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파샨의 과거
* * *
파샨은 더 보지 않고 발치의 돌을 띄워서 걷어찼다.
콰직.
불쾌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키 큰 병사는 입을 벌린 채 가랑이를 부여잡고 무너졌다. 그의 바지춤에는 새빨간 선혈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사타구니를 부여잡으려다가 파샨이 비웃는 모습을 보고 벌컥 화내며 달려들었다.
“이 씨발년이!”
“족쳐!”
“죽여버려!”
파샨은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했다.
체구가 작은 건 이런 난투에서 꽤나 유리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주먹과 발을 피했다.
병사들은 서로 엉켜서 서로의 몸을 때리고는 욕설을 퍼붓곤 했다.
“때리지 말고 일단 붙잡아! 붙잡고 패라고!”
바짓가랑이에서 피를 줄줄 흘리던 키 큰 병사가 울먹이며 외쳤다.
그의 말에 병사들은 파샨의 팔을 붙잡았다.
“놔!”
파샨은 버럭 소리 질렀다.
자신은 이미 도련님에게 바쳤다.
맛있는 음식과 기분 좋은 마력과 존재 이유까지 내려주신 데에 대한 너무나도 작은 대가였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것은 도련님의 것이었고, 거기에 다른 놈이 닿는 것조차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놓으라고 했지!”
파샨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 팔을 잡고 있던 병사 둘이 자세를 무너뜨리고 발라당 넘어졌다.
“어어...? 어어어어? 뭐, 뭐야?”
파샨은 넘어진 병사를 걷어차서 다른 놈에게 날리고, 멍하니 서있는 녀석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 헉!”
명치를 맞은 병사는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다가 안색을 새파랗게 하고 쓰러졌다.
마지막 남은 병사 하나는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오지마 씨발년아! 이 괴물 같은 년!”
“너희가 먼저 불렀잖아, 이 모자란 새끼들아!”
파샨은 달려가서 냅다 발차기를 날렸다.
병사는 단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바닥에 굴렀다.
다섯 명의 병사는 정순한 마력을 잔뜩 수혈 받은 파샨의 발치에도 닿지 못했다.
파샨은 처음으로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것이 도련님의 덕분이라는 것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씨발... 씨발년... 죽여버릴 거야...”
병사들은 조그마한 여우 수인이 자신들을 이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밑바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파샨은 이대로 놔두면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송곳을 쥔 채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파샨은 적절한 폭력과 공포를 주입시켜 주었다.
덤벼드는 놈들은 다시 주먹으로 후려치고, 빌빌 기어다니는 놈들은 발로 걷어찼다.
특히 자신의 식사를 빼앗은 병사들은 정강이를 박살내고 무릎 꿇게 한 후, 멱살을 잡고 면상을 후려쳤다.
같이 못 먹는 처지에 식사를 빼앗는 건 목숨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도 그 점을 모르지 않았을 테고.
도련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파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후려갈기는 파샨의 주먹은 점점 더 매서워졌다.
옥수수 같은 치아를 두어 번 토해내고 나자, 파샨에게는 아쉽게도 그들의 눈에 복종하는 뜻이 서렸다.
“죄송합니다.”
“살려만주십쇼.”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발음이 좀 부정확하기는 했지만 대충 그런 뜻이었다.
복수는 별 거 없었다.
가슴이 좀 후련해지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이 복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파샨은 저택에서 지냈던 한 달 간의 밤을 떠올렸다.
밤새가 울고, 저택의 메이드들도 꾸벅꾸벅 졸 무렵.
그 때가 되면 파샨은 세리야를 따라 몰래 도련님의 방으로 향했다.
도련님은 잠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파샨을 보면 언제나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었다.
“내 베개.”
안는 베개 취급이었지만.
그래도 파샨은 도련님의 품에 안길 때마다 행복했다.
뜨겁게 흘러들어오는 마력.
강하게 안아오는 압박감.
어쩌면 자신보다도 보드랍고 흰 피부.
도련님은 파샨을 안고 마력을 흘려주면서 먼저 잠에 들었다.
그럴 때면 파샨은 도련님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누이를 찾는 도련님의 잠꼬대를 들으며 떠나간 도련님의 누이들의 모습이 어떨지를 상상해보기도 하고.
이제는 잘 떠오르지도 않는 자신의 막내 동생의 얼굴을 도련님과 겹쳐보기도 하고.
저 쪽에서 호롱불에 책을 읽고 있는, 도대체가 잠을 자는 건지 알 수 없는 세리야를 훔쳐보면서 메이드란 무슨 존재일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자신도 어느샌가 스르륵 잠에 들어있었다.
