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아카벌레 20
* * *
“자, 마음에 드는 검을 들게나.”
마르바스는 연무장에 나가기 전, 검들을 모아둔 방에 들렀다.
작정하고 파이몬처럼 꾸민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컬렉션이 모여있는 공간.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은 검들이 모여있는 광경에 로제의 눈이 커졌다.
“와! 대박! 이게 다 마르바스님 거에요?”
확실히, 로제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 안에 평범한 검으로 보이는 물건은 전혀 없었으니까.
“쓸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게임 속에서 R 등급에서 S 등급인 검들도 간혹 보였다.
“흠, 자네라면 알아볼 줄 알았지.”
힐끔 방 안쪽이 부산스러운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로제가 몸을 숙인 체 무엇인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뭘 하고 있지?”
“아, 그레고리님! 이 검이 신기해서요. 잘 보세요.”
로제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검신이 까맣게 물들어 있는 검이었다.
색깔이 신기하다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원통하다아아아~~’
“들으셨죠? 검이 말을 해요!”
……그냥 귀신들린 검이었다.
“……그런 거 말고 이거다 싶은 검은 없나.”
“이거다 싶은 검이요? 으으음…….”
내 말을 듣고는 자리에 일어서 주변을 둘러보는 로제.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제는 많은 검이 진열되어있는 장식장으로 걸어가 투박하게 생긴 브로드소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거요!”
“좋은 물건을 골랐군.”
뒤에 멀찌감치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마르바스가 말했다.
“이 검이 말인가?”
내가 보기엔 그저 투박한 브로드소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도 보지 못했던 검인데, 뭔가 숨겨진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 검은 라스가 사용했던 검 중에 하나였다는 검이다.”
“……이 검이?”
설마 게임 초반에 들고 있던 기본 장비인가?
“그래,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몇 번 사용해보더니 알겠더군.”
마르바스는 로제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브로드소드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땅에 검 끝을 가져다 댄 마르바스는 발로 검신의 중간을 있는 힘껏 밟았다.
크게 휘어지는 검신.
하지만 검은 부러지지 않는다.
“봤는가?”
“확실히. 마르바스 자네가 밟고도 멀쩡한 검이라니, 평범한 검은 아니군.”
“신화가 쌓였기 때문일세.”
“신화?”
아이템에 신화가 쌓인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흔히 말해 신비한 힘이 깃든 유물이 되었다는 거지. 이 검의 사용자였던 라스가 쌓은 신화가 검에 영향을 끼친 걸세.”
투웅. 투웅 하고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계속해서 검을 발로 짓누르는 마르바스.
이내 다시 로제에게 검을 건네준 마르바스가 말했다.
“이 검에 담긴 신화는 불굴.”
“불……굴인가요?”
“그렇다네. 과거 라스가 여정 중에 가장 먼저 사용했던 검이지. 그는 이 검을 들고 어떠한 것에도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하네. 그렇기에 검의 이름도 불굴이지.”
“……불굴.”
“검은 주인을 알아본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불굴. 그 검은 수 세기를 지나 본래 주인의 후손에게 전해졌다.
“무척 어울리는 검이네요.”
로제에게도 뜻깊은 검이리라 생각됐다. 무려 본인의 조상인 라스가 사용한 검이니.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문뜩 마르바스의 시선을 느꼈다.
“뭐냐, 마르바스.”
“자네도 하나 고르지 그래.”
“내가?”
내 의문에 마르바스가 피식 웃는다.
“자네, 소환수로 소환된 상태가 아닌가. 오랜만에 자네와 검이나 섞어볼까 해서 말이야.”
“나는 검에 대한 소질이 없다.”
“그거야 잘 알고 있지.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나? 소환사의 영향을 받아서 검술을 잘 쓰게 됐을 수도.”
내게 검의 재능이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판타지 세계에서의 검술천재라니, 과연 어떤 남자가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걸로 하지.”
나는 눈여겨보았던 S등급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마르바스가 미소를 짓는다.
“역시 예전부터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은 탁월하군. 좋네. 다들 검을 들었으니 곧바로 연무장으로 가지!”
마르바스가 말한 연무장은 내가 생각하는 연무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탄한 흙바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우선 로제부터 보도록 하지. 되는대로 나를 공격해 보겠나?”
“네? 지금요? 그냥 막 휘두르면 되는 건가요?”
“편하게. 있는 힘껏 휘두르게.”
마르바스 정도나 되니 할 수 있는 발언. 본인에게 로제의 공격이 절대 먹히지 않으리라 확신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검을 잡은 로제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이 아닌, 색다른 모습이었다.
“들어갈게요!”
몸을 뒤로 당겼다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는 로제. 그 모습은 초심자라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호오, 검술을 배웠었나?”
“어릴 때 조금요!”
연속으로 들어오는 찌르기. 하지만 마르바스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여유로이 검을 피하고 있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군.”
검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할 말을 다 내뱉는 마르바스 때문일까? 로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이익……!”
“힘이 많이 들어가고 있네. 좀 더 힘을 빼고 찌르게나.”
“왜, 왜 안 맞는 거예요!”
찌르기로는 소용이 없다 판단한 걸까. 자세를 바꾼 로제가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터진다.
“그렇지, 찌르기만 사용한다면 레이피어 쪽을 추천할 셈이었다만…… 베기도 할 줄 아는군.”
허공에 불꽃이 수 놓이며 몇 차례의 합이 오고 간다. 모든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는 마르바스와 천천히 다가오는 공격임에도 힘겹게 막아내는 로제.
