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델리니아 릴리 폰 유글리아 마무리
* * *
“드래곤 브레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화염에 관한 내성을 가지고 있는 나조차 뜨거운 열기가 로제에게서 쏘아지고 있다는 것뿐.
서서히 열기가 줄어들며 시야가 회복된 직후.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을 때,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대체 뭘 한 거냐 로제.”
방금까지만 해도 언데드들에 둘러싸여 있던 베릴과 릴리를 제외한 모두가 증발해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릴리와 베릴 역시 방금전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마력을 모두 소모한 것인지 베릴은 사실상 눈을 까뒤집고 드러누워 있었으며 릴리는 방금까지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것인지 베릴의 앞에 서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언데드가 저렇게 지친 표정을 짓는다? 분명 마나가 고갈된 게 틀림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해야 릴리 정도 되는 존재가 저렇게 지칠 수 있는 거지?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진짜 드래곤 브레스라니……. 드래곤들이나 사용하는 기술을 엘프인 우리 후손님이 어떻게 사용하는 거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릴리가 글렀다는 표정으로 우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아니, 내가 들은 ‘드래곤 브레스’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고? 파이어 로제 펀치같이 야매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 진짜로 그 ‘드래곤 브레스’라고?
정말이냐는 표정으로 로제를 바라보자 세계수의 가지를 들고 있던 로제가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하하 웃는다.
“그……. 부총장님이 알려주셨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세계수의 마력으로 떡칠 되어 있는 제 몸이라면 한 번은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랬군.”
지금까지 이곳을 오며 검을 사용한 것도 아마 드래곤 브레스를 쏘기 위해 마력을 아끼려고 한 모양이었다.
“남은 마나 잔량은?”
“……더는 무리에요. 담뱃불도 못 붙일 거 같아요.”
로제 역시 방금의 공격으로 모든 마나를 소모했던 것인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마무리하고 있을 테니 쉬고 있어라.”
“……부탁드릴게요.”
터벅터벅 바닥에 앉아있는 릴리를 향해 걸어간다.
“……다행이네요. 이렇게 끝나서.”
“그래, 네가 더럽게 강해서 꽤 힘들었지.”
“별수 있나요. 네크로멘시를 당하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걸요.”
그나마 릴리 정도 되는 자였기에 은연중에 우리를 도울 수 있던 거겠지. 다른 평범한 언데드였다면 기계처럼 명령에 따르기만 했을 것이었다.
“널 소환한 저 녀석을 죽이기 전에 묻겠다.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보가 있나.”
“정보야 있죠. 하지만 금제가 걸려있어서 제 입으로 말하는 건 불가능해요.”
“……별수가 없군.”
“어쩔 수 없죠.”
“그럼, 편히 쉬어라.”
“고마워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베릴의 목을 베려던 순간이었다.
“멈춰주십시오!”
뒤편에서 다급한 데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끝난 것을 알자마자 이곳을 향해 달려온 것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데킬라?”
“하아, 하아, 방법이……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방금 전의 전투로 4서클로 경지가 올랐습니다. 덕분에 슬롯의 크기도 향상되었습니다.”
“……설마. 여기서 릴리의 통제권을 네가 가져가겠다는 건가.”
데킬라에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싸늘하게 변한다.
릴리를 되살렸다는 것만으로도 분노한 마르바스였다. 그런데, 겨우 다시 쉴 수 있게 된 릴리를 쉬지 못하게 만들겠다?
사실상 릴리를 부려 먹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그렇게 할 생각은 없을뿐더러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상대는 평범한 언데드가 아닌 릴리 폰 유글리아님 이시니까요.”
요컨대 슬롯이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대체 뭘 할 생각이냐.”
“아주 잠깐동안 릴리님과 저 네크로멘서의 계약을 탈취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릴리님도 알고 계신 정보를 말씀하실 수 있겠죠.”
“……그게 가능한가?”
소환수와의 계약을 탈취한다니. 나조차도 처음 듣는 방식이었다.
“가능합니다. 정확히 릴리님은 소환수 계약이 아닌 네크로멘시로 부활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저의 네크로멘시라면 계약을 탈취하는 게 가능합니다. 물론, 릴리님의 동의가 있어야겠지만요.”
데킬라는 그렇게 말하며 힐끔 릴리를 바라본다.
“좋네요. 그런 방법으로 여러분을 도울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죠.”
릴리의 동의를 얻은 데킬라가 이번에는 나를 바라본다.
