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65화 (165/166)

〈 165화 〉 파샨의 현재

* * *

나는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일단은 그 여자를 한 번 보고 판단하지. 그 여자도 여기 와 있나?”

“네. 도련... 주인님. 작은 부겐을 따라 왔다고 합니다.”

페렛은 금세 여자를 데려왔다.

그녀는 흔하디흔한 토끼 수인이었는데, 그것도 수혈 농도가 상당히 짙은지 얼굴에까지 숭숭 털이 나 있었다.

“확실히, 이 여자가 낳은 아이는 수혈의 피가 더 짙어지겠어. 가문을 건사해야 하는 아비로서는 수인을 며느리 삼는 게 내키지 않을 수도 있겠군.”

내 말에 큰 부겐은 작은 부겐에게 보란 듯이 우쭐거렸다.

나는 뒷말을 이었다.

“허나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는데 아비 마음대로 다른 짝을 지어준다면 그 결혼이 원만하게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존귀하신 공작님. 그것이, 저희 같은 촌것들은 살다보면 같이 살아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자네 처랑 잘 살고 있나 보지?”

“... 처는 제 도제 놈이랑 바람이 나서 도망갔습니다.”

나는 괜히 멋쩍어서 콧잔등을 긁적였다.

“혼자서 아들 놈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그렇게 키운 놈이 이렇게 속을 썩이니 죽을 것 같은 겁니다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작은 부겐은 어떻게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거지?”

“예. 공작님. 아버지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아버지가 사랑 없이 한 결혼생활의 표본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살기 싫습니다.”

큰 부겐은 몰래 작은 부겐의 정강이를 찼다.

작은 부겐은 끙끙거리면서도 신음소리를 참았다. 토끼 수인 여자가 그의 팔을 지그시 잡아주었다.

나는 부자끼리 툭탁거리는 걸 모른 척 하고 큰 부겐에게 다시 물었다.

“그리고... 큰 부겐은 후손을 생각해서라도 혈통이 좋은 여자를 가계에 들여야 한다는 거고.”

“암요. 그렇습니다. 존귀하신 공작님.”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 가지만 묻자면... 자네 지금도 물건이 서나?”

큰 부겐은 황당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곤란할 정도로 서지요.”

“그럼 이렇게 하자고. 며느리로 들이려던 기사 가문의 서녀를 자네 후처로 들이는 거야. 그리고 작은 부겐은 제가 좋아하는 아내와 결혼을 시키는 거지. 그럼 후사 문제는 후사대로 해결하면서도 작은 부겐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어?”

큰 부겐과 작은 부겐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일단 큰 부겐으로서는 나쁠 게 없다.

며느리 삼으려던 여자를 늘그막에 후처로 삼게 되니 오히려 좋지.

“다만, 말단 기사 가문의 서녀라고 해도 일단은 저희보다 지위가 있는데, 젊은 아들놈이 아니라 늙은 제가 갑자기 신랑이 된다고 하면 그 쪽에서 역정을 내지 않겠습니까요?”

애초에 예물을 받고 팔려던 딸이 누구한테 팔리던 제 놈들이 신경 쓸 바인가.

그리고 그 서녀한테는 좀 미안하게 됐지만, 젊은 놈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결혼 생활을 하느니 좀 늙은 놈에게 사랑 받는 결혼생활을 하는 게 낫겠지.

“그래도 문제라면, 내가 결혼식에 친위대원 하나를 하객으로 보내주겠어.”

“그럼 그 쪽에서도 아무 말도 못하겠... 아니, 오히려 영광으로 알겠군요.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합니다요.”

나야 돈 드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야 손쉬운 일이지만.

일개 대장장이와 말단 기사 가문의 서녀의 결혼식에 공작의 친위대원이 하객으로 참석한다면 그들에게는 더 없을 영광일 것이다.

한편, 작은 부겐으로서는 아무래도 조금 손해를 보게 된다.

재혼으로 인해 배다른 동생이 생기게 되면 상속분이 절반, 혹은 그 이하로 줄어들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뭐든 원하는 대로만 할 수는 없다.

