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2)화 (2/107)

2. 재회

로아는 그를 만날 생각에 밤에도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선잠을 자고 나서 일어나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러 내려왔을 때, 사용인들은 이미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결코 일개의 기사 한 명이 아닌, 트로네 대공의 영윤이었다. 로아는 귀빈 대접 준비를 마쳐놓은 것들을 둘러보며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에이젠은 정해진 시각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클라리온 백작 부부는 수도로 나가 있었던 터라, 현재 저택의 주인은 소백작 셰인데릭이었다. 로아는 소백작 부부와 함께 그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클라리온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4년 만에 에이젠과 재회한 로아는 굳어버린 채 눈을 깜빡거리지도 못했다. 그는 본래도 키가 컸지만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단지, 커진 게 문제가 아니라 건장한 남성이 되어 있었다. 소년 에이젠이 성인이 된 실물을 영접하니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

셰인데릭 부부와 인사를 마친 에이젠은 로아의 앞으로 걸어왔다. 점차 다가오는 그를 멀뚱히 보던 로아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클라리온가를 찾아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로아는 어색하지만 최선을 다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에이젠은 그런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공 영윤이 백작 영애에게 격식을 갖추는 건 믿기 힘들었지만, 지금의 그는 엄연히 기사였다. 우물쭈물대던 로아는 제 손등을 그의 앞에 살며시 내밀었다.

“이렇게 고귀한 시간을 내주어 저야말로 매우 영광입니다, 레이디.”

로아의 하얀 손을 잡은 에이젠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은목서의 잎사귀도, 검집에 담긴 검도 아닌, 그토록 그리워했던 레이디 로아 클라리온.

4년 만에 두 남녀로 만난 두 사람 사이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로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에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아는 몰라보게 달라진 에이젠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버렸다.

“대공 각하께서 보시면 깜짝 놀라시겠어요. 어찌 계급이 훨씬 낮은 저에게 이런…….”

“저는 이제 정식으로 기사가 되었습니다. 에이젠 경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에이젠이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로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미소를 흘끗거림으로 보고는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몇 년 전엔 전혀 표정이 없는 암울한 소년이었는데, 훌륭하게 성장해 여유로운 미소까지 지을 수 있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모두 레이디의 덕분입니다.”

로아의 첫째 오빠 셰인데릭은 두 남녀 사이의 미묘한 공기를 금방 읽었다.

“저희는 아직 해야 할 집무가 있는데, 성은 로아가 안내해 줄 겁니다.”

셰인데릭이 로아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생경한 기분이었다. 어느 보폭으로 걸어야 할지, 좀 더 속도를 내도 괜찮은지, 방향을 틀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무엇부터 운을 떼야 할지도 몰랐다. 두 눈을 바쁘게 깜빡이며 이리저리 둘러보던 로아가 눈앞에 펼쳐진 정원을 보고 에이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일론 오라버니가 우리 성에도 트로네 대공 저와 같은 자연풍경식 정원으로 조경을 해주었어요.”

그 역시도 자연 그대로의 예쁜 정원을 좋아했었다. 유일하게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공통사였다.

“에이젠 경도 자연풍경식 정원을 좋아하셨잖아요.”

“그 저택에 두고 온 것 중 가장 그리웠던 게 바로 정원입니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아야 할 곳인데, 그녀와 처음 만났던 뒷정원만은 잊히지가 않았다.

“그중에서도 은목서.”

로아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라고 알려주었던 걸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아주 짧은 만남에도 그는 큰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로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가볍게 내뱉은 말에 그가 이렇게 크게 휘둘릴지는 몰랐다. 물론 좋은 방향으로 가게 되어 다행이긴 했지만, 일말의 책임감이 들었다.

“레이디.”

“네?”

사념에 빠져있던 로아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에이젠이 로아에게 좀 더 가까이 몸을 숙였다. 로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녀의 귓가에 다가간 에이젠이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레이디와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아.”

로아는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하녀들을 힐끔 보았다.

“그럼 이따가 테라스에서 잠깐.”

로아 역시 에이젠처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젠이 한 번 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우락부락 커진 그의 몸과 달리 웃을 때는 아직 소년 같은 얼굴이 남아있었다. 그 얼굴을 저도 모르게 빤히 봐버린 로아가 몸을 휙 돌렸다.

“중정에 조성해놓은 테라스 앞에 은목서가 식재되어 있습니다. 함께 보러 가시겠어요?”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허둥지둥 빠르게 걸어가려는 로아의 모습에 에이젠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중정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야외 테라스에 마주 보고 앉았다.

“카일론이 저번 여행에서 사 온 허브 티로 준비해줘.”

