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아카바퀴 31
* * *
“아무래도 다음 대련은 다른 곳에서 진행해야 할 것 같군.”
완전히 박살 난 프리즘스톤을 바라본 교관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교관에게 다가가는 마르바스, 그러자 교관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검성 마르바스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날 잘 알고 있는 인간인가 보군?”
“검의 길을 걷는 자 중에서 마르바스님의 위명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됩니다.”
“과분한 칭찬이군, 곧 있으면 동료가 될 사이인데 진정하게나.”
“……음? 모르고 있었나? 소환사 아카데미 검술교관으로 지원서를 넣었네. 조금 있다가 총장과 이야기하기로 되어있지. 여기 로제와 그레고리를 도와준 건 뭐…… 겸사겸사라네.”
“……마르바스님이 교관으로!”
항상 무뚝뚝하거나 살짝 웃기만 하던 교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저 여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실제로 다른 학생들 역시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매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르바스가 교관으로 온다는 소리보다도 교관의 표정에 놀란 것이다.
“오늘 대련장 상태가 별로 좋지도 않으니 오늘 대련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마르바스님? 제가 총장실까지 모셔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나야 고맙네만.”
그렇게, 수업 종료라는 말만 남기고는 마르바스와 함께 사라지는 교관.
교관이 저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우상이나 다름없는 존재를 만났다고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이해는 갔다.
“그래서, 열쇠는 어딨어요오?”
한편, 로제는 아직도 쭈그려있는 말포이의 앞에서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제, 제 주머니에…….”
“제가 정말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었겠어요? 빨리 내놔요.”
“네, 네에…….”
주섬주섬 주머니에 손을 넣은 말포이가 은색의 열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게 바로 [가울의 만물상] 열쇠.
싱긋 웃으면서 열쇠를 받아든 로제는 그대로 일어선다.
“자, 그럼 약속을 이행하셔야죠?”
“예?”
“대가리 바닥에 붙이고 사과하시라구요~ 자, 빨리요? 계속 그러고 있으면 제 발로 눌러드릴 수밖에 없어요.”
……저게 진짜 내가 아는 로제가 맞나?
“저한테 뭐라 하는 건 좋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그런데~ 그레고리님한테 그러면 안 되죠~”
응? 여기서 왜 내가 나와.
“자, 빨리. 저랑 그레고리님한테 사과하세요.”
“죄. 죄송합니다…….”
굴욕적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처박는 말포이.
로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음? 누구한테요?”
“로제님과…… 그레고리님께 죄송합니다…….”
“네, 좋아요. 용서해드릴게요.”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그리 말한 로제가 손을 건넨다.
“앞으로는 착하게 살자구요. 도둑질 같은 건 하지 말고요. 알겠죠?”
“……그래.”
로제가 건넨 손을 잡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말포이. 그는 비틀거리며 자기 동료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로제, 괜찮겠나?”
콧노래까지 부르며 열쇠의 끝부분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로제.
변신을 풀고 그녀를 향해 걸어가자 그녀가 내게 열쇠를 건넸다.
“네? 뭐가요?”
힐끔 우리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대련을 바라보고 있던 학생들이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악마를 두 마리나?’
‘저 엘프, 용사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았어?’
‘마왕, 마왕의 재림이야.’
‘로제놈……. 마왕 로제놈…….’
“뭐, 하루 이틀인가요? 처음부터 저랬던 사람들이에요. 별로 신경 안 써요.”
지금껏 따돌림을 당했던 로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때, 그들의 무리 틈에서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새하얀 백발에 차가운 하늘색의 눈동자. 데킬라였다.
“그레고리님, 로제님 두 분의 대련을 잘 보았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데킬라.
“그래, 도움은 되었나?”
“예, 언데드 소환수들이 대부분인 저로서는 배울 게 많은 대련이었습니다.”
신성은 그만큼 사기 특성이었다.
정수리 뿔로 찌를 뿐이었는데 내 팔 세 개가 날아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마 스킬을 이용하거나 계속해서 2:2를 했으면 무조건 졌으리라.
“기술. 그레고리님이 제게 보여주시려 했던 것은 기술이었군요.”
“그래, 그런 상성은 기술로 상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마르바스의 검술이 대표적이었다. 자신의 속성을 이용하지 않은 순수한 검술.
검술은 신성에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너에게도 검을 다루는 언데드가 있을 거다. 되도록 언데드들의 기술을 단련하는 게 좋을 거다.”
“충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게임 속에서도 그런 녀석들이 있었다.
언데드를 다룬다면서 소수정예로 네임드 언데드들을 몰고 다니던 녀석이.
언데드 주제에 SR, SSR급 녀석들을 몰고 다니며 상성을 파괴하고 다니는 끔찍한 NPC였다.
데킬라 크로프트.
과연 그녀는 그 경지를 이룰 수 있을까.
“그레고리님! 오늘 수업도 일찍 끝났는데 어쩌실래요?”
옆에서 데킬라와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던 로제가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웃으며 달려들었다.
내 왼팔을 그대로 끌어안는 로제. 덕분에 내 왼팔은 그녀의 가슴 사이에 들어가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너무 신났구나. 로제.”
“당연하죠! 누구라도 이런 전투를 겪으면 신날 수밖에 없어요!”
헤헤헤. 하고 신나게 웃는 로제.
아무리 그래도 로제 정도 되는 미녀의 스킨십은 내게 너무 자극적이었다.
“……우선 체스에게 가보지. 거기서 네가 사용할 물건도 봐야 하니 말이다.”
