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3)화 (3/107)

3. 4년 동안 매일

“에이젠!”

새벽의 찬 기운을 쐬고 있던 에이젠은 저를 부르는 로아의 목소리에 뒤돌아봤다.

“혹시 잠자리가 불편해?”

격식을 차렸던 낮과 달리 잠자리에 들기 직전 편안한 차림으로 내려온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 거 아냐.”

에이젠은 헐레벌떡 뛰어나온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럼 왜 나와 있어?”

“실감이 안 가서.”

모든 순간을 이날만을 위해 버텨왔다. 그게 현실로 이루어지니, 그녀의 저택에 들어오니, 쿵쾅대는 심장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저와 함께 걸어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에이젠이 정중한 자세로 로아에게 손을 뻗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본 그녀가 얼른 그의 옆에 서서 손을 잡았다. 낮에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낮에 봤던 정원은, 밤이 되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렇게 밤에 몰래 나와 있으니까 그때가 생각나.”

밤이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벌써 익숙해진 건지. 로아는 낮에 비해 표정과 말투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난 4년 동안 매일같이 그 날을 생각했어.”

지금 이 순간을 포함한 매 순간 한시도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극한의 순간에도 정신력을 굳게 다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여유로웠던 낮과 달리, 그의 눈동자엔 꽤 간절한 빛이 서렸다. 찬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불어닥쳤다.

***

로아를 가장 많이 찾아온 손님은 벨라니스였었다. 그러나 그녀가 데뷔당트 이후로 바빠지자, 로아를 가장 많이 찾는 손님이 바뀌었다.

그날 이후, 에이젠은 시간이 날 때마다 클라리온가에 방문했다. 로아 역시 매번 그를 환한 미소와 함께 반겨주었다. 클라리온가의 가족들과 사용인들 모두가 에이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데뷔를 앞둔 로아를 향한 구애. 로아 역시 이를 거절하지 않고 그에게 저의 시간을 할애했다.

트로네 대공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꿈을 찾아 멋진 기사가 된 에이젠. 그를 수식하는 모든 것은 차남 카일론과 비슷했기에 모두가 그를 좋게 평가했다.

“로아.”

식당으로 내려온 로아는 찻잔을 들었다. 저를 부르는 셰인데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에이젠 경 어떻니?”

셰인데릭의 입에서 나온 ‘에이젠’이란 이름만으로 로아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뭐, 뭐가?”

셰인데릭은 참으로 알기 쉬운 동생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매번 너를 이렇게 보러 오는 건 뻔하잖아.”

“아냐. 우리 가문에서 내 호위기사가 되어주고 싶다고 했어.”

로아는 그가 저에게 혼사를 청하고 싶다고 했던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니니, 결정을 내리면 그때 전하고 싶었다.

“과연 그게 전부일까?”

셰인데릭이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차를 한입 들이켰다.

“난 에이젠 경의 우직한 심성이 아주 마음에 들어. 로아 너는 천방지축에 자유로운 걸 좋아하니, 옆에서 지켜주는 기사가 잘 어울릴 거야.”

“내가 무슨 천방지축이야.”

로아는 부끄러운 저의 모습을 콕 찌르는 셰인데릭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셰인데릭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뭐, 에이젠 경 앞에선 점잖은 레이디답던걸?”

로아는 자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저의 변화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의 앞에서는 묘하게 긴장이 됐다. 본래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점들이 점잖게 비춰졌을 수도 있을 듯했다.

“잘 보이고 싶은 남자 앞에선 자기도 모르게 의젓한 숙녀가 되는 법이죠.”

셰인데릭의 부인 역시 그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귀까지 벌게진 로아가 씩씩대며 제 마음을 부정했다. 고개를 숙이고서야 찻잔 속에 담긴 차에 비친 제 얼굴을 발견했다.

“아무튼 잘 생각해봐. 로아 너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니까.”

셰인데릭은 뒤늦게 부드러운 말투로 로아를 달랬다.

“네가 행복해질 선택이라면, 아버지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로아의 고민은 점점 깊어졌다. 그가 말한 루크티아 성의 기사 서임식이 당장 일주일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서임식 날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그가 성에 방문하는 날은 딱 하루가 남았다. 승낙이 됐든, 거절이 됐든 로아는 그날 반드시 그의 제안에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

로아는 서임식 전 마지막으로 그를 맞이하는 날, 평상시보다 더욱 자신을 꾸미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게 너무 오래 걸려서, 그를 밖에서 기다리게 해버릴 정도로 길어졌다. 하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묶어 리본을 쭉 잡아당겼을 때, 빠르게 일어난 그녀가 얼른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가씨, 천천히 가세요.”

