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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속 악마대공이 되었다-27화 (27/169)

〈 27화 〉 아카벌레 ­ 27

* * *

체스의 사정은 이러했다.

가울의 만물상은 본래 지하의 상품들로 먹고사는 가게나 다름없다.

어머니의 대까지는 선대가 남긴 재산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본인이 상점을 운영하면서 점차 힘들어졌다고 했다.

가울 가문의 규칙은 오직 하나.

[지하 상점은 오직 스스로 찾아오는 자에게.]

이 규칙 때문에 체스의 어머니도 손님을 받을 수 없었고 체스마저 굶어 죽게 생긴 것이었다.

밀리는 가겟세, 줄어드는 음식.

결국, 가게를 팔아넘기려고 할 때, 가게를 찾은 손님이 생긴 것이었다.

자신이 가게를 맡고 나서 처음 찾아온 손님이었기에 체스는 온 힘을 다해 손님을 맞이했다고 했다.

손님 역시 가게의 상품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고 그 이후로 몇 번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손님이 열쇠를 훔쳐 갔다. 이 말인가.”

“네에…… 끄윽…… 범인도 알고 끄윽, 있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여……끄윽…….”

체스를 진정시킨 후, 어떻게 범인을 알게 되었냐는 질문에 체스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열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어여. 어떻게 여길 알게 됐냐는 질문을 얼버무리기도 했고…… 외부인이기도 했고여.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찾아가자마자 두들겨 맞았어여…….”

눈에 띄자마자 바로 두들겨 패다니,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그 녀석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체스.

“가슴에 처음 보는 문양을 달고 있었어여. 이파리가 없는 나무의 문양. 그리고 모두 통일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저기 엘프분이 입고 계신 옷과 비슷한 느낌이었어여!”

“……로덴 아카데미네요.”

체스의 설명에 로제가 입을 열었다.

“로덴 아카데미라고?”

“네, 이파리 없이 가지가 뻗어 나가는 나무. 로덴 아카데미의 문양이에요. 복장 역시 로덴 아카데미의 제복이겠죠.”

확실히 로제의 말대로라면 그럴 듯했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녀석들은 어떻게 ‘가울의 만물상’을 알고 찾아온 거지? 가울의 만물상을 아는 인물이라면 최소 100년 전의 인물이어야 할 텐데.”

“음…… 그렇다면 사람이 소환사였던 건 아닐까요?”

“……소환사?”

로제가 설명을 시작했다.

“소환수라면 몇백 년 전의 인물이라도 이상할 게 없잖아요? 그 범인이 소환사라면, 그것도 몇백 년 전의 소환수와 계약한 소환사라면

‘가울의 만물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요.”

……로제가 이렇게 머리가 좋은 아이였나?

추리를 듣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로제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빤히 보시면……부끄러운데요…….”

“아니다, 좀 놀랐을 뿐이다. 체스. 그렇다는군. 범인은 특정됐다. 로덴 아카데미의 학생.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구하러 온 거지?”

내 질문에 체스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복수에여.”

“복수?”

“그레고리님은 본인을 악마라고 하셨잖아여? 그것도 엄청난 대악마여!”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가로 가게의 모든 물건을 원가만 받을 게여. 은인에게 이득을 챙길 수는 없으니까여!”

“호오, 그 말이 사실인가.”

[가울의 만물상] 물건을 모조리 원가로? 이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가울의 만물상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에 대한 복수, 그리고 상점의 열쇠를 되찾아주세여. 부탁드려여!”

힐끔 로제를 바라보았다. 내 소환사는 로제였기에 나 혼자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인연이잖아요? 그리고……저희 조상님도 아마 이곳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요.”

“맞다. 라스와 릴리도 이 상점을 자주 애용했었지.”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눈앞에 고개를 숙이며 내게 부탁하고 있는 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체스여. 내 소환사가 이 거래를 받아들이겠다는 군.”

“가, 감사해여! 이 은혜는 절대 안 잊을게여!”

재빨리 내 손을 양손으로 쥐어 잡은 체스가 헤헤 웃으며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너를 때렸다는 녀석. 그 녀석의 특징 같은 건 없었나?”

