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아카대공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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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이후의 이야기에요. 언니는 아카데미에 가기 전, 자신만의 세력을 완전히 구축하신 후 아카데미로 떠나셨죠.”
프리실라가 비행정에서 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언니는 예상하지 못하셨던 거예요. 누구보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할 거라고요.”
“……배신?”
고개를 끄덕인 에자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너 앤 하인베른. 누구보다도 언니를 가장 좋아했던 작은 오빠가 언니를 배신했어요.”
“작은 오빠?”
“프리실라의 남동생이야. 배다른 동생이지만.”
내 의문 섞인 말에 산달폰이 대답해주었다.
배다른 동생이라니, 역시 황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보통 황실의 분위기 아닌가? 계승권을 두고 싸움을 벌이는 황족들. 그렇다면 프리실라도 언젠가 자신의 남동생이 배신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아니에요! 카너 오빠는 정말로 언니를 좋아했어요! 자신은 황제가 되는 게 싫다고, 그저 자신의 소환수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게 소원이라고 하고 다녔던 카너 오빠인걸요!”
“……그런데 갑자기 변했다는 건가?”
“맞아요. ‘그 남자가’ 찾아오고 나서부터, 카너 오빠가 변하기 시작했어요.”
프리실라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방에서 영토를 관리하던 백작 한 명이 황실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알로스 휴스고.
아버지의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난한 영토를 본인의 뛰어난 수완가 능력을 발휘하여 황실의 눈에 띈 귀족이었다고 한다.
“아빠는 그 남자의 능력을 높게 샀어요.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낸 사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황제는 이런 그의 능력을 높게 사 왕실의 서기장이라는 직위를 내렸다고 한다.
서기장의 직책을 받은 그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이는 황제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카넌 오빠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죠.”
카넌은 에자젤과 항상 잘 놀아주는 착한 오빠였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카넌과 놀기 위해 그가 있는 방으로 향하던 도중, 카넌의 방에서 나오는 알로스 휴스고를 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연회, 축제, 각종 행사 때마다 그는 카넌 오빠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서서히, 카넌이 에자젤과 놀아주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었다.
항상 황궁의 사용인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던 카넌은 점점 웃음을 잃어 갔고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새엔가 카넌 오빠의 곁에 항상 머무는 귀족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알로스 휴스고를 필두로 새로운 세력이 생겨난 것이었다.
2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그러니까……. 즉, 네 말은 알로스 휴스고라는 귀족이 네 오빠를 꼬드겨 새로운 파벌을 만들었고 네 언니의 세력을 와해시켰다. 이 말인가?”
“정확해요!”
“좋아, 여기까진 알겠다. 그런데, 라파엘을 구해달라는 건 무슨 소리지? 산달폰.”
분명히 에자젤은 프리실라를 구해달라고, 산달폰은 라파엘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게 이 일과 연관이 있단 말인가?
“……이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되어선 안 돼. 라파엘님은 물론이고 프리실라에게도 말이야.”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로제 역시 자신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다.
“좋아. 그럼 말할게.”
에자젤의 소환수인 산달폰은 에자젤의 이야기를 듣고 독자적으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 역시 에자젤과 오랜 시간을 보내며 카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조사를 최근까지 이어가던 그녀는 믿기 힘든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소환사도 아닌 카넌에게서, 신성력이 느껴졌어.”
그 말의 뜻은 즉, 천사를 다루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것.
황실에서 천사들과 계약한 것은 일부의 왕족들뿐으로, 에자젤과 프리실라와 함께한 적이 없는 카넌에게 신성력이 느껴지는 것은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다른 왕족이 그와 접촉했을 수도 있지 않나.”
“아니,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를까? 그건 처음 느끼는 신성력이었어. 라파엘님도, 다른 왕족들과 계약한 천사도 아니었지. 너무나도……이질적인 신성력이었어. 신성력은 맞지만…… 이질적인…… 타락 천사들에게만 느낄 수 있는 신성력.”
“……즉, 알로스 휴스고가 타락 천사와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말인가?”
“정확해.”
이 세계에서 타락 천사는 다른 의미를 가졌다.
악마와 동화된 천사? 그 정도로는 ‘타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정말로,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정도의 죄악을 저질러야만 ‘타락’이란 칭호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이 세상에서 ‘타락’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천사는 총 3명.
