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아카데미의 전학생 9
* * *
서머니아에 위치한 국밥집.
우습게도, 판타지 세계관임에도 불구하고 국산 게임이 원작이었던 이 세계에는 국밥이 존재했다.
“크으, 음주 후 국밥이라니. 그레고리여, 그대가 이렇게 식문화에 조예가 깊은 줄 몰랐군.”
식당 주인이 가져온 뜨거운 국밥을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듯 섭취하는 파이몬. 이내 바닥까지 모두 싹싹 긁어먹은 파이몬은 크으. 하는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으으……. 확실히 식사를 하고 나니 술이 좀 깨는 것 같군. 머리는 아직 어질어질 하지만…….”
“대체 얼마나 마시면 너 정도 되는 악마가 그렇게 취할 수 있는 거냐.”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그대와 로제가 델리니아로부터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계속 마셨으니……. 얼마나 마신 거지? 기억을 못 하겠군.”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술을 마셨던 모양. 우리가 델리니아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계속 술을 마셨다고 하니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술을 먹은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로제와 계약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좋았나.”
“그대가 멍청한 질문도 할 줄 아는 군 그레고리 존스.”
그대로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파이몬이 푸하! 하는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본다.
“그대가 로제와 계약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네. 그런데 지금 보게나. 로제의 서클이 지금 몇 개지?”
“……5 서클이다.”
“그래, 5 서클이지. 무려 1년 만에 1 서클이었던 어린아이가 5 서클에 달성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레고리여.”
사실을 말하자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성장세였다.
“용사 라스가 5 서클을 달성하는 데 걸린 시간이 1년이다. 그런데, 반년도 안된 어린 엘프가 5 서클이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로제.
그녀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소환사다. 어쩌면 용사 이상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아이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로제 그녀의 능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그녀에게는 유글리아 가문의 든든한 지원과 용사의 핏줄이라는 재능, 나라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본인은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느니라. 수많은 피를 흘려가며 겨우겨우 승리해낸 과거 재앙과의 전쟁. 이번만큼은 다르지 않을까 하고.”
과거에는 재앙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존재하지 않을 상태로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허나, 지금에는 과거의 기록과 더욱 훌륭한 지원 속에서 자라나는 어린 영웅들이 존재하며 과거보다도 더욱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존재한다.
“비록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이다만, 로제는 이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네. 용사 라스마저도 대악마 둘을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그 아이는 그대와 마르바스마저 감당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하고 운을 뗀 그녀가 빈 컵 안으로 새로운 물을 채워 넣으며 입을 연다.
“그녀가 우리 세 명의 대악마와 계약하는 데 성공한다면, 마계의 판도는 물론이고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될 거라고 본인은 확신할 수 있다네.”
지금껏 세 명 이상의 대악마가 단 한 명의 소환사와 계약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야.
킥킥 웃으며 가득 찬 물컵의 물을 다시 한번 들이킨 파이몬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대가 왔다는 것은 로제가 곧 찾아온다는 거겠지? 술은 지금까지 충분히 마셨으니……. 가서 연초라도 태우는 건 어떠한가. 그레고리여.”
잔뜩 상기된 표정의 파이몬.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우리의 친우이자 소환사. 로제 폰 유글리아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
“야호! 저 왔어요. 그레고리님! 파이몬님!”
“입장.”
파이몬의 방에서 연초를 태우며 마계의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도중. 밝은 목소리의 로제와 맹한 표정의 유켈이 함께 파이몬의 방에 들어섰다.
“오랜만이로구나. 로제여.”
“파이몬니임! 보고 싶었어요!”
양팔을 벌리며 자리에 앉아있는 파이몬에게 달려들어 꾸욱 껴안는 로제. 이미 예상했다는 듯 반쯤 포기한 표정의 파이몬은 그런 로제의 포옹에 몸을 완전히 맡긴다.
“여전히 과격한 인사로구나.”
“그만큼 보고 싶었는걸요. 아, 소개해 드릴게요! 여기는 제 짝꿍인 유켈이에요.”
“음?”
로제의 말을 듣고는 뒤에 선 유켈을 바라보는 파이몬. 이에 유켈은 황궁에서의 일이 떠올랐는지 조심스레 로제의 등 뒤로 숨고, 파이몬은 그런 유켈을 바라보며 대충 무슨 일인지 알았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제국에서 손을 쓴 모양이구나. 로제의 짝꿍이라는 말은……. 레빈포트가 엮여있다는 뜻이겠고.”
