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아카바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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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녀석이 바로 내가 찾던 로제의 일일 선생님이었다.
“하하하! 심상치 않은 속도로 접근하기에 적인 줄 알았더니만…… 피크닉 온 커플이었군. 내 큰 무례를 저질렀소.”
들고 있던 검을 허리춤에 납검 하고는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사과하는 남성.
갑작스레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감당하지 못하겠는지, 내 아래 깔려있던 로제의 눈동자가 빙빙 돌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특성 : 귀족] 때문인지 옷차림이 더러워지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긴. 앞에 저 미친 노인네가 다짜고짜 검기를 날린 것이지.”
나는 그렇게 투덜대며 앞에 선 노인을 바라보았다.
중후하고도 인자함이 느껴지는 얼굴, 아이보리색 면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었지만 깔끔함을 과시하듯 잔머리 없이 넘겨진 포마드는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흠? 허허허, 미친 노인네라니. 그것도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마르바스는 실제로 놀라며 웃었다. 그야 본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테니까.
“내 공격을 피한 것 하며, 말본새를 보아하니 이 늙은이의 정체를 알고 온 것 같다만…… 그대들은 누구신가?”
웃는 얼굴 덕분에 가려져 있던 마르바스의 눈동자가 희번득 빛났다.
마치 호수에 비친 석양을 빼다 박은 듯한 눈동자, 초원의 사자가 연상되는 눈동자였다.
“놀랍군, 그대가 나를 못 알아볼 줄은 몰랐다네. 마르바스여.”
“호오?”
내 말을 들은 마르바스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괸다.
“파이몬은 나를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챘는데 말이지.”
입꼬리를 올리며. 나는 읊조렸다.
“변신.”
화려한 빛무리와 함께 변화하는 몸. 그제야 마르바스는 경계심을 완전히 지운 얼굴로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레고리 존스! 나의 둘도 없는 친우이자 마계의 보석! 지하의 지배자가 아니신가!”
내 바퀴폼을 본 마르바스가 크게 놀라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포옹하자는 건가? 바퀴폼 일 때는 포옹하자는 사람이 없어서 당황스러웠지만 상대 반응이 너무 격해서 나도 모르게 받아주고 말았다.
“그, 그래.”
땅을 받치고 있는 한 쌍의 다리를 제외한 두 쌍의 다리로 마르바스를 안아주었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의 그레고리가 경보를 울렸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오랜만의 만남이라 받아주었다만…… 이만 떨어져 주지 않겠나.”
“하하하! 여전하군! 나는 그대가 포옹을 받아주기에 자네가 아닌 줄 알았지 뭔가!”
역시 이렇게 말하는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었다.
내 몸에서 떨어진 마르바스가 몸을 훑고는 말했다.
“블랙 오팔 같은 그대의 몸은 언제 봐도 아름답군. 여전히 다부져 보이는 몸이야.”
“칭찬은 고맙다만……. 원래 그대가 이런 이미지였나.”
[소환사 아카데미아 – 외전] 에서는 이런 이미지가 아닌 무게감 있는 할아버지였는데 말이야.
“인간계에 정착하고 몇십 년 만에 처음 만난 친구라 그런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말일세……. 옆에 저 엘프 친구는 누구인가? 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마르바스의 시선이 로제에게로 쏠린다.
“히끅!”
날카로운 마르바스의 눈동자를 받은 로제의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마치 찬물에 들어갔다 나온 강아지 같은 몰 꼴이었다.
“내 소환사다.”
“……소환사? 그대, 지금 소환수로 있는 게인가?”
“그래. 여기서 이야기를 했다간 길어질 것 같은데…….”
“참 그렇군! 손님을 이대로 두면 안 되지. 따라오게. 내가 머무는 곳이 멀지 않으니.”
마르바스는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려 앞장서 걸었다.
그제야 내게 달라붙는 로제. 아직도 그 몸은 벌벌 떨리고 있다.
“그, 그레고리님. 저분이 지, 진짜 그 마르바스님 이신가요?”
