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아카바퀴 54
* * *
악한 것을 정화시키고 소멸시키는 「징벌」과 모든 것을 불태우고 먹어치우는 「탐욕」이 부딪힌다.
“이건 또 뭐야!”
나무엘의 검과 로제의 검. 두 검이 서로의 불꽃을 뽐내듯 흩뿌린다.
마치 흰 도화지에 떨어진 검은 먹물처럼, 조금씩 나무엘의 검을 「탐욕」 이 삼키고 잠식한다.
“라구엘! 이게 대체 뭐야!”
“……메타트론님에게 들은 적이 있어. 빛을 잠식하는 어둠을 사용하는 악마가 있다고. ……설마?!”
이야기에 메타트론이 나오고 빛을 잠식하는 어둠이란 말까지 나온 걸 보면 뻔하다.
내가 모르는 과거 그레고리의 이야기겠지.
“……암흑을 두른듯한 몸과 심연을 연상시키는 외형. 떠올랐어, 서열에서 벗어난 자. 그레고리 존스.”
서열에서 벗어난 자라니. 내게 그런 이명도 있었던 건가.
[숨겨진 칭호 (칭호 : 서열에서 벗어난 자)가 드러납니다.]
[칭호 : 서열에서 벗어난 자]
[효과 : 당신은 악마들의 서열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과거의 호칭을 불렸다고 이런 식으로 칭호를 얻게 될 줄이야.
대악마들을 만날 때마다 다른 악마들에 비해 너무 멀쩡하다 싶었는데 이런 게 숨어 있던 모양이었다.
본래 원래 세상에서의 악마들은 서열을 나누는 위(?)는 순위를 뜻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그런 자리에 있다 표시하는 것뿐. 실질적인 힘과 능력은 사실상 동등한 것이다.
허나, [소환사 아카데미아]의 제작진은 실수인지 노린 것인지 그 위(?)를 순위로써 표현했고 그 결과 악마들의 서열이 나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칭호를 불린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면 다른 숨겨진 칭호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뜩 들어 연기를 해보기로 했다.
“서열에서 벗어난 자.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역시, 네가 그 악마였어.”
지금까지 졸리다는 표정을 지은 게 거짓말이라는 듯 새침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라구엘.
아무래도 과거에 내가 천계에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 모양이다.
“내가 천계에서 크게 저지른 짓은 없을 텐데?”
“……웃기지 마. 네 녀석 때문에 천계가 반파됐다는 걸 잊은 거야?!”
……내가 천계를 반파시켰다고요?
“……아. 그때 말인가.”
“그래! 하필 네 녀석이 천계에서 바알과 전투를 치르는 바람에 천계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어!”
천계에서 바알과 싸웠다니.
아, 대충 이야기가 짐작되었다. 뭐, 바알은 천계를 침공하려 했고 내가 그걸 막았다는 이야기겠지.
“그렇게 말하다니 서운하군. 오히려 내 덕분에 반파로 끝난 게 아닌가.”
“……닥쳐.”
오, 욕부터 나오는 걸 보니 내가 한 말이 맞은 모양이었다.
“난 아직도 떠올라. 네 녀석들의 전투에 휘말려 죽은 천사들의 비명이……! 다, 다, 네 녀석 때문이야!”
아, 뻔하고 뻔하다. 분노로 각성한다는 뻔한 이야기.
하지만.
“그럴 거면 내가 「탐욕」을 배우기 전에 각성했어야지.”
이미 나무엘의 검에 들러붙은 화염은 검 전체를 뒤집었고 나무엘은 검을 땅에 던진 상황.
사실상 지금 내 「탐욕」에 대항할 수 있는 건 라구엘밖에 없다.
즉, 나무엘은 손가락이나 빨며 우리를 구경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로제. 내가 오른쪽을 맡지.”
“네!”
우리는 동시에 라구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라구엘! 내가 왼쪽을 볼게!”
검 없이 맨손으로 로제를 노려보는 나무엘. 아무래도 건틀릿을 끼고 있으니 무투로 로제를 막으려는 생각인 듯싶었다.
확실히, 제국 아카데미의 교환학생으로 올 수준이라면 모두 역시 상당하겠지.
