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6)화 (6/107)

6. 최종 목적지

만찬을 지낸 후, 유다르는 에이젠의 부탁대로 카일론을 불러주었다. 전쟁 영웅이 한낱 황실 조경가를 부르다니. 카일론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식당에 들어섰다.

“대공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궁의 조경을 맡은 카일론 클라리온 자작입니다.”

에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일론을 맞아주었다.

“트로네 대공 저의 정원을 조경하였고, 당시의 대공 각하께 만찬을 초대받은 적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곳에서 공을 뵙지는 못하였습니다.”

카일론은 트로네 대공 저의 정원 조경을 하는 동안 몇 달이나 그 저택에서 지냈었다. 그러나 에이젠은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공께서 어린 나이에 기사가 되기 위해 출가하여 그때는 이미 성에 계시지는 않는 걸로…….”

“있었습니다.”

카일론이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에이젠은 그가 잘못 추측하는 것을 짚어냈다.

“그곳에서 레이디 클라리온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로아를 아십니까?”

“레이디 클라리온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기사 서임을 받은 이후로 곧장 그녀를 찾아갔고, 데뷔를 마치면 반드시 청혼하겠다고 약속도 했습니다.”

카일론은 데뷔한 지 한참이나 된 여동생 로아가 왜 혼기가 찰 때까지 결혼을 미루고 있는지 셰인데릭에게 잠깐 들은 적 있었다. 결혼을 약속한 자가 전쟁터에 나가는 바람에, 소식 없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게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6년 전 동행했던 트로네가의 영윤이라니. 카일론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해 로아에게 서신으로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까지 전했다. 기가 막힌 우연은 마치 정해진 인연 같았다.

“즉위식을 마치면, 하사받은 것들을 가지고 클라리온가를 방문하고 싶습니다. 그때 저와 동행해줄 수 있습니까.”

에이젠 역시 로아와 같은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떨어져 있는 동안, 한시도 서로를 잊은 적 없었다.

“일단 저는 황제 폐하의 명으로 이곳에 온지라…….”

“제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지금이라면, 에이젠이 그 어떤 요구를 해도 받아들여질 것이다.

***

이른 아침, 유다르는 궁을 나와 후원으로 나왔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교목에 둘러싸여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숨을 크게 들이쉬던 중에 향긋한 풀 내음에 홀린 듯 이끌려갔다.

“음, 향이 아주 좋군. 이 나무의 이름이 뭔지 알고 있나?”

그의 뒤를 지키고 서 있던 호위기사에게 물었다. 호위기사는 망설이더니 작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유다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나무의 이름을 알 만한 사람을 찾으려 했다.

“카일론은 어디 갔지?”

“본가에 다녀오기 위해 황제 폐하께 휴가를 허가받았다고 합니다.”

호위기사의 대답에 유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궁한 지 얼마나 됐다고 휴가? 상이라도 당한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트로네 대공 각하께서 개인적으로 그와 동행하고 싶다는 요청을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유다르는 그가 자신이 살았던 트로네 저의 정원을 조경한 카일론을 만나고 싶다 하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동행까지 요청하다니, 두 사람이 어떤 관계로 얽매어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이미 출발했나?”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리고 트로네 공과 함께 출발한다고 합니다.”

“지금 카일론을 만나야겠군.”

그는 사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궁에서 카일론을 찾아 나섰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태자 저하께서 뵙고자 합니다.”

곧 카일론 방문이 열렸다.

“저하께서 어쩐 일로?”

카일론은 정리를 하느라 엉망이 된 방을 애써 감추었다. 유다르는 방 안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에이젠이 일어나 유다르에게 인사했다.

유다르는 에이젠과 카일론을 미심쩍은 눈으로 번갈아 봤다.

“두 사람은 친분이 아주 깊은 관계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트로네 대공 저의 정원을 조경했던 인연이 있는지라.”

카일론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유다르는 에이젠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클라리온 백작 저로 간다고 들었는데, 트로네 공도 동행한다는 곳이 그곳이오?”

“그렇습니다.”

“트로네 공이 클라리온가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오?”

향후 계획을 캐묻는 그가 불편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레이디 클라리온이 저의 정혼자입니다.”

유다르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렸다.

“아니, 트로네 공. 정혼자가 있었소?”

“그렇습니다.”

“어쩐지 하사받을 때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 말 없다 싶더니.”

