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아카대공 108
* * *
제국 측의 일 처리는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결계가 풀림과 동시에 제국 측의 병력이 몰려 들어와 무력화된 신도들을 모두 인계받았으며 부상 입은 우리를 즉각 황실의 의료원으로 후송해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프리실라는 사과를 잘 깎네요. 흐으응~ 너무 달아요~”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많이 배웠으니까요. 자, 아 해요 아~”
“아앙~ 우우움~ 넘후져아여~”
단체로 병실 신세를 지게 되어버렸다.
“파이몬, 마르바스. 너희는 많이 다치지도 않았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야 했나?”
건너편에서 침대에 드러누운 채 독서를 즐기고 있는 마르바스와 ‘이쪽도! 이쪽도 사과가 필요하다! 황녀!’라며 열심히 입을 벌리고 있는 파이몬을 바라보며 묻자 녀석들이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본다.
“무슨 소리인가. 여유롭게 이긴 것처럼 보여도 계약도 안 된 몸뚱어리였단 말일세. 지금도 곳곳이 쑤시우이…….”
“으음……. 영감의 말에 동감이야. 계약자 없이 인간계에서 힘을 쓰는 건 확실히 몸을 억지로 굴리는 느낌이지……. 냠!”
저렇게까지 말하니 얄미워도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내가 참아야지.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자기. 파이몬이랑 마르바스도 열심히 했잖아? 덕분에 이길 수도 있었고. 아, 사과 먹을래?”
내 왼쪽 침대에서 프리실라를 따라 사과를 깎고 있던 라파엘이 울퉁불퉁한 사과 조각을 포크에 찍어 건넸다.
“아. 고맙다.”
자연스럽게 포크를 받아들자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라파엘.
“아앙~ 해줄 줄 알았는데……. 그냥 가져갔어…….”
사과 달라고 양쪽에서 쌍으로 난리네 진짜.
말을 돌리든가 해야지.
“그래서, 황제가 황실고를 개방하겠다 말했다고?”
씹던 사과를 삼키고 곧바로 프리실라에게 묻자 그녀가 사과 깎던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네, 맞아요. 황실고는 정말로 제국에 큰 도움을 준 영웅들에게 포상을 줄 일이 있을 때가 아니면 개방하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황실고가 열리는 걸 보는 건 저도 처음이에요.”
제국의 황실고는 대륙 제일의 보물들이 모인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스토리에 따라 단 한 번만 열릴 정도이니 말 다 했지.
“제국의 황실고라니, 감이 안 잡히는군. 대체 무슨 보물들이 있을지…….”
로제의 옆에서 나란히 사과를 받아먹고 있던 교관이 귀를 쫑긋거리며 중얼거린다.
“그러게요. 그런 곳에 가면 뭘 골라야 할지 고민부터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행복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 로제.
“고민할 필요 없다. 네게 필요한 건 이미 생각해 뒀으니.”
“네? 벌써 생각해 두셨다고요?”
“네? 황실고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사과를 우물거리던 두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아, 여기서 황실고의 물건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일단,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레고리니까. 알고 있을 뿐이다.”
“……뭔가 납득이 안가면서도 그레고리님이라니까 당연한 거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레고리님은 최강이니까요!”
일단, 어떻게든 넘어간 듯했다.
정말, 컨셉 하나는 잘 잡았다니까.
“그래서! 뭘 골라야 하는데요?”
이번엔 귀를 위아래로 쫑긋쫑긋 흔들며 나를 바라보는 로제.
아무래도 내가 엄청 대단한 걸 준비했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다. 황실고에 들어가면───”
* * *
“어……. 정말 이거 맞죠?”
황실의 황실고 내부.
다른 이들이 각자 본인에게 필요하다 생각되는 물건을 고르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른 이들과 달리 유난히 잔뜩 울상인 얼굴로 자신이 골라야 하는 물건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제 폰 유글리아.
로제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며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래, 그것만 있으면 4서클은 물론이고 나까지 4성에 도달할 거다.”
“어…… 하지만…… 이건…….”
로제의 손 위에 올려진 조그맣고 귀여운 검은 물체.
“이건 벌레잖아요!!!”
그렇다. 그것은 바로 벌레였다.
“평범한 벌레는 아니지. 신목에서 자란 동충하초이니 말이다. 정확히는 버섯에 가깝겠군.”
정확한 이름은 [축복의 동충하초].
풀과 땅, 곤충 속성을 가지고 있는 영약으로 게임 속에서는 SR 등급을 자랑하는 영약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요! 이건 벌레예요! 벌레라고요!”
거의 눈물을 흘릴 기세로 나를 바라보며 외치는 로제.
그런 모습이 오히려 귀엽게 느껴져 미소가 지어졌다.
“그거 말고 다른 고를 게 있던가. 하루 종일 영약급인 담배를 피우고 과거 용사가 쓰던 「불굴」 이란 검까지 사용하면서 말이다. 네게 가장 어울리는 물건이 그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러했다.