그리고 새벽녘, 다른 메이드들이 도련님을 깨우러 오기 전에 세리야와 함께 다시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무채색이었던 파샨의 과거를 선명하게 덧칠해주는 기억이었다.
그것들은 파샨을 무개성한 흙집의 아홉째 딸이 아니라 도련님의 소중한 작은 부하로 만들어주었다.
도련님을 만나기 전의 파샨은 아무런 목적 없이 살아왔다.
굳이 따지자면 먹고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순환적인 공허함이었다.
도련님을 만난 후의 파샨은 그로부터 귀염을 받고, 또 그로부터 목적을 부여 받았다.
스스로 생각해낸 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자신을 아껴주는 도련님이 내려준 목적은 스스로가 억지로 짜낸 목적보다 훨씬 나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정체성은 도련님에 의해 새로 빚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 킁!”
파샨은 코를 훌쩍이는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들에게도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들도 자신처럼 바뀔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그렇게 자비롭지 못하고, 그렇게 큰 자비를 내려줄 처지도 아니다.
그래도 도련님 덕분에 아주 작은 재량을 발휘해줄 수는 있다.
“또 덤빌 거야?”
병사들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파샨은 그들에게 은화 한 푼을 던져주었다.
“내가 부사관한테 얘기해둘 테니까, 나가서 밥 먹고 치료 받고 와. 이제부터 딴 놈들 밥은 건드리지 말고.”
병사들은 파샨의 눈치를 보다가 비틀거리면서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파샨은 그들이 어떻게 나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말을 들으면 그거야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또 한 번 두들겨 패주면 그만이니까.
“저기... 이거...”
그래도 그들이 밥을 사먹고 의원에 다녀온 거스름돈이라며 동화 몇 푼을 들고 왔을 때, 파샨은 조금 기뻤다.
자신의 선의가 보답 받았다는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자신도 도련님처럼 선의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이 더욱 기쁜 일이었다.
“너희들 말이야. 나랑 일 하나 하자.”
“무슨 일... 말입니까...?”
파샨은 다섯 명의 병사들에게 은화 한 푼씩을 새로 나눠주었다.
“그걸로 친한 녀석들한테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해. 대신 내가 부르면 제깍제깍 나오고, 일을 시키면 그대로 따르는 거야.”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지만 결국은 모두 은화를 받아들였다.
파샨은 그들을 데리고 파벌들을 하나씩 꺾어나가며 부대를 장악해나갔다.
필요할 때면 주먹도 썼지만, 도련님이 쥐어준 용돈이 도움이 되었다.
그에게는 푼돈이었지만 파샨에게는 거액의 군자금이나 다름없었으니.
보병부대에서 파샨의 명령이 곧 법으로 통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영 내 사조직 결성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지만, 어차피 식비를 착복하는 걸 묵인할 정도로 보병부대는 방치되어 있었다.
백작과 집사장의 눈은 위를 향하지, 밑을 내려다보지는 않는다.
파샨은 도련님의 지시대로 착실히 보병부대를 장악해나갔다.
그렇지만 파샨은 어느 순간 한계를 느꼈다.
백작과 집사장이 보병부대를 방치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보병부대는 어차피 화살 받이에 불과하다.
큰 전쟁이 나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다.
레시아르 백작은 전쟁이 아니라 계략으로 영지를 꾸려나가고 있었으니.
파샨은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꼈고, 무슨 용기에선지 그 심경을 도련님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도련님은 씩 웃을 따름이었다.
“나는 아직 어려. 너도 그렇고. 시간은 우리 편이야.”
“그렇지만...”
“그리 급할 거 없다니까. 어차피 이 레시아르 전체가 언젠가는 내가 다 계승 받을 것이야. 나는 그냥 그 시간을 조금 앞당기고 싶은 것뿐이지.”
레시아르 백작은 건강하고 조심성 많은 인물이다.
그가 장수한다면 도련님이 수십 년 후에도 가주 후계에 머무를 공산이 크다.
하지만 도련님은 언젠가 한 번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다가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장악력을 슬금슬금 넓혀나가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조급해 할 필요는 없어. 아무리 빨라도 십 년을 내다보고 하는 계획이니까.”
“십 년...”
파샨은 그렇게 먼 미래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십 년 후의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를 상상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그 먼 미래에도 자신이 도련님을 모시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안심이 되었다.
도련님은 파샨이 옅게 한숨을 내쉬는 걸 보고, 그녀의 턱 밑으로 손을 뻗어서 파샨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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