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아카바퀴 48
* * *
형태를 조금씩 눌러 인간폼으로 바꾸기 시작한 지 30분째, 나는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바퀴의 모습을 인간처럼 꾸미는 과정에서 마력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 몸으로는 안되는 건가.”
바퀴의 장점과 인간폼의 장점을 합치면 기가 막히게 강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은 역시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게 몇십 분의 사투를 벌인 끝에, 나는 몇 가지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우선은 손가락.
지금까지 3개 밖에 없던 손가락을 5개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제대로 검을 잡거나 주먹을 쥐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는 발의 개량이었다. 맨 아래 다리 역시 곤충답게 관절의 제약이 꽤 있었는데 개량을 거친 끝에 그 제약으로부터 좀 더 자연스러워질 수 있었다.
“이제 브라질리언킥도 무난하겠군.”
마지막으로, 다리들에 달린 가시들을 좀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제는 굳이 펀치가 아니더라도 가시를 스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적에게 자상을 입힐 수 있었다.
마침내 내 몸이 완전한 검이 된 느낌이었다.
“이것이 신검합일……. 최후의 월아천충인가.”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커스텀이이었다.
커스텀은 이대로 고정시켜 놓았으니 가면이 없어도 언제나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지치는군.”
가면의 단점이었다.
몸의 극적인 변화가 여러 번 일어나니 체력이 쭉 빠진 것이다.
나는 그대로 기숙사에 있는 내 방의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역시, 귀족들이 사용하는 기숙사인 만큼 매트리스의 촉감이 푸근하다.
그대로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우, 우와아아아악?! 침대 위에 벌레…… 그, 그레고리님?”
내 잠을 깨운 것은 벌레폼의 나를 바라보고 놀란 로제였다.
“아, 변신을 안 하고 잤군. 많이 놀랐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켜 변신했다.
“아, 아니요! 그레고리님이 주신 피어싱 덕분에 익숙해졌으니까요. 그레고리님이 여기서 주무실 거라고 생각 못 해서 놀란 것 뿐이에요.”
“그래? 내가 여기서 자는 건 어떻게 알고.”
“그레고리님을 계속 불렀거든요. 반응이 없으시기에 심상 공간에는 없나 싶었죠.”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로제.
“아! 그리고 방금 프리실라 쪽의 사용인분이 오셨는데, 조금 있다가 같이 등교하자고 했는데. 같이 가실 거죠?”
마침 변신도 해서 따로 준비할 건 없었다.
“그러지.”
“네, 그러면 쉬고 계세요!”
문을 닫고 나가는 로제. 아직 침대에 앉아있던 나는 몸을 움직이다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게 뭐지?”
몸 안이 근질근질했다. 마치 피가 아닌 다른 것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
바퀴폼으로 커스텀마이징을 하던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대충, 예상이 갔다.
“마력인가.”
3성으로 오르며 아무래도 마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전사들이나 무투가들이 몸이나 무기에 마력을 두르고 싸우고는 했다.
즉, 인간폼으로도 싸울 무기가 더 생긴 것이었다.
우선 눈을 감고 집중하여 마력을 움직여보려 했다. 하지만,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마력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역시 쉽게 다룰 수 있는 힘은 아니라는 건가.”
아무래도 마력은 로제의 도움을 받아 훈련하는 게 좋아 보였다.
로제는 훌륭한 마법사이기도 했으니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그레고리님! 프리실라가 찾아왔어요.”
로제와 함께 방을 나서자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프리실라가 보였다.
“……뭐지.”
“그레고리님께서 파이몬님을 소개해주신 덕분에 어제 큰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무려 황녀가 머리를 숙이며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 온 것이었다.
“되었다. 네 소환수인 라파엘에게도 큰 도움을 받았으니.”
내 이야기를 듣고는 서서히 고개를 드는 프리실라.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그레고리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래도 1학년에 3서클의 경지는 최상위권이라는 소리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왕녀가 1학년의 수석이라고 했나.
문뜩, 총장이 왕녀를 위해 준비했던 영약을 우리가 꿀꺽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깐만, 우리 때문에 3성에 못 오르고 있던 거 아니야?
“그레고리님?”
갑자기 굳은 내 모습에 프리실라가 고개를 갸웃해 한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가지.”
나중에 프리실라에게 영약이라도 하나 더 구해줘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는 아카데미를 향해 걸어갔다.
* * *
로제의 반인 1학년 B반에 도착한 우리는 평소보다 아카데미가 시끌벅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일까요?”
그렇게 중얼거린 로제는 자리에 앉아 다른 학생과 이야기를 하던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엘레나양!”
“무슨 일이야? ……로제.”
내가 없는 동안 둘의 사이에 꽤 진전이 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분위기가 이런 거예요?”
“너, 설마 못 들었어? 어제 악마와 계약한 제국 아카데미의 학생이 테러를 일으켰다는 모양이야.”
“……테러요? 거기에 계약이라니. 테러범이 소환사였던 건가요?”
잠깐만.
“아니, 그런 계약이 아닌 힘을 주는 대가로 인간계에 피해를 입힐 생각이었나 봐. 다행히 라파엘님이 막으셨다고는 하지만.”
“라파엘님……이요?”
로제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진다.
“맞아. 소문으로는 현재 라파엘님이 총장실에 찾아가 사건의 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데, 아무래도 인간계에 진출하려는 게 목적이었던 모양이야.”
아침에 라파엘이 보이지 않았던 건 총장실에 끌려가서였나.
“……그건 큰일이네요. 악마들의 인간계 진출이라니. 계약을 통하지 않은 인간계의 진출인 거겠죠?”