갑자기 달려나가는 로아에 깜짝 놀란 사용인들이 만류해봤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에이젠 경!”

뛰어 내려온 로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의 앞에선 웃음을 유지했다. 셰인데릭의 말대로 천방지축인 제 본모습이 드러날 정도로 로아는 마음이 급했다.

“레이디께서 저를 위해 이렇게 달려 나오시다니.”

한 달 가까이 답을 내어주지 않는 로아에게 에이젠은 여전히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그가 점차 로아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로아는 달려오느라 두 손으로 꽉 붙들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내려놓았다.

“기쁘지만 그러다가 다칩니다.”

에이젠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로아는 이제는 자신의 하얀 손등을 쉽게 내어주었다. 그의 입술이 아주 살짝 닿는 느낌이 오늘따라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인사를 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보다 더욱 신경 쓴 듯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는 그녀를 잠시 넋 놓고 바라봤다.

“왜요? 이상한가요?”

로아는 물끄러미 저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부끄러웠다.

“아뇨. 너무 아름다워서 제가 감히 레이디를 넋 놓고 봐버렸습니다.”

가감 없이 솔직한 에이젠의 말에 로아는 수줍어져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에이젠도 참.”

바로 앞에 있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금방 분위기가 풀렸다. 두 사람이 여느 때와 같이 함께 정원부터 산책했다. 나란히 걷자 그제야 그녀의 금빛 머리칼을 감싼 붉은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참 잘 어울리는 색깔이었다.

오늘 역시 중정의 테라스로 향했다. 하녀들이 향이 좋은 차를 내오고 두 사람은 소소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는 시간엔 본가에 잠시 다녀왔어.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서임식을 가문에도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었거든.”

그가 어떤 말을 하든 로아의 귀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로아의 선택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제안에 대해 먼저 묻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먼저 제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호시탐탐 타이밍을 노리던 로아는 슬슬 불안해졌다.

“그래서 로아에게 주고 싶은 선물을 가져왔어.”

“어?”

로아는 자신이 꺼낼 말만 생각하다가 그 전에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에이젠은 보석함 같은 것을 꺼내더니 로아 쪽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열어봐.”

‘선물’이라는 키워드만 들은 로아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그것을 열어보았다.

“어머.”

반짝거리는 루비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로아와 잘 어울릴 것 같았어.”

에이젠은 처음 클라리온저에 방문했을 때부터 이 루비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선물 공세를 하면 부담을 느낄까 봐 이때가 될 때까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그녀가 액세서리로 하고 온 붉은 리본을 보고 용기가 생겼다. 붉은색이 그녀와 잘 어울릴 거라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너무 예쁘다. 이걸 내가 받아도 되는 거야?”

“그럼.”

에이젠은 로아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다시 가져갔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로아의 앞으로 걸어왔다.

“내가 채워주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로아는 너무 코앞까지 다가온 에이젠에 당황했다.

목걸이를 걸어주겠다는 거다, 다른 생각 하지 말자.

차마 바로 앞에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 로아는 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아 올려주었다. 에이젠이 허리를 숙여 로아의 목을 껴안듯 다가왔다. 그가 뒷목으로 손을 가져가자 뺨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로아는 자신의 숨결도 그에게 닿을까 봐 숨을 참아버렸다.

자신의 목 옆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남자다운 울대로 시선이 갔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얼른 눈을 돌렸다.

“잘 어울려.”

에이젠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자신이 걸어준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목걸이를 보는 척하고 있지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 그녀의 목덜미였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은목서보다 좋은 향기가 났다. 당장에라도 한입에 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너무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는지 로아가 손을 들어 올려 목걸이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에이젠은 이번엔 펜던트를 만지는 그녀의 손가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엔 반드시 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리라.

“저기, 에이젠.”

로아가 이름을 부른 후에야 에이젠은 그녀의 눈을 마주 봤다.

“응?”

들끓던 욕망은 잠시 접어두고, 다정하게 눈꼬리를 휘어 보이며 대답했다. 로아는 주변에 있는 하녀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둘만 있을 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오늘 밤에 잠들지 말고 뒷정원 쪽으로 나와줘.”

에이젠은 수줍게 비밀을 전하는 로아에 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녀가 오늘 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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