긴 시간 전장에 나갔던 데다, 아직 나이도 젊기 때문에 그에게 정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여태까지 전장에 있었는데, 그럼 약 2년 전에 결혼을 약속하고 생이별을 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럼 레이디 클라리온은 그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전장에 나갔던 트로네 공을 줄곧 기다린 것이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계속됐다. 에이젠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유다르는 뒷짐을 진 채 허공을 향해 탄식을 뱉어냈다.

“허, 그런 순정적인 여인이 있단 말이지.”

그가 가장 골치를 앓는 문제가 황태자로서 제국의 뒤를 잇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는 정혼자를 고르는 문제였다. 다른 것보다도 자신의 옆에 둘 정혼자를 찾지 못해 국가 간의 전쟁까지 야기할 정도였으니, 그에겐 이보다 어려운 사안이 없었다.

유다르는 트로네의 정혼자라는 여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 트로네 공이라면 자신의 공적으로 백작보다 훨씬 명예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 집안의 자제를 정혼자로 하사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 기회를 전부 차버리고 선택한 여자. 그리고 그의 생사도 모른 채 하염없는 시간을 기다린 여자.

전설 속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저하.”

허공을 보던 유다르의 시선이 저를 정중히 부르는 카일론에게로 옮겨갔다.

“저한테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요.”

“아, 참.”

유다르는 그제야 자신이 카일론의 방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후원에 있는 나무 중에 향이 아주 좋은 나무가 있더군. 그 나무의 이름이 궁금했소.”

“음, 직접 보아야 알 것 같은데 지금 함께 내려가서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카일론이 나갈 채비를 했으나 유다르는 나무의 형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꽃이 없는데도 아주 향기로웠소.”

“아, 혹시 잎에서 향기가 나는 수종이었습니까?”

잎에서 향기가 나는 수종. 에이젠은 그 나무의 정체를 짐작했다. 로아가 가장 좋아하던 바로 그 나무. 그녀를 그리워하며 잎사귀에 입을 맞추었던 그 나무.

“그건 금목서라는 나무입니다. 후원에 심은 나무 중에 잎에서 향기를 내는 건 금목서뿐입니다.”

당연히 은목서일 거라 예상했으나, 황궁의 후원에 식재된 나무는 종이 다른 것이었다.

“금목서라, 이름도 예쁘군.”

“저도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지요. 본래는 은목서를 식재하여 정원을 향기롭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데, 황궁의 후원이다 보니 열매와 꽃의 모양까지 고려해, 좀 더 특별하고 아름다운 금목서로 식재해 보았습니다.”

“후원에 되도록 식재를 많이 해주면 좋겠네.”

“참고하겠습니다.”

에이젠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은목서는 저와 그녀의 교류를 상징하는 나무나 다름없었다. 황궁에 좀 더 고급 식재를 심기 위해 차별화를 한 거라지만, 에이젠은 다른 이유로 은목서가 아닌 게 마음에 들었다.

***

“오라버니! 에이젠 경이 살아 있었대! 카일론과 함께 성에 방문하겠대!”

카일론의 답신을 읽은 로아는 식당으로 우당탕 뛰어 내려갔다. 그녀의 뒤에 있던 하녀들이 얼른 로아의 뒤를 쫓아갔지만 그녀를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로아, 점잖이 걸어야지.”

셰인데릭이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에이젠 트로네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와 대공으로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로아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호칭 조심해. 이제 에이젠 경이 아니야. 정식으로 트로네 대공 각하로 즉위하셨어.”

로아는 카일론의 편지를 품에 안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대공 각하가 날 잊지 않아 주셨어.”

로아는 편지를 꼭 껴안은 채 엔도르핀을 뿜어냈다. 셰인데릭은 근 2년 만에 해사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에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힘든 시간은 다 보냈고 이제 볕들 날만 남았구나.”

카일론의 편지엔 기다리고 기다렸던, 마치 꿈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일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전공을 세운 그는 헤이든 제국 제일의 명예와 부를 쌓은 채로 대공이라는 작위까지 하사받았다. 그 역시도 로아를 잊지 못했고, 황궁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황제 폐하의 허가하에 클라리온가를 방문하기로 했다.

로아는 그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에 밤을 지새웠다. 삶의 의욕을 잃었던 동안 푸석해졌던 머리카락과 피부를 이제야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그날은 옷도 신경 써서 고를 거야. 쥬디가 도와줄 거지?”

사용인들도 다시 웃음을 되찾은 로아를 보며 한시름 놓았다.

화단을 정돈하고 온 로아가 향기로운 은목서 앞으로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은목서가 풍기는 강한 향기에 절로 눈을 감았다. 어느덧 하얗고 조그만 꽃망울이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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