“특징……인가여? 음……. 싸가지 없게 생긴 남자였어여.”

그거로는 부족한데…… 라고 말하려고 할 때, 체스가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뒤로 넘긴 금발의 올백머리, 깔보는 눈빛,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였어여.”

“……알겠다. 마침 내일 우리 아카데미로 로덴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온다고 하니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마.”

“감사해여! 정말루! 정말루!”

그렇게 우리는 체스와 헤어졌다.

[가울의 만물상]을 알고 있는 로덴의 학생.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나 다름없었기에 생각이 많아졌다.

“……로제, 한 가지 부탁을 하지.”

“네? 그레고리님이요?”

“어렵겠나?”

“아니요아니요! 그레고리님의 부탁인데 얼마든지요!”

오늘 쇼핑했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던 로제가 재빠르게 내 옆에 착석했다.

“그래서, 어떤 부탁인데요?”

“별거는 아니고, 연기를 좀 해줬으면 한다.”

“연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일 로덴 아카데미 소속의 학생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학교 내부에서는 돌발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식당 뒤 흡연장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흡연(??)을 이용하자는 거군요.”

“그래, 네가 항상 말하던 학연, 지연, 흡연을 이용할 때가 온 거다.”

“꺄아~!”

마침내 본인의 힘을 보여줄 차례가 됐다며 기뻐하는 로제.

그녀는 자리에서 방방 뛰더니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접근해서,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욕을 박아라.”

“에?”

“쌍욕을, 상대가 모욕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쌍욕을 박아라. 표정은 최대한 기분 나쁘게, 적당히 침을 뱉어가며 상대에게 수치를 줘라.”

내 말을 듣고는 벙찐 표정을 짓는 로제.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튀어 나왔다.

“그래야 상대가 우리에게 대련을 신청할 게 아니냐. 우리는 그걸 이용해서 상대에게 최대한의 공포를 박아줄 셈이다.”

그리고 그 공포는, 우리에게 열쇠를 가져다줄 것이다.

“……알겠어요! 살면서 욕을 해본 적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한 번 해볼게요!”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다.”

각오를 다지고 있는 로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준다.

헤헤……. 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기분 좋은 듯 눈을 감는 로제.

이렇게 보고 있으면 가끔 이게 정말 엘프인지 강아지인지 모를 정도였다.

아니지. 내가 바퀴니까 로제는 털바퀴인가.

* * *

점심 식사 후 식당의 뒤편.

타 아카데미에서 온 학생들은 모두 2학년이었기에 수업 때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기껏 해봐야 멀리서 보는 정도였을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로제, 준비됐나.”

식당에서 로덴 아카데미 학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난히 다른 교복을 입은 무리를 찾아보면 금방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금발 올백머리를 찾는 건 더 쉬웠다.

“우리가 나올 때쯤 녀석은 거의 다 먹고 있었으니 곧 있으면 나올 거다. 슬슬 불을 붙여도 될 게다.”

“알겠어요. 그런데…… 그레고리님도 담배를 피우시게요?”

나 역시 주머니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마르바스에게 받은 시가였다.

“가끔은 피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군.”

손끝에 마력을 일으켜 끝부분들을 잘라내고 입에 물었다.

“불은 제가 붙여드릴게요!”

“고맙다.”

검지에 불길을 일으킨 로제가 내 시가에 담배를 붙여주고는 자기의 파이프에도 불을 붙였다.

뻐끔뻐금. 우리 둘이 멍하니 연기를 내뱉고 있을 때, 식당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록색과 검정색이 들어간 제복.

로덴 아카데미의 제복이었다.

“조만간 내가 너희들한테 선물 싹 돌린다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중 가장 시끄럽게 나대면서 입에 담배를 무는 녀석이 있었다.

금발에 올백머리.

저 녀석이다.

“햐~ 오늘 너무 잘 빨리네. 타 아카데미라 그런가? 여긴 미녀도 많고 공기도 좋단 말이야.”

녀석의 말에 다른 녀석들이 킥킥 거리며 반응했다.

대충 저 녀석의 위치가 짐작되었다.

나는 옆에 있는 로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로제, 시작하지.”

“……네!”