릴리가 이렇게 먼저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킬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데킬라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서 평소 본인이 들고 다니던 낫을 소환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베릴에게로 향하는 데킬라.
“지금부터 당신과 릴리의 계약을 끊어내겠습니다.”
선언하듯 조용히 읊조린 데킬라가 빠르게 베릴과 릴리의 사이를 낫으로 그었다.
팅──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데킬라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아채고는 릴리를 바라본다.
“지금부터 아시는 모든 것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 금제가 풀렸네요. 이 상태는 얼마나 지속될까요?”
“……길어도 10분이 한계입니다.”
“10분이라……. 충분하네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알고 있는 재앙 진형의 모든 정보를 말씀해드릴게요.”
그렇게, 릴리의 입에서 녀석들이 어째서 릴리를 되살린 것인지. 이후 녀석들이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릴리를 부활시킨 것은 내가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엘프의 상징성이나 다름없는 릴리를 부활시켜 이후 있을 전쟁에 선봉으로 내세운다. 그것으로 인간계 진형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릴리의 능력을 성장시켜 과거 보였던 강력한 힘을 이용한다.
여기까지가 바로 녀석들이 릴리를 부활시킨 이유였다.
“그들은 과거의 실패를 깨닫고 훨씬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했어요. 그렇기에 지금과 같이 사전작업을 철저히 하고있는 거고요. 제가 묘소에서 부활해서 저기 있는 나베리우스의 추종자와 대화를 할 때. 저를 부활시키는 것 말고 또 다른 임무가 있다고 했어요.”
“……또 다른 임무?”
“예, 그들은 미래에 큰 방해가 될 존재들을 미리 찾아 제거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베릴의 임무는 바로 성녀를 찾아 죽이는 거였고요.”
성녀.
재앙이 도래하며 지상에 큰 혼란이 닥쳤을 때, 신의 대리인으로 지상에 나타난다는 존재. 과거 [소환사 아카데미아]에서 주인공의 친구이자 동료로 등장했던 존재이기도 했다.
“성녀가 나타났다는 말인가?”
“베릴은 그러더군요. 신성교단에서 성녀의 등장을 감지했다고.”
“……그렇군.”
아마 릴리의 말은 사실일 터였다. 게임에서도 성녀는 재앙이 도래할 때마다 항상 등장했다는 서술이 나왔으니까.
“제가 알고 있는 건 이게 전부예요. 큰 도움을 드릴 수 없어서 죄송해요.”
“충분히 큰 도움이 되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뭐랄까.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나요.”
“……그런가?”
“네,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마치 과거에 보았던 거 같은……. 혹시, 저희가 예전에 만났었나요?”
“착각일 거다. 나는 널 만난 기억이 없으니.”
“……그런가요.”
사실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 여러 소환수들을 이용해 재앙을 물리쳤으며 대륙에 평화를 불러왔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몸으로는 처음이니. 그녀는 착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은발의 이쁜 네크로멘서 소녀분?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일까요?”
“……6분 정도 남았습니다.”
“충분하네요. 이별 인사를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에요. 그렇죠? 데모닉.”
릴리의 말에 지금껏 데킬라의 옆에 서 있던 데모닉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아, 그랬지.
우리가 여기까지 온 목적은 결국 데모닉과 데킬라를 묘소로 데려가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릴리가 이렇게 묘소 밖에 나와 있으니…… 사실상 목적은 이뤘다고 봐야겠지.
달그락── 달그락──
“데모닉님께서는 줄곧───”
“후후, 줄곧 이 말을 하고 싶었다니. 당신 답네요. 데모닉.”
본래라면 데킬라의 해석이 있어야지만 이해할 수 있는 데모닉의 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릴리는 데모닉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그랬군요. 저도 죽기 전에 당신을 보지 못해서 서운했어요.”
달그락── 달그락──
“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다구요? 저기 네크로멘서 소녀가요? 흐응~”
달그락── 달그락──
“네, 맞아요. 확실히, 맹약을 새로 고쳐야 할 때가 되긴 했죠.”
릴리의 그 말과 동시에 데모닉의 몸이 뒤틀리며 변하기 시작했다.
꾸득. 꾸드득 소리와 함께 새롭게 맞춰지는 뼈들. 이내, 한 명의 기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 된 데모닉은 그대로 릴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땅에 꽂았다.
데킬라가 4서클이 되며 데모닉도 그에 걸맞은 변화를 이뤄낸 것이었다.
