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4)화 (4/107)

4. 재수 없는 소리

잠자리에 들기 직전, 두 사람은 사용인들에게 보여주기식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예쁘게 꾸몄던 오늘의 모습을 다시 지워내야 하는 건 아까웠지만 들키지 않으려면 별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로아는 불을 껐다.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인 후 그녀의 방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로아는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깜깜한 방을 더듬더듬 걸어 무언가를 찾았다. 에이젠이 낮에 자신의 목에 직접 채워주었던 루비 목걸이. 몰래 만나는 것이니만큼 겉모습에 신경을 쓸 순 없었지만, 이 목걸이만은 하고 싶었다.

루비 목걸이를 목에 걸고 밤이 깊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로아는 창가에 앉아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의존했다. 그가 저택 밖으로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도 확인할 겸 창가를 뜨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바깥으로 나온 에이젠이 저택 위층을 올려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로아는 침실 밖으로 나섰다.

“에이젠.”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건, 딱 두 가지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그리고 대조될 정도로 붉은빛을 띠는 루비 펜던트.

“로아가 할 말이 뭔지 궁금해서 일찍 나와버렸어.”

에이젠은 잔뜩 기대에 부푼 모습이었다. 로아는 수줍게 루비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에이젠 경의 서약, 받을게.”

에이젠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가기도 전에, 로아는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혼사에 관한 건…….”

기사의 서약을 받는 사안보다 더욱 중요한 것. 긴장한 그의 울대가 일렁였다.

그녀가 뒷말을 늘이며 뜸을 들였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작고 예쁜 입술이 과연 어떤 대답을 내어놓을까. 애매한 표정만 봐서는 도저히 유추할 수가 없었다.

망설이던 그녀가 만지작거리던 펜던트에서 손을 뗐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푸른 눈동자가 그의 눈을 마주 봤다. 그러기도 잠시, 곧장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눈을 피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아버지가 받아주셔야 할 텐데.”

머쓱하게 들어 올려진 손이 뒷목을 긁적거렸다. 에이젠은 한동안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꼭 클라리온 백작님을 설득할게.”

로아는 너무 가까이 다가온 그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싶기도 했지만 옷자락을 꽉 붙들고 참았다.

“고마워. 꿈 같아.”

에이젠은 그 어느 때보다 무장 해제된 듯한 얼굴이었다. 로아 역시 그를 올려다보며 함께 미소 지었다.

“나도 에이젠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었어. 이렇게 멋진 기사님이 되어 내 호위기사가 되고 싶다고 나타날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로아의 말에 에이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틈 사이로 그의 낯빛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나야말로…….”

에이젠은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로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물음을 던졌다.

“안아봐도 될까.”

로아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수줍게 끄덕였다. 에이젠은 조심스럽게 두 팔을 로아에게로 뻗었다. 천천히 다가간 것과 달리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자 박력 있게 끌어당겼다.

4년. 그녀를 품에 안기까지 걸렸던 시간이다. 에이젠은 제 안으로 들어온 로아를 더욱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낮에 홀렸던 그녀의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은은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황홀한 촉감과 체취에 떨어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에, 에이젠…….”

포옹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로아가 바르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에이젠이 얼른 그녀를 끌어안았던 두 팔에 힘을 풀었다.

“아, 미안.”

정적이 두 사람의 사이를 맴돌았다. 에이젠의 눈은 여전히 로아를 좇고 있었다. 놓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닿으니 그보다 더한 욕망이 치올랐다.

“로아.”

묵직하게 깔린 그가 로아를 불렀다. 로아는 긴장한 듯 애써 피하던 눈을 들어 올렸다. 손을 뻗은 그가 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에이젠이 고개를 숙이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에이젠의 얼굴은 방향을 틀어 그녀의 귓가로 향했다.

“이런 거, 괜찮아?”

귓가에도 그의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한쪽 눈이 절로 찡그려졌다. 로아는 수줍음에 잠시 망설이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응.”

로아의 승낙이 떨어지자 에이젠은 곧장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첫 키스. 로아는 어쩔 줄 몰라 본능적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곧 입술 위로 부드럽게 그의 입술이 맞물렸다.

