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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64화 (164/166)

〈 164화 〉 파샨의 현재

* * *

파샨은 새벽 냄새에 살포시 눈을 떴다.

닫힌 문틈 사이로도 차갑고 시원한 새벽 냄새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얼굴을 닦았다.

지난밤의 정사는 길고 끈적끈적했다. 도련님은 자신의 몸 곳곳을 희롱하고 또 아껴주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안아주지 않은 것은 좀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런 걸로 오래 서운해 할 정도로 자신과 도련님의 관계가 얕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제대로 안아주시겠지, 생각하고 파샨은 물을 떠와 수건으로 도련님의 몸을 닦아주었다.

“파샨.”

도련님이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여우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꿈을 꾸고 계신 걸까.

나처럼 옛날 꿈을 꾸고 계신 걸까.

파샨은 지난 밤 길고 긴 꿈을 꾸었다.

보병부대의 막후였던 그녀가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올라가기까지 있었던 역경들.

켈자르와의 치열했던 영지전.

창관 인어의 노래가 초가을의 과실로 문패를 바꾸어 달 때까지 벌어진 뒷골목의 암투.

그녀는 도련님을 도와 레시아르를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장악했다.

그래서 켈자르의 주도 카르마시아를 정벌하고 기회가 왔을 때, 도련님은 전광석화처럼 몰아쳐 레시아르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제 레시아르의 주인은 서부의 주인이자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대귀족 중 하나가 되었다.

“파샨...”

“네. 도련님.”

하지만 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실린 감정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파샨은 무한한 애정을 느끼며 그의 품에 다시 안겼다.

도련님은 언제나처럼 자신을 꼭 안고 다시 잠에 들었다.

***

간만에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나는 정오쯤에야 일어나서 씻고 식사를 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파샨의 자매들이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파샨과 페렛이 아래쪽에서 따로 상을 받아 식사를 하고 있는데.

“... 응?”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아니. 네가 페렛한테 대하는 게 좀 달라진 거 같아서 말이야.”

파샨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떼었다.

그녀는 고기 한 점을 떡하니 집어서 페렛에게 넘겨주던 참이었다.

이전 같으면 소리 내지 말고 처먹으라며 뒤통수를 때렸을 텐데.

“그냥... 이 애한테도 한 번 기회를 줘보고 싶어서요.”

“기회?”

“도련님이 제게 주셨던 그런 기회요.”

페렛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렸다.

입가에는 육즙과 소스가 잔뜩 묻어서 칠칠맞기 그지없다.

대운하 공사장의 상점 앞에서 먹이를 노리던 너절한 잡도둑의 모습은 아무리 깨끗한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도 쉽사리 지워지지가 않았다.

이 족제비 수인이 바뀔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지만, 파샨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파샨에게 주었던 기회를, 파샨이 페렛에게 준다고.

내 정(?)을 연 단위로 받지 않는 이상 족제비 수인인 페렛이 파샨처럼 강해질 리는 없지만... 파샨이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겠지.

적어도 어떤 목적을 가진 삶을 향한 기회.

그 목적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일지라도, 그저 먹고 싸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

파샨이 말하는 기회라는 건 그런 거겠지.

고향 마을에서 무언가 생각이 변화할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잘해 봐.”

“예. 도련님.”

“... 네. 도련님.”

페렛은 눈치를 보다가 파샨을 따라했다.

파샨은 페렛의 머리에 주먹을 내리쳤다.

“넌 공작님이라고 불러야지. 아니면 주인님이나.”

“아얏... 네에. 파샨님.”

페렛은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머리를 싸매 쥐었다.

저 족제비 수인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보는 것도 나름 즐거운 일이겠지.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에는 아티아로 돌아갈 채비를 하게 했다.

마을 주민들은 며칠 더 묵어가십사 했지만 나도 슬슬 저택이 그립다.

어머니 같은 이데트 누이와 막내 동생 같은 수잔느 누이가 한참 기다리고 있겠지.

나와 이데트 누이를 의심하던 파레트 누이도 지금쯤이면 의심을 거두었거나 모른 척해주기로 마음먹었을 거다.

메이드장 세리야, 그 휘하의 유리, 데이지, 코코, 넬라, 호위기사 체닐린, 부관 타라와 책사 이오시스, 그리고 세 첩실인 마티란 자작 루이사와 아마트리체 파티스트롬, 화리메 아우럼, 카산드라 공주와 유페리아 공주, 세자비, 왕비까지.

하나씩 떠올려보니까 많긴 하네.

어쨌든 그녀들도 슬슬 그립던 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묵혀둔 약속도 이행해야 할 때가 되었고.

나는 파샨의 아버지에게 금화를 넉넉히 주고 길을 떠났다.

파샨의 자매와 형제들 중 몇몇, 그리고 마을사람들 중에서 친위대원에 자원하기로 한 이들이 따라붙었기 때문에 고타마를 타고 날아가는 대신 고타마를 걷게 했다.

여기서 아티아까지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다.

영지를 순회한다는 기분으로 가끔 보이는 마을에 들러 내키는 대로 여자를 취하고 금화를 뿌렸다.

그러다가 분쟁이 있으면 나쁜 놈은 볼기를 치거나 죽이고.

억울한 놈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내렸다.

애매한 사안에 대해서는 강제로 조정을 내렸다. 어차피 모두가 완벽히 만족할 수 있는 해답은 없을 테니, 이런 사안은 강제력을 가진 해답을 조속히 내려주는 게 낫다.

공작님이 괴조를 타고 마을을 순회한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우리가 마을을 도는 것보다도, 억울함을 품은 마을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오는 게 더 빨랐다.