“그렇지. 덕분에 현재 아카데미에 악마와 계약한 소환사들을 따로 부르고 있는 모양이야.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려는 거지.”
“아……. 그렇군요!”
“……그런데, 네 소환사도 악마 아니야?”
“맞는데요?”
그 대답과 동시에 교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1학년 B반의 로제 폰 유글리아와 그레고리 존스. 체육관으로 오라는 부총장님의 전언이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선도부장인 아멜을 버리고 도망갔던 녀석 중 한 명이었다.
아직 안 잘렸나 보군.
“마침 부르네. 한 번 가봐.”
“그럼 1교시 수학 안 들어도 되는 거죠? 아싸아~”
“아니, 좋아해야할 때가 아닌데…….”
부총장에게 끌려간다는 말을 듣고도 수학을 뺀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워하는 로제.
그 모습에 엘레나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레고리님! 빨리 체육관으로 가봐요!”
악마들을 모아놓고 사건의 진상에 대해 조사하려는 걸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로제와 함께 체육관 쪽으로 향했다.
아카데미의 체육관은 대련장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대련장은 정말 결투만을 위한 공간이라면 체육관은 정말 운동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분위기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위의 북적이는 악마와 소환수들만 뺀다면 말이다.
“와……. 그레고리님! 악마들이 엄청 많아요!”
주변에는 이름도 없이 ‘하급 악마’ 라던가 ‘중금 악마’, ‘고위 악마’ 정도로 분류되는 악마들이 널려있었다.
이 모든 악마가 아카데미 학생들의 악마인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수가 꽤 되는군.”
“네, 어림잡아도 50명은 되겠는데요?”
이 안에서도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지 각자 본인 계열의 악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고위 악마쯤 되면 하급 악마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그렇지, 판타지 하면 역시 계급이지.
드디어 뭔가 판타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34위의 악마이자 마계의 백작! 푸르푸르님 입장하십니다!”
우리가 들어 온 입구 쪽에서 한 중급 악마가 소리쳤다.
그러자 일제히 몸을 돌리며 입구를 바라본다.
하급 악마들은 고개를 숙이고, 중급 악마들은 뻣뻣이 서 그곳을 바라보며 고위 악마들은 편한 자세로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
“악마들의 모임이라니, 이것 참 재미있네요!”
화려한 부채로 입을 가린 파르페와 푸르푸르가 들어선다.
호오, 34위의 악마쯤 되면 저런 취급을 받는 건가.
“자! 경배하세요. 악마들! 저 파르페 사가리와 푸르푸르의 등장입니다!”
집사복을 입은 체 묵묵히 걸어오는 푸르푸르와 그 옆에서 도도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서는 파르페
저 싸가지는 여전히 싸가지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중급 악마가 다시 소리친다.
“5위의 악마이자 마계 회의의 의장, 악마들의 왕! 마르바스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저 녀석은 뭔데 아까부터 저렇게 외치고 있는 걸까.
복장을 보아하니 대충 아카데미에 취직한 악마인 모양이었다.
대충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살피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5위는 5위라는 건가.”
하위 악마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으며 중위 악마는 고개만 숙인다. 그리고 고위 악마들은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생이 많다. 몽드몽.”
체육관 안으로 들어선 마르바스가 소리를 외치던 악마의 어깨를 한 번 만져주고는 내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외치는 악마.
중위 악마도 이름이란 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레고리, 이것도 자네 작품이겠지?”
어느덧 내 앞까지 다가온 마르바스가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작금의 상황에 대해 무언가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주도록 하지. 지금은 그냥 모른다고 잡아뗄 생각이다.”
“음, 확실히 그래야겠지.”
고개를 끄덕인 마르바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움찔. 하고 모든 악마가 시선을 돌린다.
“다른 녀석들이야 아는 건 없을 테고. 큰 문제는 없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마르바스가 체육관에 비치되어있던 교단 앞에 섰다.
“반갑다. 아주 잠시. 그대들의 관리를 맡게 된 마르바스라고 한다. 그대들을 통제하는 데에 내가 어울릴 것 같다며 짬을 맞은 상황이지.”
마르바스에게 짬을 때리다니, 교직원들도 정상은 아니군.
“사실상 부총장과 함께 보조로 나온 것이니 큰 신경은 쓰지 말도록, 각자 소란을 떨지 말고 지금처럼만 있으면 된다. 이상.”
아무래도 악마들이 서열에 민감하다는 말을 듣고 마르바스를 보낸 모양이었다.
“와, 보셨어요. 그레고리님? 마르바스님 한 마디에 다들 조용해 졌어요.”
신기하다는 듯 저 앞에 선 마르바스를 바라보는 로제.
아직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르바스는 네 소환수이니 이 체육관에서는 네 서열이 제일 높다고 볼 수 있겠군.”
“네? 진짜요?”
“그래, 그래서 다른 녀석들이 네게 말을 못 걸고 있는 거다.”
로제가 마르바스와 함께 로덴의 학생을 이겼다는 사실은 이미 아카데미에 널리 퍼진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를 건든다는 것은 마르바스에게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나에 대한 소문은 그저 괴상하게 생겼으면서 강한 벌레 악마 정도였다.
“그럼 제가 여기서 전부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릴까요?”
갑자기 로제가 무서운 이야기를 꺼냈다.
“……시키면 하겠지만, 다른 소환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뿐더러 고위 악마들은 반발할 거다.”
“그렇겠죠? 헤헤.”
그렇게 잡담을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악마가 소리쳤다.
“아카데미의 부총장! 오르가 레빈포트님이 입장하십니다!”
“드디어 온 건가.”
나는 시선을 입구로 향한다.
마침내.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마침내 부총장을 볼 기회가 생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