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5)화 (5/107)

5. 귀환

눈물과 절망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클라리온의 데뷔당트일까지 다가왔다.

“데뷔를 축하해요. 레이디 클라리온.”

시국을 감안해 로아의 데뷔당트는 아주 간소하게 이루어졌다. 그녀가 전장으로 간 이후 소식이 없는 에이젠을 그리워하는 건 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혼자를 찾을 의욕조차 없는 로아는 무도회를 생략하고 소수의 지인들만 초대하기로 했다.

“로아.”

결혼을 하고 남쪽 영지로 떠났던 벨라니스가 로아의 데뷔당트를 축하해주기 위해 참석했다. 로아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 벨라니스를 보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의 데뷔를 축하하는 날이니 애써 웃어 보이려 노력했다.

“벨라니스. 먼 길 와줘서 고마워. 남쪽 영지는 어때?”

“여기보다 훨씬 따뜻하고 좋아. 남쪽 영지에서만 생산되는 맛있는 작물들도 아주 많더라고.”

벨라니스는 성대했던 자신의 데뷔당트와 달리 조촐하게 이루어지는 로아의 데뷔가 안타까웠다.

“아직 혼담을 나눈 상대는 없는 거니?”

로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데뷔가 다가올수록 혼담을 요청하는 가문들도 늘어났다. 그러나 로아는 그들이 어떤 가문의 어떤 사람들인지 보지도 않고 전부 퇴짜를 놓았다.

“괜찮다면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은데, 혹시 생각이 있다면…….”

“아니야. 난 괜찮아.”

로아는 벨라니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채워진 루비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벨라니스는 그녀가 누군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예상했다. 그 이상 로아를 재촉하지 않았다.

‘네가 데뷔를 마치면……, 클라리온 백작께 정식으로 혼사를 요청해볼 생각이야.’

몇 달 전만 해도 손꼽아 기다렸던 날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장 우울하고 슬픈 데뷔당트가 되어버렸다.

***

로아가 데뷔를 한 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에게서 2년 가까이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었어도 혼기가 지난 것 외에 바뀐 건 없었다. 매일같이 힘없이 울면서 멍하게 있기만 하던 로아에게 절망적인 소식은 그칠 줄을 몰랐다.

“트로네 대공 각하와 그의 아들 슈카트 트로네가 전장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입니다.”

헤이든 제국은 큰 전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친 목숨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명분을 만들어냈고, 사기를 북돋아냈다. 공격적인 인력을 끌어다 몰아붙인 탓에 결론적으로 전쟁을 종결시키는 지점까지 이끌어냈다.

결국 로아는 해탈했다. 에이젠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직 그를 다 잊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점점 혼기는 차지만 로아는 아직 다른 누군가를 둘러볼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다. 클라리온 백작가의 가족들은 그런 로아를 보채지 않고 기다렸다.

“카일론이 돌아왔어.”

오늘은 조경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갔던 카일론이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는 6년 전, 트로네 대공 저에 철학적인 의미가 담긴 자연풍경식 정원을 조경한 이후 유명 인사가 되었다.

헤이든 제국의 황제 폐하 역시 그의 정원을 탐냈다. 카일론은 보다 완벽한 조경을 위해 제국의 지원을 받고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다.

“곧 전쟁은 종결되고 협정이 이루어질 겁니다.”

카일론은 돌아오자마자 희소식을 전했다.

“황제 폐하께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기를 소망하는 의미로, 그리고 전장에서 전사한 트로네 대공을 추모하는 의미로 궁원을 트로네 대공 저의 정원처럼 자연풍경식으로 조경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황실 조경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었다. 로아는 꿈을 이룬 카일론을 보며 기쁘기도 했지만 여전히 에이젠을 떠올렸다. 그도 트로네 대공가의 차남이었고, 카일론처럼 자유롭게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길 바랐었다.

카일론은 성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본격적인 궁원의 조경을 위해 곧장 수도로 향했다. 며칠 뒤, 카일론은 황궁에 잘 도착했다는 서신을 보냈다. 로아는 자신의 몫으로 온 카일론의 편지를 확인했다.

「로아. 난 이곳에 잘 도착했어. 황제 폐하와 인사를 나누고 휴식을 취하는 중에 쓰는 편지야. 우리 성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황궁은 으리으리해.

그나저나 우리 6년 전에 함께 트로네 대공 저에 방문했던 날 기억하니? 그때 트로네 대공 영식인 슈카트 트로네 공밖에 뵙지 못했었는데, 알고 보니 영윤이 계셨더라고. 뵌 기억이 없어서 전혀 몰랐어.