그런데 어쩌나.
우리 로제도 한 검술 하는데.
“잡았다!”
건틀릿으로 솜씨 좋게 로제의 검을 잡아챈 나무엘이 활짝 웃는다. 그러자 왼손을 꽉 쥐는 로제.
“그레고리류! 로제 펀치!”
그리고 로제의 펀치가 나무엘의 얼굴에 작렬한다.
“무, 뭣?!”
로제는 내 소환사인데. 그레고리류를 안 알려줬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릴 때부터 영약을 담배 피우듯 피어온 우리 로제에겐 그레고리류에 대한 재능이 상당하다.
“나무엘!”
역시 천사라는 걸까. 내가 달려오고 있음에도 나무엘을 걱정하고 있다.
“날 앞에 두고도 한눈을 팔다니, 어이가 없군.”
그대로 녀석의 명치를 향해 발을 날린다.
“커헉!”
화륵. 하고 옮겨붙는 「탐욕」 라구엘이 재빠르게 「징벌」을 사용해 「탐욕」을 몸에서 때어낸다.
“저리 꺼져!”
백열전구처럼 온몸에서 「징벌」을 쏘아내는 녀석. 재빨리 그레고리류로 나무엘을 패고 있는 로제를 집어 들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앗! 그레고리님! 저는 저거 맞아도 상관없는데.”
“그래도 저 정도 양이면 따가운 수준이 아니었을 거다.”
엄청 따가웠겠지.
그래도 정신은 박혀있는지 나무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성으로 둘러싸고 있다.
“…나무엘. 금방 치료해줄게.”
또 치료인가. 교육이 제대로 안 돼 있군.
“로제, 이번엔 들어가지 말고 모든 버프를 부탁하마.”
“네!”
오랜만에 ‘그것’을 써야겠군.
로제를 땅에 내려놓자 그녀는 파우치에서 「세계수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나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른다.
동시에 시야가 넓어지자 주변에서 우리의 대련을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의 표정이 보였다.
여전히 나를 역겨운 듯이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과 제국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응원하고 있는 녀석들.
나와 같은 아카데미임에도 천사와 악마의 대결은 대부분 이렇다.
아니면 외형에 따라 악당과 영웅이 갈린 것이겠지.
그렇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영웅다운 기술로 녀석들을 끝내기로 생각했다.
순차적으로 몸에 로제의 마법이 깃든다.
「헤이스트」, 「스트렝스」, 「아이언아머」, 「인챈트 : 번개」
지금 나는 하나의 탄환이다.
“바퀴벌레───”
지금 이 정도의 버프와 질량, 관통력과 속도라면 치명상을 입힐 자신이 있다.
“───킥”
누가 그랬던가. 치도리의 소리는 마치 천 마리의 새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파지직.
내 몸을 감싸는 번개를 삼킨 「 탐욕」이 더욱 격렬하게 날뛴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흑뢰(?雪)와 같다.
─────검은 천둥이 빛을 가른다.
“악마에게는 절대 지지 않을 거야─────!”
신성력과 「징벌」을 섞어 내 킥을 밀어내려는 라구엘.
그러나, 그 발언이 네 녀석의 패인이다.
[스킬 : 바퀴벌레 킥]에 숨어 있는 효과.
[본인이 악당이라 인식한 상대에게 추가적으로 데미지가 들어갑니다.]
“악마를 차별하는 네 녀석은 레이시스트다.”
그리고, 레이시스트는 악당이다.
“마, 말도 안 돼!"
내 [스킬 : 바퀴벌레 킥]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한 라구엘이 이미 정신을 반쯤 놓은 나무엘을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폭발.
빛과 어둠이 한데 섞이고 응축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파직, ──파지직.
폭발의 여파로 휘몰아친 모래 먼지가 사라졌을 때, 나는 두 녀석의 사이에 내가 온전히 서 있음을 깨달았다.
"……운이 좋았군."
마지막에 나무엘만은 지키려고 하는 마음 때문인지 [스킬 : 바퀴벌레 킥]의 위력이 크게 줄었다.
덕분에 라구엘의 역소환은 실패한 상황. 허나 그 과정에서 나무엘은 정신을 잃었기에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승자! 로제 폰 유글리아와 그의 소환수 그레고리 존스!"