제대로 된 사법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이 땅의 주인이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면 다들 맨발로 뛰어나가 해묵은 송사 문제를 두 손으로 떠받쳐 올렸다.

이걸 다 무시할 수도 없고 말이지.

나는 고타마 위에서 별의별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토지 문제, 노예 문제, 치정 문제, 무슨 놈의 문제가 그렇게 많은지.

아티아로 돌아가면 전문 법관들부터 뽑아서 각지로 보내야겠다.

아마 부게른 남작이 법학을 배웠다고 했었지.

그에게 배운 법관들에게 1심을 하게 하고, 부게른 남작과 아티아의 봉신 귀족들에게 2심을 맡기고, 3심만 내가 하면 일이 확 줄지 않을까.

대충 짜낸 생각이지만 나중에 타라, 이오시스와도 논의해봐야겠다.

“다음 송사 건입니다. 도련님. 오늘은 이게 마지막입니다.”

파샨은 두 남자를 고타마 옆으로 걷게 하면서 말했다.

둘 모두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지 복장이 깨끗했다. 동물의 특징도 딱히 없었다.

이들은 아마 수혈 평민, 그 쪽에서도 가계에 동혈이 약간 섞인 자들일 것이다.

“무슨 문젠데?”

“여기 두 남자는 부자지간인데, 아버지 쪽이 아들의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나는 두 남자를 훑어보았다.

이 둘은 넙죽 엎드리려다가 내가 고타마를 몰고 있다는 걸 떠올리고 목을 어깨 안으로 집어넣어 깊숙이 인사했다.

듣고 보니 얼굴이나 움직임이 좀 비슷하긴 하다.

“이름이 뭔가?”

“존귀하신 공작님. 소인은 저 아랫마을에서 대장간을 하고 있는 큰 부겐이라 하옵고, 아들놈은 작은 부겐이라 합니다.”

“그래. 부겐. 왜 아들놈 결혼을 막겠다는 거야?”

결혼하는데 아비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명문법은 없다.

하지만 관습적으로는 거의 아버지의 결정대로 혼사처가 정해지기 마련이다. 당장 카산드라 공주가 그렇게 내게 바쳐졌지.

그렇지만 그런 관습도 엄격하게 지켜지는 건 기사 가문 이상에서나 그렇고.

평민들이야 대체로 자유연애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 아비가 아들의 결혼을 막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다.

큰 부겐은 아들을 노려보더니 내게 하소연했다.

“제가 존귀하신 공작님의 은덕으로 대장간 철밥을 먹은 지가 어연 서른 해가 넘었습니다요. 그동안 손가락 하나 날려먹고 온몸에 화상 안 난 곳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해서 겨우 자식 놈에게 물려줄 재산이랄 만한 것도 장만했습죠. 그런데 아들이라고는 하나 있는 녀석이 데려온 여자가 글쎄...”

파샨과 페렛은 흥미진진하게 큰 부겐의 하소연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대충 결말이 예상이 갔다.

“뭐 술 파는 여자나, 헤픈 여자나. 그렇다는 거 아닌가?”

“절대 아닙니다!”

그 때까지 조용히 있던 작은 부겐이 소리쳤다.

파샨이 눈치를 주기도 전에 페렛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큰 부겐도 급히 자신의 아들을 두들겨 팼다.

“이런 못된 놈! 아비 속을 그렇게 썩이더니 존귀하신 공작님께 목소리나 높이고! 이런 못난 놈! 못난 놈 같으니!”

“됐어. 자네가 그리 패지 않아도 그 정도 무례는 넘어가주지.”

“감사합니다요.”

나는 손을 휘휘 젓고 작은 부겐을 불렀다.

“작은 부겐. 자네가 말해봐. 큰 부겐이 자네 결혼을 막겠다는 이유가 뭔가?”

“존귀하신 공작님. 제 아버지는 라핏이 수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와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수인?”

큰 부겐이 그를 밀치고 나와서 내게 또 하소연을 했다.

“존귀하신 공작님. 지금은 제가 대장간에서 철밥을 먹고 있지만,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자면 제 종조부는 레시아르 가문을 위해 검을 들었던 기사였습니다. 제가 이리 재산을 모아뒀고 또 대장간도 물려줄 것이니 제 아들놈도 어디 참한 처자라도 얻어오면 가세를 일으킬만 할 것인데, 머리 위에 토끼 귀 달린 여자를 데려오니 제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대충 알만했다.

숙련된 대장장이로 중산층이라고 할 법한 큰 부겐은 아들이 상승혼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럼 아들 며느리감은 따로 구해 놓은 것인가?”

“예. 실은 제 종조부께서 저 윗마을의 기사 가문과 약간의 연이 닿아있는데, 그 곳에서 서녀를 짝지어준다고 하여 예물까지 다 준비해놨지 뭡니까.”

행동력이 보통은 넘는 남자구먼.

큰 부겐이 계획한대로 말단 기사 가문의 서녀라도 며느리로 들이면 격세유전으로 동혈의 손자, 손녀를 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토끼 수인이 덜컹 며느리로 들어오면 손주 세대에는 기사의 피가 더 묽어질 것이고, 그 이하의 세대에서는 수인에 가까운 모습의 후손들이 태어날 것인바, 결국 기사 가문과의 격차는 더욱 더 벌어질 것이다.

피가 많은 것을 결정하는 세계.

나는 그가 아들의 결혼에 반대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파샨은 왜인지 자신이 혼나는 것처럼 시무룩해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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