“그래, 아마 네가 알고 있는 그 마르바스가 맞을 거다.”
“세상에……….”
그녀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마르바스라면 게임 속에서도 SSR로 분류하는 최고 티어의 소환수.
심지어 과거 재앙과 대적할 때 일격으로 재앙의 왼팔을 잘라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악마였으니까.
“여기가 내가 머무는 별장이라네, 누추하겠지만 안으로 들게나.”
도착한 곳은 산속에 있다기에는 너무 분위기가 맞지 않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산속에 있다기에 은거 노인마냥 오두막이나 짓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잘 먹고 잘살고 있었군.”
“처음엔 그렇게 하려 했으나 역시 힘들더군. 그래서 마계에 있는 사용인들을 데리고 왔지.”
마계에서도 손에 꼽는 귀족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금방 돌아오셨군요. 마르바스님.”
마중을 나와 있던 것인지 새빨간 피부를 가진 악마가 마르바스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내 내 모습을 보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레고리 존스……. 과연,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저 녀석도 나를 아는 건가. 아쉽게도 저 녀석은 외전에 나온 적이 없어서 모르는 상대였다.
“디브라오스. 손님맞이를 부탁하지.”
“명령 받들겠습니다. 모시겠습니다. 그레고리 존스님. 그리고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
디브라오스라 불린 악마의 말을 들은 로제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햐악! 그레고리님! 들었어요? 저보고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래요!”
“……그래.”
어쩌면 저게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우리는 디브라오스의 안내를 받아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귀족 저택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었다.
바퀴폼으로 자리에 앉자 이 모습으로는 차를 마시기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인간폼으로 변했다.
역시 활동하기에는 이쪽 몸이 더 편했다.
잠시 후, 좀 더 깔끔한 복장을 하고 돌아온 마르바스가 자리에 앉았다.
“늦어서 미안하네. 그나저나 신기하군. 언제나 혼자 다니길 좋아했던 그대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소환수로 활동할 줄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말하자면 꽤 길지.”
나는 파이몬에게 말했던 설명을 마르바스에게 그대로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마르바스가 흥미롭다는 듯 내 이야기를 경청한다.
“유희라. 확실히, 스스로 힘을 봉하고 하는 유희라면 꽤 즐겁겠군.”
“그래, 그리고 이대로라면 경지를 넘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10성까지 올릴 수 있는 몸이 되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게임 시스템으로 치면 환생 시스템 같은 거려나.
내 말을 들은 마르바스가 흥미롭다는 듯 로제를 바라본다.
“이 소녀가 그 라스와 릴리의 후손이라니, 놀랍군.”
“저도 조상님과 함께 싸웠던 소드 마스터, 마르바스님을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그녀에게 마르바스란 동화 속에나 나오는 전설적인 인물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만나는 것만으로도 꿈만 같으리라.
“하하, 그렇게 치켜세워주니 이 노구가 부끄럽군.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만, 이 노구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안 겐가? 따로 누군가에게 따로 말한 기억은 없는데.”
날카로워지는 안광. 나는 [특성 : 귀족]을 이용해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했다.
“내가 모르는 건 없다.”
치트키 발동.
아, 내가 안다는데 어쩔건데? 라 이름을 붙힌 치트키였다.
이 몸이 마계의 대공이기에 가능한 방법. 이럴 땐 그냥 밀어붙이는 쪽이 더 나았다.
실제로 그레고리의 성격이 원래 이런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확실히, 그대가 말하니 납득이 가는군.”
역시 이 치트키가 통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노구를 찾아온 겐가?”
이제야 본론을 묻는가.
나는 디브라오스가 준 차로 목을 축인 후 말했다.
“로제의 검에 대한 재능을 봐주었으면 한다. 마르바스여.”
“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마르바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대에게 말했다시피 로제는 용사의 후손이다. 그렇기에 마법적인 재능이나 소환사의 재능이 충분히 있지.”
실제로 나를 소환한 것부터가 엄청난 재능충이라는 것을 인증하는 것이었다.