진정한 사랑과 결혼하고 싶다면 그 정도는 양보해야지.

“... 저도 공작님의 은혜로운 판결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토끼 수인 여자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렇게 하게. 이의는 없는 걸로 알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공작님."

"가, 감사합니다..."

큰 부겐과 작은 부겐, 그리고 이제 며느리가 된 토끼 수인 여자는 내게 각자 검 한 자루, 여우 조각상 하나, 그리고 잘 마른 도토리 한 자루를 바치고서 물러났다.

그들은 문제가 잘 풀려서 그런지 그런대로 친밀한 모습으로 함께 돌아갔다.

“명판결이십니다.”

파샨의 형제 중 하나가 슬쩍 아첨을 했다.

“명판결인가?”

“아비와 자식, 그리고 며느리까지 모두 만족했으니 명판결이 아닙니까?”

“글쎄…….”

결국 혈통이라는 문제는 꼼수로 해결했을 뿐이다.

이 세계에서는 개인의 행복 따위보다도 혈통이 훨씬 중요시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지.

파샨의 형제, 자매들은 그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파샨만은 위축된 표정을 애써 숨기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하고 있을 생각이란 건 뻔했다.

‘역시 수인은...’

'더 바라지 말자.'

'딱 여기까지, 지금 이대로만...'

내가 내린 총애와 편애와 정애에도 불구하고, 파샨은 그렇게 생각하며 움츠러들고 있었다.

파샨에게 솔직하지 못한 소년처럼 굴던 내가 할 말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샨."

"... 예? 예! 도련님!"

"조금 가슴이 답답하니까, 날아보자."

파샨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고타마의 고삐를 낚아챘다.

"타마야, 가자!"

­ 끼루루루루룩!

고타마는 텅텅텅 묵직한 소리를 내며 언덕 내리막길을 달려가다가, 그대로 날개를 쫙 펼쳤다.

맞바람이 시원하게 우리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 끼리리리릭!

고타마의 깃털에 묻혀있던 새끼 고타마도 호쾌하게 소리를 질렀다.

고타마가 날아오르기 직전에 간신히 꼬리를 잡아 탄 페렛이 바람을 견디면서 다가와서 납죽 엎드렸다. 아직 나는 게 무서운 모양이었다.

"파샨, 더 높이!"

"네! 도련님!"

파샨은 고타마의 목 뒤를 찰싹 때렸다.

고타마는 힘차게 울음소리를 내면서 날개를 펄럭였다.

깃털 몇 개가 저 아래서 웅성거리고 있는 파샨의 형제자매들 위로 떨어졌다.

"너희들은 그대로 아티아로 가! 나는 파샨과 바람 좀 쐬다 들어갈 테니까!"

나는 아래를 향해 외쳤다.

알아들은 것인지, 지면에 바싹 붙어있던 파샨의 형제자매들이 넙죽넙죽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

고타마는 그들을 뒤로 하고 더 높이 날아올랐다.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부닥쳐왔다.

하지만 나는 굳이 파샨에게 말을 걸었다.

"파샨!"

"네! 도련님!"

"너처럼 하늘을 난 여우 수인이 있을까?"

파샨은 캴캴 웃었다.

"없을 겁니다! 그런 운 좋은 여우 수인은 세상에 저밖에 없을 거예요! 족제비 수인은 여기 하나 있지만요!"

"무서워... 요! 파샨님! 주인님!"

페렛은 덜덜 떨면서 고타마의 등거죽을 꽉 잡았다.

고타마는 아팠는지 끼루루룩 울면서 날개를 더 세차게 펄럭였다.

나는 파샨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래! 너 하나 뿐이야, 파샨! 너 하나 뿐이라고! 이런 운 좋은 쪼그만 여우 수인아!"

"헤헤... 맞아요! 저는 운 좋은 여우 수인이에요!"

"단순히 운만 좋은 거야?"

"도련님이 행운을 내려주신 거죠!"

"내가 내린 알량한 기회를 붙잡아서 행운으로 바꾼 건 너야."

"네?"

입 안에서 맴돈 말은 바람에 휩쓸려서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 말을 다시 해주는 대신, 파샨의 귀를 마구 만지작거렸다.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나도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우리는 고타마를 타고 아티아 근처를 오갔다.

