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1)화 (1/107)

1. 끝, 그리고 시작

“저주가 풀렸을까.”

먼저 말문을 튼 건 로아였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에이젠이 그리웠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로아는 고개를 기울여 에이젠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적어도 더는 시간을 되돌아가지 않을 거야.”

에이젠은 손을 들어 올려 로아의 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정말 죽으면 끝인 건가?”

더 이상 뒤틀린 운명을 바꿀 기회는 없었다. 로아는 또다시 머릿속에 에이젠이 죽어가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나 에이젠이 죽는 거 더는 보기 싫어…….”

두 팔로 에이젠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단단한 피부가 닿고, 살아있다는 온기도 느껴졌다. 그런데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럴 일 없어.”

로아의 머리칼을 쓸어넘긴 에이젠은 봉긋이 드러난 그녀의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려놓았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닿았다 떨어진 입술의 촉감이 좋았다.

“황실 무도회가 열리기 전에 결혼식부터 올리자.”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처음 결혼했을 때처럼 성대한 결혼식은 올릴 수 없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금 시점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에이젠은 로아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라고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로아와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동안 혼자 애쓰느라 고생했어.”

로아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던 것처럼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더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는 왜 나와 비슷한 크기의 사랑을 해서 나처럼 아프려고 하는 건지. 그저 온실 속 화초처럼 예쁘고 사랑스럽게 늘 웃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어울리는데.

“이제부턴 전부 나한테 맡겨.”

에이젠의 위로에 불안하게 쿵쿵대던 심장박동이 서서히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해줄게.”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좋았다. 저를 끌어안아 주는 그의 팔도. 은은하게 닿는 숨결도.

고개를 든 로아는 에이젠을 마주 봤다.

“널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고, 나도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붉은 눈동자도 좋았다.

“에이젠…….”

저들을 불행의 굴레에 빠뜨린 모종의 사건만 쫓느라 에이젠이라는 사람 자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울지 마, 로아.”

에이젠은 로아의 뺨을 적신 축축한 눈물 자국을 훔쳐냈다.

“슬피 우는 건 오늘을 마지막으로 해.”

에이젠은 두 손바닥으로 로아의 조막만 한 얼굴을 감쌌다. 가까이 다가선 그는 흘러내린 로아의 눈물을 핥았다.

느른한 그의 입술은 예민하게 달아오른 귓가로 이동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 지금 이 시간 속 나에게만 집중해.”

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에 힘을 풀고 에이젠에게 편히 기댔다.

“하, 흣…….”

뜨거운 혓바닥이 귓바퀴를 훑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조심스럽게 감싸기도 했다. 자극적인 감각에 로아는 야릇한 신음을 냈다. 그의 손은 로아가 놀라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올라왔다. 굴곡진 허리를 따라 올라가 풍만한 살결을 감싸 쥐었다.

흥분감에 휩싸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이 순간만은 뒷일 따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에이젠과 사랑을 나누고 확인하는 이 행위에만 집중했다.

“사랑해. 사랑해, 에이젠.”

행위만으로는 부족했다. 에이젠과 몸이 완전히 밀착될 정도로 끌어안은 로아는 말로도 제 마음을 전했다. 로아의 목덜미로 파고들던 에이젠은 잠시 흐름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로아를 내려다봤다. 흥분에 겨워 반쯤 풀린 눈이 사랑스러웠다.

“그런 말은 남자가 먼저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거야.”

에이젠은 로아를 보며 피식거렸지만, 로아는 그를 따라 웃어주지 못했다.

“못 기다려.”

마음을 전하는 순간만큼은 진지하고 싶었다.

“마음이 급해. 언제 에이젠이 내 손끝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 팔로 두 다리로 그를 꽉 끌어안아도 모자랐다.

“사라지지 않아.”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를 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져.”

여전히 울먹이는 로아를 침대 위로 눕혔다. 그 위로 올라온 에이젠이 만들어낸 그림자 안에 완전히 지배된 채였다.

“사랑해, 로아.”

맞잡은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와중에도 눈으로는 로아의 눈을 집요히 좇았다.

“사랑해, 사랑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도록. 그녀의 가슴속 깊이 저의 진심을 새겨넣었다.

“절대 놓치지 않을게. 절대 떠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을게.”

남녀의 몸이 완전히 포개어졌다. 에이젠은 로아가 입고 있던 슈미즈를 붙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위에 목걸이를 잡아 뜯으며 생긴 생채기가 오점처럼 남아 있었다.

“약속해.”

에이젠은 여린 살결 위 상처를 핥았다. 로아는 간지러운 감각에 몸을 꿈틀거렸다.

목덜미 살결, 쇄골, 둥근 어깨. 곳곳에 입을 맞추며 붉은 울혈을 남겼다.

“기사 에이젠 경의 맹약, 레이디 클라리온에게 바칠게.”

지키지 못했던 2년 전의 약속. 2년이 흐른 후에야 그는 사랑하는 로아에게 기사의 맹약을 바칠 수 있었다.

***

2년 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환상적인 날씨였다. 기상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로아는 침대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흐음, 조금만 더 잘래.”