“와……. 아직 설명도 안 드렸는데 다 알고 계시네요?!”
“뭐, 상황만 보자면 그것 말고는 답이 없으니 말이다. 거기, 교단의 사냥개였던 아이여. 우선 경계는 풀고 자리에 앉는 게 어떠한가? 로제의 친구로서 왔다면 나의 손님이나 다름없으니.”
파이몬의 말을 듣고는 슬금슬금 로제의 등에서 나와 구석 쪽 자리에 천천히 자리 잡는 유켈.
로제가 어디로 간다고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인지 유켈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피기 바빠 보였다.
“유켈.”
“!”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녀석. 그 한심한 모습에 한숨을 내쉰 나는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말했다.
“편하게 있어라. 파이몬이 아까 말했다시피 널 공격하진 않을 거다.”
내 말의 뜻을 이해한 것일까. 결국 아까보다도 더욱 차분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는 유켈.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파이몬은 아직도 자신을 껴안고 있는 로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입을 연다.
“마치 야생 고양이를 보는 것 같구나.”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다더군. 녀석이 과거보다 약해진 이유 역시 오랜 봉인으로 인한 후유증이기도 하고.”
“그런가? 뭐, 그것 말고는 인간인 저 아이가 이 오랜 세월을 버틸 방법이 없기야 하겠지. 과거 그렇게 뛰어나던 아이가 왜 저리되었는지 이해는 되는구나. 그건 그렇고……. 로제여, 슬슬 놓아주는 게 어떠한가.”
“넹? 앗! 죄송해요오. 뭔가 파이몬님을 끌어안고 있으면 편안해서…….”
“그대에게 안겨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레고리의 앞이다 보니 조금 부끄럽군.”
살며시 포옹을 푼 로제가 천천히 뒤로 걸으며 내 옆에 앉는다. 그제야 포옹으로 인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파이몬.
“이야기는 들었느니라. 로제여. 이번에 5 서클에 올랐다지?”
“네! 이제 파이몬님과 계약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확실히, 그대의 말대로 나와 계약할 슬롯은 남아있구나. 5 서클의 소환사가 이리 커다란 슬롯을 가지고 있다니…… 그대는 정말 대단한 아이야.”
“헤헤. 부끄러운데요.”
“자랑스러워해도 좋네. 그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 명의 대악마와 계약을 맺은 첫 인물이 될 터이니.”
“뭔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제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요!”
“대단한 사람이지 말고. 무려 대악마를 세 명씩이나 부릴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아마 본인 스스로 마왕을 자칭하여도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
“마, 마왕이요? 그, 그레고리님. 소문이 진짜 사실이 되어 버린 거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다……. 예전에 마르바스와 계약하고 싶다 했을 때는 철부지 같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데…………결국 우리 모두와 계약을 하게 됐군.”
“헤헤, 그레고리님과 파이몬님, 마르바스님과 함께라면 마왕이라 불려도 좋은걸요?”
이렇게 착한 아이가 마왕이라니. 전혀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지만, 현재 로제는 말 한마디로 마계에 대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수준의 권력을 얻게 된 거나 다름없었다.
“로제여, 본인과 계약하는 것에 대한 의미는 알고 있겠지?”
“네. 파이몬님에 대한 권리와 권한을 사용할 수 있으며 파이몬님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것. 맞죠?”
“잘 알고 있구나. 대악마 셋과 동시에 계약하는 만큼, 다른 진영의 악마는 물론이고 천계에서도 그대를 주목할 수도 있다. 허나, 이것만큼은 약속하지. 나, 파멸의 악마 파이몬은 그대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분쇄할 것임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파이몬은 천천히 로제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떤가. 로제여. 나와 계약을 진행하겠는가?”
파이몬의 물음에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는 로제.
“물론이에요!”
“좋군. 계약은 성사되었네.”
“네. 계약은 성사되었어요.”
두 사람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한대 얽히고 섞이며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한다. 과거 마르바스와 계약할 때 한 번 보았던 광경. 다른 차원에 있는 소환수가 아닌, 소환사와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소환수와 계약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두 사람의 계약 과정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유켈의 눈이 점점 커다랗게 변하기 시작한다.
“……릴리.”
파이몬과 계약하는 로제의 모습에서 릴리를 겹쳐 본 것인지 릴리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유켈.
화려한 빛무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눈을 감고 있던 파이몬이 서서히 눈을 뜨고선 나를 바라본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로제, 그레고리.”
이로써 로제는 또 한 명의 대악마와 계약하는 데 성공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