옆에서 칼싸움을 구경하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이래서 대련시간마다 다들 구경하려 애를 쓰는 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제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공격을 멈췄다.
흘리는 땀과 표정, 숨소리를 들어보니 한계가 온 듯했다.
“여, 여기까지예요…….”
“음, 고생 많았네.”
마르바스가 들고 있던 검을 납도 하자 언제 왔는지도 모를 디브라오스가 두 잔의 냉수를 준비해왔다.
재빨리 잔을 잡고는 거칠게 마시는 로제.
그대로 냉수를 목구멍으로 흘려보낸 로제는 머리 위로 잔을 흔들며 ‘키야~’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마르바스, 로제는 어떤 거 같지?”
“확실히, 자네가 예상한 대로 검술에 대한 재능은 있군. 중간에 변칙적으로 공격을 섞었는데 모조리 막아낼 줄이야. 빈틈을 조금씩 흘릴 때마다 포착하는 것도 괜찮았고 말이야.”
냉수를 모두 마신 마르바스가 힐끔 나를 바라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죽으려고 하는 로제와 다르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은 격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자, 다음은 자네일세 그레고리. 기대해도 되겠나?”
검술로는 손가락 안에 드는 마르바스의 1:1 과외. 나는 검을 집고는 묵묵히 연병장으로 걸어갔다.
“기대는 하지 말도록, 검을 잡는 건 오랜만이니 말일세.”
다행히 내가 몰라도 몸이 기억하는지 내 몸은 자연스레 중단세를 잡았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자세였다.
“이쪽에서 천천히 가볼 테니 한 번 막아보게나.”
그렇게 말한 마르바스의 신형이 사라진다.
“이런 미친……!”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 재빨리 검을 옆으로 틀어 가져다 대자 엄청난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다.
“호오, 이 정도는 막아내는군.”
“벌써 노망이 든 건가? 난 아직 2성밖에 안 됐다.”
“그런가? 3성 정도는 되는 줄 알았네만…….”
마르바스의 공격을 쳐내자 자연스럽게 흐르듯 마르바스의 검이 내 머리로 향한다. 다시 한번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 몸을 숙이고 마르바스의 몸을 들이 받아버렸다.
“역시 옛날부터 피하는 재주는 남다르군. 그레고리여.”
날아간다기보단 날아가 주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동작.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으로 물러선 마르바스가 싱긋 웃는다.
“나는 로제와 달리 꽤 거칠게 다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만.”
“착각이다.”
저 사악한 얼굴을 보고 누가 믿겠느냐 따지고 싶었지만, 이 몸은 오히려 저 말에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저렇게 말한다 이거지?
“그렇게 나오면 내게도 방법이 다 있다.”
“방법? 그거 무서워지는군. 어디, 그 방법 좀 보여주게나. 그레고리여.”
지금 내 스펙으로 마르바스를 이기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녀석을 당황하게 하는 거라면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다.
“이번엔 내 쪽에서 가마.”
뒷발에 힘을 주고 튀어 오르는 녀석을 향해 달려든다.
여전히 여유로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마르바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변신.”
스킬 발동과 동시에 빛무리가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섬광에 눈을 찡그리는 마르바스. 하지만 검의 마왕이라는 칭호가 어울리게도 그는 내 검로를 읽고 여유롭게 막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 검로를 말이다.
변신한 상태인 나는 중간에 달린 오른 다리로 검을 쥐고 있는 상황.
하지만 내가 휘두른 것은 검이 아닌 맨 위쪽의 왼 주먹이었다.
“이런 미친……!”
데자뷰가 느껴졌다.
물론 대상은 바뀌었지만.
예상치 못한 주먹질을 왼팔을 들어 막아내는 마르바스.
하지만 나는 뒤이어 오른 다리를 휘둘러 녀석의 복부를 향해 내질렀다.
투웅.하고 성공적으로 공격이 들어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방금과는 달리 정말 충격을 느끼고 뒤로 밀려나는 마르바스.
그의 표정에서는 방금까지 보였던 여유로움을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검술이 아니잖나!”
살짝 화났는지 목소리가 높아진 마르바스를 바라보며, 나는 맨 위쌍의 다리를 으쓱였다.
“검을 들고 있으면 그게 검술 아닌가? 그리고 나는 검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만.”
내가 들고 있는 S등급의 검은 ‘칼라다’라는 이름을 가진 검.
사용자의 신체 능력을 잠시나마 증폭시켜주는 능력을 갖췄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망할 그레고리. 말은 잘하는군.”
내 이죽거림에 마르바스가 표정을 구기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는다.
“그대는 흥을 식게 하는데 큰 재주가 있음을 잠시 잊었다. 대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치사한 짓은 그쪽이 먼저 했다만?”
“……그건 뭐 할 말이 없군.”
그가 검을 넣었다는 것은 정말 대련을 그만하겠다는 뜻. 나는 장난스럽게 그를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그래서, 내 검술 실력은 어땠지?”
“……최악이다.”
“음. 만족스러운 평가다.”
비록 기대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되갚아주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면 되겠지.
“어이쿠!”
하단부에서의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 재빨리 날개를 펼치며 뒤로 물러서자 싱긋 웃는 마르바스가 보인다.
“뒤로 넘어질 뻔했군.”
“……유치하다. 마르바스.”
이렇게 보니 대악마가 아니라 유치한 할아버지로 보이는 마르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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