크게 파이프를 빨아들이고, 허공에 연기를 내뱉은 로제가 짝다리를 짚었다.

“아, 존나 시끄럽네! 진짜!”

찍. 하고 침을 내뱉는 로제.

입구 쪽에 모여있던 녀석들의 시선이 로제에게로 몰렸다.

“뭘 야려? 흡연장 전세 냈냐? 밥 처먹었으면 적당히 담배나 빨고 들어가지 무슨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자빠졌냐?”

……생각보다 너무 잘하는데?

날카로운 로제의 모습에 로덴 아카데미의 학생 중 가늘게 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여성이 싱긋 웃었다.

“하하……. 많이 시끄러우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죄송해요. 빨리 피고 가볼게요.”

사고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건가? 하지만 사과 한 번 듣고 포기할 우리가 아니었다.

“아니, 치료비를 받아야겠다.”

“……네? 치료비라니요?”

웃고 있던 얼굴이 흠칫 떨렸다.

“네놈들의 더러운 목소리를 듣느라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 치료비를 내놓고 가라.”

푸후. 하고 녀석들을 향해 시가 연기를 내뱉었다.

“농담도 참……. 넥타이 색을 보아하니 소환사 아카데미의 1학년 학생분들 같은데…… 이렇게 타 아카데미와 분쟁을 일으키면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 걸 알고 있나요?”

마치 여기서 더 해봐라. 우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다. 라고 협박하는 어조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우리는 도발만 할 건데.

원래 사회가 그렇다. 아무리 먼저 욕을 박아도 먼저 치는 놈이 잘못이다.

그리고, 로제에겐 상대를 빡치게 하는 재능이 있는 게 확실했다.

“1학년? 하하! 지랄하네, 엘프한테 나이 부심 부릴려고? 네가 뭐 요정이라도 돼?”

갑자기 로제가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왜 표정이 그따구야? 꼬와? 꼬우면 덤비던가. 싫으면 돈 내놓고.”

그렇게 말한 로제가 여성의 뒤에 있는 금발 올백머리를 가리킨다.

“로덴 아카데미는 남자들이 여자 뒤에 숨어 있는 게 전통이라던데 그 말이 맞나보네? 선물 준다고 낄낄거리던 놈이 무서워서 숨는 꼴을 보면.”

킥킥킥 웃기 시작하는 로제.

“히야, 여자 뒤에 숨는 거로 나를 웃기는 걸 보면 스텐딩 코미디가 아니라 슬랩스틱 전문이었나 보네. 그래, 인정한다. 인정해.”

탁. 하고 바닥에 담뱃재를 턴 로제가 날카로운 눈으로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1학년 한테 쫄리면 튀던가. 지금 튀면 안 잡는다.”

“다이레. 비켜.”

마침내 금발 올백 머리가 앞으로 나왔다. 갑자기 자기가 모욕을 받으니 참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리의 대장 역할이면서도 모욕에 가만히 있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모양이었다.

“……너, 이름은?”

“유글리아.”

성만 밝히는 로제. 상대를 적으로 보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런가. 1학년 유글리아 양. 소환사 아카데미에는 재미있는 전통이 있더군. 모든 학년이 같은 시간에 대련 과목을 한다는 전통이.”

“……그래서?”

흥미롭다는 눈으로 올백머리를 내려다보는 로제.

칫, 하고 혀를 찬 올백머리가 말했다.

“……거절하지 마라. 짓밟아주지.”

그 대답에 로제가 피식 웃었다.

“그래, 농담 잘 들었다. 그러면 빨리 꺼져.”

로제의 축객령에 로덴 아카데미 학생들이 표정이 썩은 채로 흡연장을 나섰다.

마침내 다른 로덴의 학생들이 모두 나갔을 때, 로제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레고리님! 어땠어요? 저 잘했어요?”

꼬리만 없지, 완전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마냥 보이지 않는 꼬리를 살랑이는 로제.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과했다.”

“네?”

올백머리만 노리면 됐는데…….

아무래도 로덴의 모든 학생을 건드려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뭐,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제대로 하더군.”

“헤헤……. 그쵸?”

설마 다구리를 칠까.

슥슥, 로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다음 계획을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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