“나참, 아가씨도 벌써 열여덟이라구요. 데뷔까지 그리 멀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아이처럼 늦잠이나 주무실 거예요?”

유모의 뼈를 때리는 말에 로아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온 로아는 가족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뒷정원으로 나왔다.

한참이나 정원을 거닐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티타임까지 마친 후에야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아가씨 앞으로 온 서신들입니다.”

로아는 트레이 위에 수북이 쌓인 서신들을 들고 침실로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은 그녀는 하녀에게 받아온 서신들을 펼쳐놓았다. 가장 친한 친구인 벨라니스에게서 온 편지부터 뜯었다.

“어머, 벨라니스가 벌써 데뷔당트를 준비하는구나. 좋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벨라니스는 로아와 어릴 때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그녀의 데뷔당트 무도회 초대장을 받은 로아는 덩달아 설렘을 느꼈다.

“멀리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데뷔를 하게 되면 이제 정혼자를 찾게 될 것이다. 그녀가 누구와 결혼을 할까. 가장 가까이에 사는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멀리 가버린다면 아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데뷔도 그리 멀지 않았다. 벨라니스도 짝을 찾아 떠나듯, 자신도 데뷔를 하면 곧 이 영지를 떠나게 될 것이다.

로아는 눈을 감고 자신의 정혼자가 누가 될지 상상했다. 그 사람이 누구든 간에, 함께 살게 될 저택의 정원은 둘째 오빠 카일론이 꾸린 정원처럼 자연풍경식 정원이기를 바랐다.

로아는 곧장 종이와 펜을 꺼냈다. 편지를 다 읽을 때마다 바로바로 답장까지 써서 봉해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서신을 집어 들어 보낸 이를 확인했다.

“에이젠, 트로네?”

‘에이젠’이라는 이름은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그 뒤에 붙은 ‘트로네’라는 성은 모를 수가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자, 4년 전쯤, 조경가인 오빠 카일론이 트로네 대공의 정원을 설계해준 대가로 만찬에 초대받은 적 있었다.

에이젠은 그때 만난 또래의 소년이었다. 트로네 대공가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아야 했던 가여운 소년. 그에게 위로와 격려를 북돋아주었던 때가 기억났다.

“아, 그 에이젠!”

로아는 얼른 서신을 뜯어 보았다. 4년 전 트로네 대공 저의 뒷정원에서 만나, 꿈을 갖게 되었고 지금은 기사를 서임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와, 에이젠이 정말 기사가 되었구나!”

로아는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렇게 우울해 보였던 그 소년이 자신 덕분에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되어 꿈을 이루기까지 했다니.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에이젠은 자신의 꿈을 갖게 해준 로아에게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로아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곧 있으면 친구 벨라니스의 데뷔당트에 참석해야 하니, 그 이후에 편한 대로 방문해달라는 내용을 답장을 써 보냈다. 그러자 머지않은 시일 내에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는 벨라니스의 데뷔당트를 마치고 로아가 성으로 돌아오는 바로 그 날에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바로?”

로아는 성급하게 날짜를 잡는 그가 당황스러웠다. 이제 기사가 되었으니 이곳저곳 소화해야 할 일정이 촉박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

시간이 흐르고, 로아는 벨라니스의 데뷔당트를 다녀왔다. 그녀는 형식적인 무도회 자리는 열었지만, 이미 결혼할 상대는 정해놓은 후였다. 무도회는 그저 소수의 친한 사람끼리의 소규모 파티처럼 이루어졌다.

그녀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영지로 가게 된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성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로아는 잠깐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오늘 벨라니스가 행한 모든 일은 조금만 있으면 자신에게도 이뤄질 것들이었다. 그런데 벨라니스와 저의 차이가 있다면, 아직 로아는 결혼할 상대가 정해지지 않았다. 물론 데뷔를 하고 나면 혼기가 비슷한 귀족들로부터 요청이 들어올 것이다.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이제 정말로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아가씨. 목욕 준비를 마쳐놓았습니다.”

“정원에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게.”

성으로 돌아온 로아는 곧장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에 머물렀다.

자수화단과 토피어리가 없는 자연풍경식 정원은 헤이든 제국에 딱 두 곳만이 가진 희귀한 정원이다. 클라리온 백작 저와 트로네 대공 저.

로아는 곧 있으면 자신을 보러 방문할 에이젠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눈을 감고 풍부한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소년일 때도 키가 컸는데, 기사가 되는 훈련을 받으면서 더욱 크고 단단해졌을 것이다.

만일 에이젠이 자신의 정혼자가 되고, 두 사람이 신혼집을 꾸리게 된다면 이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카일론이 만든 정원을 마음에 들어 했으니, 분명 같은 취향일 듯했다.

상상의 나래 속에서 허우적대던 로아는 정신을 차린 듯 얼른 눈을 떴다.

“내가 무슨 상상을…….”

아직 그와 제대로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닌데 결혼할 생각까지 하다니.

친구의 데뷔당트를 다녀온 직후라 그런지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앞서 나가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고개를 도리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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