그는 이른 나이에 출가하여 기사가 되었다고 해. 놀랍게도 그가 이번 전쟁에서 높은 전공을 세웠대. 아직 복귀하는 중이라는데 황궁에 그가 오면 업적을 인정받고, 전사하신 트로네 대공의 뒤를 이어 그가 대공으로 즉위하게 될 거야.」

로아는 카일론의 편지를 다 읽지 못했다. 이른 나이에 출가하여 기사가 된 트로네 대공의 영윤. 그는 바로 자신과 결혼을 약속했던 ‘에이젠 트로네’일 것이다.

소식이 끊겼던 에이젠이 살아 있었다. 비록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려, 그가 어떻게 변해버렸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럼에도 로아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저와 나누었던 약속이 무효가 되어버린대도 상관없을 정도로 기뻤다.

로아는 당장 카일론에게 답장을 써내려갔다.

***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긴 여정이었다. 에이젠이 헤이든 제국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궁으로 향했다.

그는 이제 막 기사를 서임받은 채 전쟁에 출정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전력을 발휘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가족인 트로네 대공과 슈카트 트로네가 적진에 볼모로 잡혀가고, 전사까지 하여 초인적인 전력이 깨어난 것이라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죽음은 에이젠에게 큰 영향이 되지 못했다.

로아 클라리온. 오로지 한 여자 때문이었다. 4년이나 기다렸고, 마침내 마음을 얻어냈다. 그 인고의 시간이 거의 매듭을 짓기 바로 직전에 출정을 나가야 했다. 그는 눈앞의 목표물을 두고 그 어떤 시련 앞에도 굴복할 수 없었다.

전공까지 세울 생각도 없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서 로아를 다시 만나리란 생각. 그 단순함만이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사이에 그녀는 데뷔를 마쳤을 것이고, 어쩌면 이미 다른 정혼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루라도,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마치고 그녀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는 황제 폐하를 만나 예를 갖추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하사해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작위와 수많은 영지를 비롯한 금은보화까지. 그를 위한 수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이젠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은 일개 백작 가문의 딸이었다.

황제와의 시간을 마친 이후에는 황태자인 유다르가 황궁을 안내하기로 했다.

“무사히 돌아와주었군. 환영하오, 트로네 대공.”

황태자 유다르를 보는 에이젠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황태자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전장에서 아버지와 형을 잃어 상심이 클 텐데도, 무너지지 않고 공적을 세우다니. 앞으로 트로네 대공 같은 전력도 없을 것이오.”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제국끼리 서로의 군사적 기반을 갖추기 위한 결혼 동맹. 단순 결혼이 아닌 국가 간의 협력 동맹이었다. 유다르는 오로지 단순 변심으로 그것을 파기했다. 그의 무책임한 말과 행동에 전쟁의 불씨가 지펴졌고, 애먼 자들이 전장으로 내몰려야 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만 하시오. 귀빈 대우를 해줄 터이니.”

유다르는 황궁의 이곳저곳을 보여주었다. 에이젠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허비한 시간에 이가 아득바득 갈렸다.

“참. 트로네 공에게 반드시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소.”

유다르는 에이젠을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황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에이젠은 유다르의 뒤만을 주시할 뿐 딱히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그러나 후원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자 그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위로 치솟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양의 키가 큰 교목들이 우거진 정원.

그곳을 본 에이젠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로아를 처음 만났던 트로네 저의 정원, 그리고 재회했던 로아와 수많은 추억을 만들었던 클라리온가의 중정을 떠올렸다.

헤이든 제국에 단 두 곳밖에 없던 자연풍경식 정원은 황궁의 후원에도 자리하였다.

“누구의 작품인지 알고 싶습니다.”

넋을 놓고 정원을 둘러보던 그가 이내 입을 열어 물었다.

“아, 혹시 알아본 것이오? 종전을 기념하기 위해 궁원 조경가를 새로 데려왔소. 그게 공이 살던 트로네 대공 저의 정원을 조경했던 카일론이지.”

카일론. 에이젠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저는 로아 클라리온이라고 해요. 이 아름다운 정원을 설계한 카일론의 동생이죠.’

로아가 했던 말이라면 단 하나도 흘려듣지 않았었다. 여전히 어금니를 까득거리던 그는 힘을 풀었다. 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그는 클라리온 백작의 자제이지만, 조경을 하기 위해 황실로 들어왔소. 지금은 폐하께서 자작을 내리셨지.”

“그를 만나고 싶습니다.”

“공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만나게 해주겠소. 저녁에 두 사람이 만날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지.”

운명이었다.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황궁에서 그녀의 오빠 카일론을 만났다는 건 운명이라고밖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