에이젠은 달콤한 그녀의 아랫입술에 좀 더 깊이 머물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그러다 아차 싶었는지 얼른 입술을 떼어냈다.

“좀 더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참기 힘든 얼굴이었다. 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로아의 입술을 머금기 전, 그녀의 이마에 먼저 입술을 맞추었다.

“너무 놀라지 마.”

“응.”

달콤한 경고와 함께 다시 한번 입술이 포개졌다. 로아의 머리칼 속으로 파고든 그의 커다란 손이 로아의 뒷목을 감싸 잡았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자 로아의 입술도 함께 벌어졌다. 공간 사이에 틈이 생기자 뜨거운 숨결이 섞여들었다. 매끄러운 것이 서로의 안을 유영하며 탐했다.

그토록 원했던 것을 손에 쥐게 된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달콤한 것을 맛보면 맛볼수록 중독에 빠져들었다. 겨우 키스였다. 입술과 입술을 맞대고 키스를 하는 것뿐인데도 영혼을 교환한 것처럼 더욱 서로에게 얽혀들었다.

에이젠의 머릿속엔 점점 위험한 상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건장한 남성으로서 신체의 변화까지 느끼고 나서야 물었던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적나라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자 로아는 감았던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직 실감이 되지 않는 듯 그녀의 눈동자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그녀의 시선이 그를 피하진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듯한 표정 같기도 했다.

“빨리 너와 결혼하고 싶어.”

키스만으론 부족했다. 어서 둘만의 집을 갖고 싶었다. 한 침실, 한 침대 위에서 질릴 때까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씻는 것도 같이, 잠드는 것도 같이, 아침에 눈을 뜨는 것까지도. 일상의 모든 부분에 그녀가 함께해주길 바랐다.

“나도야.”

무조건 일방적인 사랑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저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해주는 건 믿기 힘들 정도로 과분했다.

“서임식에 꼭 갈게. 에이젠 경의 서약, 받을 거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아쉽지만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

그가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에 다녀온 클라리온 백작 부부가 돌아왔다.

로아는 돌아온 부모님께 에이젠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낯빛이 어두워진 채로 무거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끼어들 분위기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심각한 이야기를 마친 백작 부부가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숨어있던 로아는 뒤늦게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로아.”

로아를 마주한 셰인데릭은 미소를 지어보려 했지만,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

“아무래도 에이젠 경의 서약을 받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어.”

고작 일주일이었다. 루크티아 성에서 열리는 기사 서임식이 남은 날짜는 고작 일주일이었다. 그 며칠을 버티지 못한 채, 제국 비상사태가 일었다.

국가 안보적인 문제에 대해 로아는 깊이 알 수 없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기사 이하의 병력은 곧 출정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곧 만날 거라서, 이제 함께할 날이 더 많을 거라서.

서임식 직전의 그와는 가벼운 작별 인사만 나눈 채 돌려보냈다.

황급히 침실로 올라온 로아는 곧바로 그에게 보낼 서신을 준비했다. 동이 트자마자 바로 보냈지만 며칠이 지나도 답신은 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약속했던 루크티아 성의 기사 서임식 날짜도 다가왔다. 전해 받은 소식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 서임식마저도 취소된 모양이었다.

***

간단한 협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도로 출정 갔던 병력들이 결국은 전장까지 내몰렸다. 로아는 직접적인 상황을 들을 수 없어 모든 게 답답했다. 어떻게든 알아내겠다는 로아는 그들 주변을 얼쩡거렸다. 그 안을 출입하는 사용인들이 엿들은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것을 훔쳐 듣기도 했다.

“아까 차를 내어드리면서 들은 건데, 적진에서 트로네 대공 각하의 출정을 요구했대요.”

“대공 각하까지? 세상에…….”

“고위 공직자까지 전쟁터로 소환될 정도면 그냥 위기 상황도 아닌가 봐요.”

“이러다 우리 영지까지 전쟁터가 돼버리는 건 아닌지 무서워 죽겠어요.”

“그런 재수 없는 소리 말어.”

사실의 조각만을 듣는 것도 절망적이었다. 로아는 그의 생사가 걱정되어 매일 밤 침실에 엎드려 울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점차 생기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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