“네, 알겠습니다.”

하녀들이 차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떴다. 드디어 오롯한 두 사람만의 시간이 되었다.

“말, 편하게 해도 될까.”

에이젠이 먼저 친근하게 말을 놓았다. 로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수용했다.

“둘만 있을 땐 그렇게 해도 괜찮아.”

일전엔 잔뜩 얼어붙어있는 그에게 먼저 웃으며 다가갔던 건 본인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외려 본인이 잔뜩 긴장했고, 그가 더욱 여유로운 어른의 자태를 풍기고 있었다.

“에이젠이 정말로 기사가 될 줄은 몰랐어. 난 그저 침울해 보였던 에이젠을 위로해주고자 했던 말이었는데.”

내가 뭐라고 그의 인생을 좌지우지한 셈이 되어버렸을까. 부담을 느낀 로아가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손을 꼬물거렸다.

“로아.”

에이젠이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저의 이름을 불러준 것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콩콩 뛰는 게 느껴졌다.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수줍어서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그래도 저를 불러주는 그에게 눈을 맞춰주고 싶었다. 서서히 고개를 든 로아의 푸른 눈동자 속에 그를 담았다.

“네가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그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을 거야.”

에이젠은 로아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망설인 그녀가 손을 내밀자 두 사람의 손이 포개어졌다.

“네가 그날 내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줬던 걸 잊지 못해. 삶을 살아가는 목표와 의욕을 만들어줬어.”

로아는 그의 얼굴을 이렇게 정면에서 보는 것에 이질감을 느꼈다. 그의 칠흑같이 까만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밤에 봤을 땐 몰랐는데, 낮에 보니 신비로운 적안 눈동자가 저리 예쁘게 반짝거릴 수 있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다행이야.”

로아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저도 그처럼 자연스럽게 웃어주고 싶은데, 영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에이젠은 제 손 위에 살짝 얹어진 로아의 손을 조금 더 힘을 주어 쥐었다.

“아직 호위기사가 없다면 내가 레이디 클라리온의 정식 호위기사가 되어주고 싶어.”

생각지도 못한 그의 제안에 로아는 화들짝 놀랐다. 너무 놀라서 그에게 잡혔던 손을 빼버릴 뻔했다. 그러나 움찔거리는 그녀의 움직임을 빠르게 눈치챈 그가 더욱 세게 쥐어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다음 달에 내가 속했던 루크티아 성에서 기사 서임식이 있어. 그때 너에게 기사의 서약을 바치고 싶어.”

자신이 기사의 서약을 받다니. 아주 어릴 때 동화책을 보며 꿈을 꿔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서임을 받은 거 아니었어?”

“응. 루크티아가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행사만 미뤄졌어.”

그건 오히려 에이젠에게 기회였다.

“그리고 네가 데뷔를 마치면…….”

에이젠은 그녀의 손을 꼭 붙든 채로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클라리온 백작께 정식으로 혼사를 요청해볼 생각이야.”

“뭐?”

에이젠은 당돌하고 맹목적이었다. 로아는 갑자기 훅 들어오는 그에 잠시 사고 회로가 정지된 듯했다.

그녀 역시 그와의 혼인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그건 바보 같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의외였다. 그도 그럴 게 두 사람은 4년 전 겨우 한 번 본 게 다였으니까.

“미안. 너무 갑작스러워서 조금…….”

“천천히 생각해봐도 괜찮아.”

에이젠은 꼭 잡았던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난 이미 신중하게 생각했어.”

그는 먼저 고백을 말한 쪽치고는 여전히 여유를 품고 있었다.

“꿈을 갖게 해주고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준 너만이 내 버팀목이었으니까.”

로아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아리송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절대 강요하지 않을 거야.”

에이젠은 부담을 느낀 로아의 짐을 덜어주려 했다.

“무엇보다 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니까. 내가 그걸 해칠 자격은 절대 없지.”

“알겠어.”

곧 하녀들이 허브 티를 준비해왔다. 두 사람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도란도란 얘기하며 소소한 시간을 보냈다. 해가 저물어갈 즈음이 되자, 사용인들은 에이젠을 위한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로아는 그와 미리 인사를 나눈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오늘 그가 제안했던 것들을 골똘히 생각해봤다. 벨라니스의 데뷔당트를 다녀온 직후라 때마침 혼인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신경이 쓰였다.

고민이 많아질 때면 그녀는 늘 창문을 열고 탁 트인 정원을 바라봤다. 그녀가 창가로 향했을 때 저택 바깥으로 나오고 있는 에이젠을 발견했다. 로아는 얼른 신발을 갈아신고 그가 있는 뒷정원을 향해 살금살금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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