너를 왜 데려왔냐고?”

“예...”

“귀여워서.”

파샨은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귀엽다니. 그건 부모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도련님은 기꺼이 밑으로 내려와 파샨의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털이 푸석푸석하고 얇았지만, 그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저택 안에서만 생활한 도련님으로서는 이렇게 수인의 특성이 짙은 자를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어 있는 거구나. 꾹꾹 눌러보면 뼈도 있는 것 같고.”

“힛?!”

파샨은 털이란 털이 다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따뜻한, 아니, 뜨거운 무언가.

그녀가 그것이 마력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건 조금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녀가 받은 것이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마력 샤워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보다도 한참 후의 일이었고.

그 때의 파샨은 그저 찌릿찌릿하고 뜨거운 감각이 자신의 몸을 농락하는 것을 하염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이힛... 이히힛...”

마력으로 절임이 된 파샨은 흐물흐물 웃으며 바닥을 굴렀다.

도련님이 내보낸 마력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도 받아들이지 못했고, 또 그 절반의 절반의 절반도 제대로 흡수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막대한 힘을 느꼈다.

그것은 막대한 힘이고 또 막대한 쾌락이기도 했다.

“후... 약간 지치네.”

도련님은 마력을 철철 낭비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세리야라 불린 메이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받아주었다.

“도련님. 피곤하시다면 유석죽을 준비하게 할까요?”

“됐어. 그럼 또 아버지가 어디다가 마력을 낭비했냐고 호통을 치겠지.”

“조용히 준비시킬 수 있습니다.”

“이 저택에 아버지 눈 안 닿는 곳이 어디 있다고?”

세리야는 어두운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은 한껏 발돋움을 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풀 죽어할 거 없어. 그래도 세리야는 내 편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 도련님.”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거든.”

도련님은 파샨의 꼬리를 꽉 쥐어서 그녀를 일으켰다.

“도, 도련님!”

“파샨이라고 했지? 좋아, 파샨. 나는 이렇게 너한테 맛있는 음식과 강력한 힘을 줄 수 있어. 그렇담 너는 나에게 뭘 줄 수 있어?”

파샨은 아직도 부르르 떨리는 몸을 넙죽 엎드리고 고민했다.

맛있는 음식과 강력한 힘에 대한 대가.

그건 수인 여자에 불과한 파샨에게는 너무나도 비싼 것이었다.

사실, 파샨은 그 값을 치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파샨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을 드리기로 했다.

“저를 드리겠습니다.”

“너를?”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건 됐어. 그렇지만 너를 주겠다는 그 말, 제대로 지킬 수 있어?”

파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고 답한다는 인상을 주기는 싫었다.

하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대답할 수 있었다.

도련님이 주워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천천히 시들어가다가 어느 순간 하품을 하듯 죽었겠지.

그러니 도련님이 살린 삶은, 도련님께 바칠 수 있다.

파샨은 이마를 바닥에 붙이며 말했다.

“예. 도련님. 도련님이 하시는 말씀이라면 뭐든 따르겠습니다.”

도련님은 씩 웃었다.

“세리야. 앞으로 네가 얘를 좀 돌봐줘.”

“도련님, 하지만 가주께서 저택에 수인을 들인 걸 아신다면...”

“한 달. 한 달만 네 숙소에서 재워. 그 정도는 숨길 수 있잖아?”

“예. 그럼 그리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달 후에는요?”

“병영으로 돌려보내야지.”

파샨은 도련님이 무슨 생각을 가진 건지 의아했지만, 그 뜻을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저 시킬 일이 있겠거니 했다.

도련님이 그 모습을 보고 더 흡족해한 것은 당연했다.

***

딱 한 달 후.

파샨은 병영으로 돌아갔다.

규칙적으로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꾸준히 마력을 전달받다 보니 그 한 달 사이에 파샨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우 털에는 윤기가 흘렀고 두 눈동자에도 총기가 가득했다.

키는 여전히 작았지만 여우 수인 특유의 귀여운 매력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욕정을 품는 이들도 생겨났다.

지금까지는 꾀죄죄한 몰골이 나름대로 보호색 역할을 해주었지만, 때가 벗겨지고 빛이 나자 어쩔 수 없이 눈길을 끌고 만 것이다.

훈련장 으슥한 구석 안 쪽.

파샨은 자신을 밀어붙인 남자들을 셈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중에는 그녀에게서 식사를 빼앗던 병사들도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사과하러 부른 건 아니지?”

“사과?”

병사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파샨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들은 자신에게서 식사를 빼앗은 일 따위는 기억하고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좋아. 그럼 맘 편하게 덤벼.”

“이런 건방진 년을 봤나. 오냐. 질질 짤 때까지 괴롭혀주마.”

제일 키 큰 병사가 허리 흔드는 시늉을 하자 나머지가 킬킬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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