마르바스의 외침이 대련장에 울려 퍼진다.
* * *
"……그레고리님. 이것 좀 꺼주실래요?"
승부가 끝나고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로제가 자신의 검인 불굴을 들고 와 내게 보였다.
"아, 그렇군."
나는 불굴의 검신을 두르고 있던 「탐욕」을 꺼주었다.
오직 불굴이기에 두를 수 있는 탐욕. 아마 평범한 검이었다면 인챈트를 하자마자 순식간에 녹아버렸을 것이다.
「탐욕」은 그러한 마법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갑피가 「탐욕」에 면역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거, 엄청난 불꽃이네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검은 불꽃이라니……. 엄청 멋져요!"
로제 역시 「탐욕」의 진가를 알아본 것인지 반짝이는 눈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래도 위험한 마법이다. 내 제어가 없으면 걷잡을 수 없게 되니 말이다."
"……확실히, 나무엘씨도 살짝 데인 것 같았는데 엄청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었죠. 역시 그레고리님이세요!"
나무엘이 고통스러운 건 상관없는 모양이구나…….
대련장 건너편을 바라보니 나무엘을 치료하고 있는 라구엘의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대천사 정도 되면 보건실로 보내는 것보다 본인이 치료하는 게 효과가 더 좋을 것이었다.
"……피곤하군. 마르바스. 대련도 끝났는데 돌아가 봐도 되겠나."
대련을 치르면 조기 하교가 가능한 아카데미. 이 정도로 격렬한 대련을 치렀으니 오히려 당연한 권리라 느껴졌다.
"그러게나. 그나저나 자네가 다시 그 기술을 사용할 줄이야. 꽤 놀랍군."
과거의 마르바스도 「탐욕」을 본 적이 있는 것인지 꽤나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마르바스와 싸우면 이기는 게 가능할까?
현재 마르바스의 능력은 4성 수준. 운이 좋다면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았다.
별의 개수를 떠나서 그의 검술은 진짜였으니까.
"원래 내 기술이니 말이다. 로제, 그럼 이만 돌아──"
"────파렴치 벌레!"
익숙한 목소리가 거슬리는 별명으로 나를 불러왔다.
안 그래도 거친 대련으로 인해 예민한 상태인데 파렴치 벌레라는 소리까지 들으니 화가 올라왔다.
"…뭐냐."
"──히끅!"
고개를 돌리니 뒤로 발라당 넘어지는 선도부장, 아멜이 벌벌 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 미안하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렇게 말하는 아멜.
지금 내 표정이 어떻기에 저런 반응인 거지?
바퀴 상태로 화난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 그레고리님? 무, 무서워요……."
내 옆에 서 있던 로제마저 한 손은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머리 위를 가리키며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선을 위로 돌리니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붕붕─붕붕─붕붕─붕붕
기다란 더듬이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미안하군."
재빨리 머리 위의 더듬이를 통제하고는 인간의 폼으로 변신했다.
그러자 조금은 괜찮다는 표정을 짓는 로제와 아멜.
"그래서, 난 왜 부른 거냐."
아직도 꼴사납게 땅에 넘어져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그리 묻는다.
그러자 재빨리 일어서 엉덩이를 털어내는 아멜.
그녀는 힐끔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총장님의 호출이다. 너와 소환사 로제 폰 유글리아를 부총장실로 데려오라고 하셨다."
"부총장이?"
그 양반이 왜 또 우리를 부른단 말인가.
"마르바스. 아는 게 있나."
"음? 본인은 없네만."
녀석도 모르는 건가.
안 그래도 피곤한 상황인데 굳이 가야 하나 싶었지만, 상대가 부총장이라는 걸 생각하면 안 갈 수가 없었다.
"하아, 가도록 하지. 로제. 너는 괜찮나."
"네? 네, 저는 그레고리님만 괜찮다면 상관없어요."
일단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고 정말 별것도 아닌 이유라면 대차게 따지자.
그런 생각을 하며 부총장에게 갔을 때였다.
"제국 아카데미에 가줘야겠다."
"뭐?"
"넹?"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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