“네! 드디어 그레고리님이 말씀하셨던 그 상점을 볼 수 있겠네요.”
“그렇겠군.”
수백 년이 지난 가울의 만물상에는 어떤 아이템들이 있을까.
게이머로서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옆에 달라붙은 로제 때문에 두근거리는 건가.
“……그만 떨어져라. 로제.”
“네? 너무 그런가요?”
“……부담스럽다.”
“헤헤, 알겠어요!”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말 잘 듣는 모습을 보니 마치 커다란 리트리버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럼 마르바스님은 내일부터 검술 시간에 볼 수 있는 걸까요?”
“아마 그러겠지. 다른 녀석들도 오늘 네 모습을 보며 검술의 중요성을 느꼈을 거다. 마르바스 녀석…… 오자마자 바쁜 일상을 보내겠군.”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소환수들이 소환사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즉, 소환사는 본인을 지킬 기술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중에는 소환사이면서 소드 마스터인 소환사가 나올 수도 있겠군.”
문뜩, 포켓몬과 함께 상대를 공격하는 지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확실히, 그건 공포였다.
* * *
“장사 안해───흐에에엑?! 그레고리님 그리고…… 양아치 엘프님!”
“……저는 로제인데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무기력해져서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체스가 벌떡 일어섰다.
“혹시…… 지금 오신 거라면…….”
은근히 기대하는 말투와 표정. 나는 싱긋 웃으며 주머니의 열쇠를 꺼냈다.
“그래, 네 부탁은 이뤘다.”
“꺄아아아악! 고마워여! 정말로 감사해여!”
도도도도도. 하고 작은 체구의 체스가 내게 달려들어 몸을 껴안았다.
“우와아아아아! 너무 좋아여! 이게 복수에 성공했다는 쾌감인가여?! 복수는 공허하다고 말한 멍청이는 대체 누구인가여! 이렇게 속 시원하고 좋은 데에!!!”
그리고는 발을 동동 구르는 그 모습은 마치 신이 난 라쿤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만 떨어져라. 덥군.”
“아앗! 죄송해여!”
정신을 차린 체스가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떨어졌다.
“그럼 가실까여?! 좋은 상품이 아주 많답니다!”
열쇠를 건네받은 체스가 방방 뛰며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신났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그녀.
가게 끝 벽에 우뚝 선 그녀는 열쇠를 그대로 벽에 박아넣고는 반 바퀴 돌렸다.
쿠쿵. 하고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오…… 그레고리님. 비밀 문이에요!”
“그렇군. 비밀문이군.”
이런 식으로 진입하는 건가. 남자로서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밀문과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장치라니.
이윽고 벽이었던 곳이 양쪽으로 열리며 엘리베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안으로 모실게여!”
쿠쿵. 하는 한 번의 흔들림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땅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층수를 알려주는 계기판은 없었기에 그저 감으로 깊이 내려간다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그렇게 약 20초 정도가 흘렀을까?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어서오세여! [가울의 만물상]에!”
띠링!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쪽으로 서서히 열린다.
지하임에도 환한 내부 모습.
내부는 여느 가게들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이지만 물건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와아……! 그레고리님! 대박이에요!”
새하얀 빛을 내뿜고 있는 검, 나무뿌리로 뒤덮여 있는 갑옷과 잔뜩 쌓여있는 프리즘 쥬얼들.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여기 있는 쥬얼들만 팔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었을 텐데, 어째서 내버려 둔 거지?”
“스톤이 아닌 쥬얼이니까여……. 괜히 저 같은 사람이 쥬얼을 밖에 팔았다간 뒤를 밟혀서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여…….”
그래도 기본적인 생각은 하고 있었던 건가.
“자자, 둘러보세여! 은인인 여러분께는 특별히 할인가로 모실게여!”
“그레고리님! 둘러봐도 될까요?!”
“그래, 필요한 게 있는지 둘러봐라.”
“네!”
신난 로제가 가게의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여러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체스. 책자도 있겠지?”
“네! 여기여!”
체스가 준비되어있던 책자를 내게 건네주었다.
종류별로 나누어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내가 여기서 찾아볼 것은 총 3가지였다.
내가 쓸 장비와 아이템. 그리고 로제가 쓸 아이템이었다.
[가울의 만물상]은 랜덤성이 짙은 상점이었기에 자주 와서 확인해주는 것이 좋았다.
“음…… 지금 구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인가.”
“우선 이거를 좀 보고 싶군.”
나는 그렇게 말하며 책자에 그려진 가면을 가리켰다.
“아! 심연의 가면인가여? 네, 금방 가져다드릴게여!”
가게 안으로 들어간 체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면 하나를 들고 왔다.
“네! 심연의 가면이에여! 효과는 거기에 적혀있다시피 착용 시 외형을 바꿀 수 있고 상대가 공포를 느낄 확률을 상승시켜줘여!”
가면의 외형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그저 새까만 배경에 눈, 코, 입이 뚫려있는 정도랄까.
가볍게 가면을 받아들고 얼굴에 써보니 어떻게 사용하는지 감이 잡혔다.
“이렇게 사용하는 건가?”
가면의 착용과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마치 게임의 커스텀마이징 시스템을 옮겨놓은 듯한 UI였다.
비만도를 올리고 키를 줄이자 동글동글한 외형이 되었다.
“처음이신데 꽤 능숙하시네여?”
시시각각 변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체스가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커스텀마이징 장인인 내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지.
“다른 기능도 확인해 봐야겠군.”
변신.
“흐이이이이이익?!!!!!!!!”
아.
체스가 기절했다.
……성능 확실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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