그러다가 해질녘이 되었을 때, 파샨은 이대로 아티아에 들어가서 쉴 것을 권했지만 나는 굳이 야영을 고집했다.

고타마는 기진맥진해서 빈 초원 위에 내리앉았다.

녀석은 물만 조금 마시고 곧바로 잠에 들었다.

아직 작은 새끼 고타마는 자기가 난 것도 아닌데 따라서 지쳤는지 금방 눈을 감았다.

페렛은 눈치껏 모닥불을 만들고 먹을 수 있는 풀 쪼가리를 주워왔다.

하지만 그것도 파샨의 성에 차지는 않았다.

"먹을 건? 항상 작은 배낭에 비상식량을 챙겨 넣고 다니라고 했잖아."

"맞다. 그거 아까 날아갔어요... 아얏."

"그게 얼마짜린데. 너 내일 점심은 굶길 줄 알아."

파샨은 투덜거리면서 자기 배낭을 꺼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티아 인근의 초원이라, 밤중에도 상행을 다니는 상단의 마차들이 있었다.

그들은 불빛에 비치는 괴조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는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바쳤다.

"고타마가 이제 그렇게 유명한가 보지?"

나는 굽실거리고 떠나가는 상인들을 보면서 물었다.

파샨은 치즈가 송송 박힌 소시지를 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에서도 크게 활약했고 또 도련님이 자주 타고 다니시니까요. 고타마야 훌쩍 날아서 어디든 금방 갈 수 있으니까 지방 봉신들도 언제 도련님이 감찰 나올지 몰라서 고타마의 울음소리와 생김새를 알아두었답니다."

"그것 참."

잠시 대화가 끊겼다.

타닥타닥 하고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페렛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파샨은 그녀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이 언제 한 사람 몫을 해낼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겠어. 너도 처음부터 다 잘한 건 아니라고."

"흐히히..."

다시 정적.

모닥불에서 불씨가 흩날렸다.

파샨은 묵묵히 저녁상을 준비해서 내게 바쳐 올렸다.

상인들이 주고 간 음식들로 바로 만든 것이었지만 꽤나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음식들을 치워놓고 파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파샨."

"네. 도련님."

"아까 부겐 부자의 판결을 내릴 때도 그랬지만 말이야."

"네... 도련님."

"혈통처럼 중요한 게 있나 싶어."

파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혈통은 마법사에게는 세상의 근원이 되는 다섯 가지 속성을 나뉘게 하는 것이었고, 기사에게는 마력을 품게 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평민들에게도 저들끼리의 급수를 나누게 하는 기준이었다.

혈관에 흐르는 피가 곧 마력이요, 힘이 되는 이 세계에서 혈통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지는 불변의 체계이기도 했다.

심지어 혈통은 성욕에도 관여했다.

더 순도 높은 마력을 가진 혈통은 상대를 쉽게 발정시킨다. 반대로, 귀족들은 마력이 미미한 수인의 혈통에 성욕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내가 수인들을 거의 안지 않는 이유에는 아마 그런 본능적인 기피감도 작용했겠지.

"그렇지만 말이야. 내가 그런 것들을, 혈통이니 순수함이니 기피감이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아낀 수인이 하나 있어."

파샨은 흠칫해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여우 수인의 동글동글한 눈에 모닥불과 내가 담겼다.

나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파샨."

"... 네, 도련님..."

"내 악행과 선행과 성행에 기꺼이 어울려준 이 조그마한 여우 수인아."

"네. 도련님."

"나는 너를 좋아해."

파샨은 장난처럼 히히 웃어넘기려했다

"저는 도련님의 총애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조그마한 여우 수인이에요."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총애한 거야. 같은 말인가... 그렇지만, 그래."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을 엮어내어 아름다운 말로 치장할 정도의 말재간이 내게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은 파샨을 제대로 안는 것뿐이었다.

나는 옷을 벗어 풀밭 위에 놓고, 파샨을 눕혔다.

그녀의 눈동자에 밤하늘과 내가 담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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