그리고 이들 중 대장격이라 여겨지는 루시퍼의 죄는 재앙을 도와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기에 ‘타락’이라는 칭호가 붙은 경우였다.
즉, 이 정도 스케일이 되지 않고서는 천사는 ‘타락’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천사가 총 3명.
“루시퍼, 아자젤, 사마엘. 셋 중 한 명이 엮여있다는 거군.”
“……맞아. 그래서 라파엘님에게는 비밀이라고 한 거야.”
“라파엘에게 있어 타락한 천사들은 구해야 할 동료 같은 존재니까.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겠지.”
타락하고 길을 잃은 신성교단마저도 구해달라 내게 부탁하던 게 라파엘이었다.
또한, 다른 천사들보다도 자신의 동료를 아끼는 녀석인데, 타락 천사가 연관되어 있다고 하면 절대로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카넌이 황위를 노리고 있다면 프리실라와 라파엘님과 겨룰 수밖에 없어. 그리고 타락 천사와 라파엘님이 맞붙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겠지.”
즉, 라파엘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걸려들었다는 소리였다.
“……어이가 없군. 타락 천사 같은 거물들이 황위 전쟁에 뛰어들다니 말이야.”
타락 천사가 연관되어 있다면 이번 사태는 좀 더 심각한 일이 되고 만다.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정말로 위험해진다는 뜻이니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고뇌하고 있을 때, 로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황제께 말씀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황실 측에서 지원이 들어올 텐데요.”
“그렇게 되면 일이 터 커질 거다. 타락 천사와 무력충돌? 분명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겠지. 지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고 잃는 게 많은 방법. 하책이다.”
“그렇군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말싸움할 수는 없잖아요.”
“……잠깐.”
……말싸움이라고?
“합격이다. 로제.”
“네?”
“……말싸움이라, 좋은 방법이군.”
내 말에 주변에 있는 소녀들이 모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 이해하지 못하겠지. 타락 천사를 등에 업은 녀석들과 말싸움을 하겠다 하니 말이야.
“에자젤. 내가 부탁한 장소들에 편지를 좀 보내줘야겠다.”
“네?”
“그리고 산달폰. 너는 오늘을 기점으로 카넌 일행의 미행을 멈추도록. 아마 녀석들은 네 존재를 눈치챘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황실의 앞마당에서 황녀의 소환수가 역소환 당했다? 그것만으로도 황실의 분위기가 변할 테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네게 의도적으로 필요한 정보만 흘린 것일 수도 있겠지.”
내 말에 에자젤이 테이블을 박차며 일어선다.
“그렇다면 저희의 움직임이 이미 읽히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맞다. 너와 산달폰이 그들의 정체를 안다 하더라도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한 거겠지.”
자신들이 무시당했다는 말에 표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에자젤. 역시,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에자젤의 머리에, 얇고 새하얀 로제의 손이 얹어진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네?”
갑작스러운 쓰다듬에 당황하는 에자젤. 이에 로제는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희는 프리실라와 라파엘님의 친구니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도와줄 거예요.”
“……친구?”
“네, 친구예요. 그리고, 친구는 위험에 빠진 친구를 절대 내버려 두지 않아요. 그렇죠? 그레고리님?”
“그래, 프리실라는 여기서 꺾여서는 안 되니 말이다.”
프리실라는 우리와 함께 재앙에 대적할 가장 거대한 칼이었다.
그런 그녀를 견제하는 세력? 내가 가만둘 리가 있겠는가.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프리실라를 황제에 올릴 예정이었다.
“이렇게 용기 있게 우리를 찾아준 점. 진심으로 감사한다. 에자젤, 천사 산달폰.”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문 앞으로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자리를 떠나려는 내 모습에 당황했는지 에자젤의 머리 위에 올린 손을 회수하고는 후다닥 내 뒤에 붙는 로제.
나는 아직도 멍하니 소파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앞으로의 일은 내가 처리하지. 푹 쉬도록.”
왕좌를 찬탈하려는 황자와 타락 천사라니,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빅 이벤트.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무척이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조금 바쁠 거다. 로제.”
“헤헤, 저는 언제든지 준비됐어요!”
나는, 어려운 싸움을 무엇보다도 즐기는 고인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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