물론 있으면 좋은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었기야 했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금 상황에선 저 [축복의 동충하초]를 이길만한 물건이 존재하질 않았다.
그야말로 로제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영약.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그레고리님은요? 그레고리님은 뭘 고르실 건데요?”
아무래도 자기가 벌레를 골랐으니 나도 별로 좋지 않은 걸 고를 거라 생각하는 모양.
나는 딱히 숨기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보여주었다.
“이거다.”
[심연의 블랙베리]
이것 역시 SR 등급의 영약이었다.
“우와아악!!! 평범하게 맛있어 보이는 영약이잖아요! 왜 저만 이런 버섯 같은 벌레를 먹고 그레고리님은 맛있는 딸기 같은 걸 드시는 거예요?!”
“버섯 같은 벌레가 아니라 벌레였던 버섯이 맞는 표현이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억울해요!”
웬만한 가문 하나를 돈으로 사들일 만한 영약인데 벌레같인 생겼다는 이유로 차별받다니.
동충하초가 된 곤충이 들었다면 엉엉 울 만한 상황이었다.
“……이것도 결국 네가 먹을 거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도록. 이건 나중에 5성에 오를 때 사용할 거다.”
“네? 5성이요?!”
5성이라는 말에 눈빛이 바뀌는 로제.
“그래, 5성부터는 4성과 달리 깨달음만으로는 힘드니 말이다. 이런 영약도 미리미리 준비를 해놔야지.”
“그, 그렇군요……! 그것도 결국 제가 먹을 거였어요.”
“그래,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템빨이 아닌 성능의 상승이니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슬슬 마르바스와도 정식 계약을 해야 하지 않겠나. 4서클 정도가 된다면 마르바스와 계약할 슬롯 정도는 생길 거다.”
“아! 그랬죠. 참! 가계약일 뿐인데 진짜인 걸로 착각하고 있었네요……. 헤헤.”
마르바스가 들었다면 서운해했겠는걸.
힐끔 마르바스가 발걸음을 옮겼던 곳을 바라보니 그는 아직 검을 구경하는 데 바빠 보였다.
“그럼 슬슬 나가지. 다른 녀석들도 대부분 고른 모양이군.”
“네……!”
황실고를 나오자 이미 각자 고른 물건을 영롱하게 바라보고 있는 다른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아하니 셀루아 교관은 검. 파이몬과 프리실라는 장신구. 라파엘과 아멜은 우리와 같이 영약을 고른 모양이었다.
“마르바스를 빼고 다 나온 모양이군.”
“그런 것 같군. 그놈의 영감. 가지고 있는 검도 더럽게 많으면서 무슨 검을 또 보겠다고 난리인지…….”
내 물음에 답해준 것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쓰다듬고 있던 파이몬이었다.
“그런 것 치고 너도 가지고 있는 장신구는 꽤 되지 않나?”
“하! 이건 평범한 장신구와 궤를 달리하는 물건이란 말이다! 뭐, 저 안에 그렇지 않은 게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레고리 그대는…… 호오, 꽤 좋은 물건을 들고나왔구나.”
우리가 각자 들고 있는 영약을 바라본 파이몬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축복의 동충하초]와 [심연의 블랙베리]인가. 둘 다 그대와 로제에게 잘 어울리겠군.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그렇지? 프리실라는……. [성자의 반지]인가. 괜찮은 걸 골랐군.”
“아, 네! 라파엘이 추천해줬어요.”
[성자의 반지]
이것 역시 SR 등급의 아이템으로 신성력을 150% 증폭시켜주며 내부에 신성력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아이템이었다.
신성력을 잔뜩 집어넣고 끼고 다니기만 해도 치유력이나 신체가 강화되는 성능이 있으니 프리실라에게 어울리는 물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교관님은 검이네요?”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검신을 쓰다듬고 있는 교관을 바라본 로제가 물었다.
“아아, 고대종인 샌드웜의 이빨로 만든 검이라고 하더군. 영체에도 공격이 통하고 재료가 재료이다 보니 드래곤의 이빨로 만든 검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물건이다.”
후후후. 하고 웃음을 내뱉으며 교관이 설명했다.
확실히, 샌드웜의 이빨로 만들었다면 웬만한 방어구는 두부 썰 듯 잘라버릴 수 있을 터.
게임에서도 ‘샌드웜’이 들어가는 무구는 대부분 SR 등급이었으니 저것 역시 SR 등급이겠거니 싶었다.
“다음은 마르바스인데……. 아, 나오는군.”
마지막으로 황실고에서 걸어 나오는 마르바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당연하게도 검이었다.
“……영감. 장난해?”
“마르바스……. 재미있는 물건을 골랐군.”
“음? 이게 뭐 어때서 말인가.”
마르바스의 손에 들린 것은 은은한 하얀빛을 계속해서 내뿜고 있는 새하얀 검신의 검이었다.
“아니 그건…… 성검이지 않나.”
그렇다.
잔뜩 혈관이 돋아난 채 부들부들 거리는 마르바스의 손에 들린 검.
그것은 우리가 흔히 ‘성검’이라 부르는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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