“멸망한 세계의 용사이자 그대의 기사였던 데모닉. 지금 이 시간부로 그대에게 바친 맹세를 돌려받고 새로운 주인을 받들고자 한다. 허락해주겠는가.”
데모닉의 엄숙한 선언을 들은 릴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발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자신의 앞에 꽂힌 검을 뽑아 들고 공손히 검을 들어 데모닉에게 건네는 릴리.
“맹세를 거두는 것을 허락하겠어요. 부디, 새로운 주인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떠나시기를. 나의 첫 기사이자 마지막 기사. 데모닉.”
릴리의 손에 올려진 돌려받은 데모닉이 꿇고 있던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서 데킬라에게로 돌아간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릴리가 미소를 짓고 있었을 때.
“릴리! 릴리 폰 유글리아!”
“고조할머니!”
저 멀리, 쓰러진 언데드들의 잔해를 해치고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에 릴리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아, 마르바스님. 그리고 귀여운 우리 후손.”
단숨에 릴리의 앞까지 다가온 마르바스는 주변의 상황을 살핀 것만으로 릴리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떠나는 건가.”
“예, 저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사람이니까요. 다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런가.”
“네, 그게 자연의 순리니까요.”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별 인사를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렇게라도 할 수 있게 되었군.”
“어머, 마르바스님이요? 감동인데요?”
“하, 그대는 죽어서도 여전하구나.”
“글쎄요. 후후.”
“잘 가라.”
“네.”
“편히 쉬어라.”
“그럼요. 아, 그렇지. 마르바스님. 제 후손이랑 계약을 하셨다고 했죠?”
“음? 저기 로제 말인가?”
“맞아요. 저기 염색이 덜 되어있는 흑발의 귀여운 아이. 이름이 로제였었죠. 참. 다른 아이는…….”
“엘라. 엘라 폰 유글리아다.”
내 말에 릴리가 ‘아. 엘라.’라고 중얼거리며 엘라와 로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엘라. 그리고 로제……. 두 사람 모두 고조할머니에게 와보겠어요?”
“저희요? 힝, 움직이기 힘든뎅…….”
“언니! 고조할머니가 부르는데! 버릇없이!”
“아파아! 때리지 마! 가면 되잖아! 가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릴리가 입가를 가리며 후후 웃는다.
“정말 귀여운 아이들이네요. 여러분을 부른 건 그냥 가벼운 인사를 하고 싶어서예요. 로제 예전에 파이. 그 아이랑 만났다고 했죠?”
“고모요? 네. 그렇죠.”
“그 아이는 새로운 만남을 무척이나 꺼리는 아이예요. 그 아이도 가족이니 로제와 엘라가 잘 챙겨줬으면 해요.”
“그럼요! 저 고모랑 친해요!”
“네, 고조할머니의 말씀대로 할게요.”
“믿음직스럽네요. 착한 아이들.”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는 릴리.
“마르바스님. 이 아이들을 부탁드릴게요. 부디, 잘 지켜주세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레고리 존스님? 맞나요?”
이윽고 그녀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래. 그레고리 존스다.”
“네, 그레고리님. 부디 이 세계를, 제 가족들과 후손들을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친절하셔라. 그리고, 저기 데킬라라는 아이도, 잘 보살펴주세요. 데모닉의 말을 들어보니 충분히 재능이 있는 아이라더라고요.”
데킬라는 이미 그레고리 차일드에 소속된 인물. 챙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착하신 분이네요?”
……여기서 생긴 걸로 차별한다니. 할 말을 없게 만든다.
데킬라가 말한 시간이 점차 흘러 지나간다.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릴리의 몸.
손가락부터 시작해 서서히 부서져 가는 자신의 몸을 본 릴리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으며 우리를 둘러보았다.
“다들, 너무 감사했어요. 덕분에, 즐거운 나들이였답니다. 참, 그레고리님 잠시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부르는 손짓에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머리를 들이밀자 그녀가 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참고하지.”
“네, 부탁드릴게요.”
내 말에 환한 미소를 짓는 릴리.
“그럼, 시간도 다 되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다들 안녕──”
마침내 몸에 둘러져 있던 마나가 모두 흩어지며 본래 그녀의 뼈가 담겨있던 작은 유골함만이 그 자리에 남는다.
그 광경 속에 흐르는 고요한 적막.
이에, 지금껏 가만히 있던 로제가 입을 열었다.
“안녕, 고조할머니.”
이렇게, 끔찍했던 핼러윈이 끝이 나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