이에 공감한다는 듯 마르바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릴리 쪽의 재능일 뿐이다. 라스의 후손이기도 한 그녀라면 검에 대한 재능도 있을 터.”
이내 마르바스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말한다.
“그대에게는 나보다도 뛰어난 출중한 검의 재능이 있다. 그러니 그 재능으로 로제의 재능을 봐주었으면 한다.”
내 제안을 들은 마르바스가 찻잔을 들이킨다.
원샷이었다.
“확실히, 그레고리 그대는 검보단 주먹을 사용하는 무투파였다.”
내가 주먹을 사용하는 무투파였다고? 이건 좋은 정보였다. 내 성장이 어느 쪽으로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
진짜 10성 가서는 한마 바퀴가 되는 거 아니야?
“뭐, 검을 봐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소녀여, 이름이…… 로제라 했던가.”
“네! 로제 폰 유글리아에요!”
“음, 릴리 쪽의 성을 땄나 보군.”
“라스는 본래 이쪽 세계 사람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쪽에 남을 릴리의 성을 썼겠지.”
실제로 라스는 재앙을 물리치고 나서 신에게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해달라 말한다.
릴리를 임신시켜 놓고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진짜 나쁜 새끼네?
“그래, 로제여. 조금 있다가 밖에서 검을 맞대보기로 하지.”
“네에?!”
화들짝 놀란 로제가 마르바스와 검을 섞는다는 소리를 듣고 겁먹었는지 처량한 눈을 하고는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 그레고리님. 제가 진짜 검에 대한 재능이 있을까요? 검을 잡아 본 적은 어릴 때 이후로 오랜만인데…….”
“그러니 그걸 알아보자고 여길 온 거지 않느냐.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다.”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그렇게 말하며 물이 빠져 검게 물든 정수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로제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렇게 보면 이게 엘프인지 겁쟁이 강아지인지 모르겠을 정도다.
“천하의 그레고리가 저런 모습을 할 줄이야……. 소환수가 되면 다들 그렇게 되는 건가?”
우리의 모습을 보던 마르바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정 그렇게 궁금하다면 소환수가 되던가 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갑자기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마르바스. 그래봤자 저 녀석을 소환할 소환사는 세상에 손꼽힐 터였다.
과거 용사 파티에서도 겨우겨우 소환 한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르바스. 궁금한 것이 있다.”
“음? 이 노구에게 말인가?”
정말 순수한 의문이었다.
“그대가 파이몬을 잡으러 인간계로 왔다는 소문은 알고 있지만…… 그대는 파이몬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왜 인간계에 남아있는 거지?”
마르바스나 되는 인물이 파이몬의 거처를 모르는 게 말도 안됐다.
파이몬이 완전 꼭꼭 숨어있었다면 모를까, 흑마법사들을 규합해 대장 놀이를 하고 있는데, 대악마인 마르바스가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아, 그거 말인가. 그대들, 파이몬을 만나고 왔나 보군?”
마르바스의 의문에 로제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네! 파이몬님이랑 친구도 먹었어요!”
“허어! 친구 말인가? 그 파이몬과 말이지?”
로제의 대답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마르바스. 그 역시 파이몬의 성격을 알기에 이리 놀란 것이리라.
“그레고리, 자네의 물음에 대답해주자면 그렇게 큰 이유는 없다네. 오랜만에 내려온 인간계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있고…… 파이몬이 하는 짓으로 봐선 도망갈 것 같지도 않으니 내버려 두었던 것이지.”
무엇보다도, 하고 마르바스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파이몬에게 친구라니,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말일세.”
“……손녀 사랑이 유별나군.”
“허허, 손녀라니. 그저 아끼는 아이일 뿐이라네.”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던 마르바스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곤 로제를 바라보았다.
처음보다는 더욱 친근함이 느껴지는 눈동자였다.
“그래, 그렇다면 파이몬의 친우이자 그레고리의 소환사. 용사의 후손이라는 로제양의 실력을 보도록 하지. 같이 나가겠나?”
“흐, 흐에에…….”
정작 로제 본인은 무서운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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