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번엔 내가 널
“난 어렸을 때, 이 하얗고 예쁜 꽃에서 향기가 나는 줄 알았어.”
로아는 은목서를 처음 접했던 때를 떠올리며 설핏 웃었다.
“조그맣지만 정말 예쁜 꽃이에요.”
하녀 쥬디가 은목서 꽃에 대해 감상을 덧붙였다. 꽃과 함께, 그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로아를 본 쥬디가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대공 저하가 오시는 날, 은목서 꽃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어보는 건 어떠세요?”
“하얀색?”
로아는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로아는 워낙 조심성이 없는 성격이라 아무 데서나 뛰어다니거나 무언가를 흘려 의복을 더럽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얀 옷은 잘 꺼내 입지 않았다. 에이젠을 만나는 날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일까 걱정이 들었다.
“나랑 안 어울릴 거 같아.”
로아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쥬디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요. 눈부시게 아름다우실 거예요. 봄날의 신부처럼요!”
봄날의 신부. 로아는 그의 신부가 될 생각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신부…….”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은 봄을 지나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럼에도 마음만은 아직 두근거리는 게 그를 다시 재회했던 봄날 같았다. 햇빛에 반사된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더욱 눈부시게 반짝였다.
***
트로네 대공 저.
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에이젠이 본가에 들르는 사이 카일론은 수도 주변의 숲에서 수종을 조사하러 갔다.
“대공 각하가 돌아오셨습니다.”
어리숙한 소년은 늠름한 장군이 되어 돌아왔다. 말을 타고 성을 가로지르는 동안 에이젠은 무언가 음습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아무래도 주인 잃은 성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너졌을 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고삐를 바짝 당긴 에이젠은 저택이 가까워질수록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입구에 다다르자 말에서 뛰어내린 그는 저를 환영하러 나온 사용인들을 마주했다. 가주는 아직 한 명이 남아있을 터인데, 그녀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택은 일부 사용인들에 의해 최소한의 관리는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귀족 가문의 저택다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가 계단 앞으로 다가섰을 때 위쪽에서 와장창,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 에이젠?”
유리가 깨지는 소리보다 더 소름 끼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봤다. 술에 취한 듯 제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여자가 비틀거리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본처, 마를레나 부인이었다.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와.”
그녀는 귀족 가문의 부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엉망인 차림이었다. 신발조차 제대로 신고 있지 않았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차림에 에이젠은 짧게 혀를 찼다.
“네가, 네가 대공이야? 엉?”
마를레나는 난간을 잡고 계단을 한 칸 한 칸 디뎠다. 그녀의 표정은 보통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기괴하고 이상했다. 눈은 슬픈 건지, 화난 건지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꼬리는 소름 끼치게 말려 올라가 웃고 있었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제정신이 아닌 여자의 모습이었다. 에이젠의 앞으로 바짝 내려온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지워냈다.
“네가 죽였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녀의 자극적인 질문에도 에이젠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를 하찮게 여기는 심정에는 여념이 없었다.
“잔인한 그 전장에서, 내 남편, 내 아들. 네가 죽인 거지, 그치?”
일순 마를레나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네가 이 집을, 이 가문을 뺏으려고 일부러 내 남편과 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거잖아!”
그의 정면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에이젠은 여전히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용인들이 얼른 마를레나의 양옆으로 몰려들었다.
하녀 한 명이 그녀의 과도한 행동을 만류하기 위해 뒤로 잡아당겼다.
“마, 마님. 이제 그만…….”
쾅-
무심하게 서 있던 에이젠이 처음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위협적으로 향한 곳은 마를레나가 아닌 그녀를 만류하던 하녀였다.
“누가 마님이지?”
벽으로 밀쳐진 하녀가 저를 매서운 눈으로 보는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그 무서운 눈을 1초도 마주 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도 이 집의 주인이 누가 되었는지 파악이 안 된 건가.”
“죄, 죄송합니다. 도…….”
하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또 호칭을 실수할 뻔했다. 얼른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가 다시 호칭을 바꾸었다.
“아니, 주, 주인님.”
에이젠은 그제야 그녀를 몰아붙였던 벽에서 손을 뗐다.
“그래. 네 주인은 나야.”
에이젠의 눈은 벌벌 떨던 하녀에게서 마를레나로 옮겨갔다. 양옆에 사용인들이 그녀를 잡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님은 주인의 부인을 가리키는 호칭이잖아. 저 여자는 내 부인이 아니야.”
에이젠이 다시 한번 하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 저 여자는 트로네 가문과 전혀 상관없는 여자다.”
하녀 한 명을 보며 말하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용인들은 그가 모두를 향해 경고한 것임을 알았다.
“당장 내 집에서 끌고 나가.”
사용인들이 주춤거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에이젠이 뿜어내는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자들이 홀린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경멸하는 눈빛이 향하는 마를레나의 주변으로 모였다.
십여 년 이상 저를 보필하던 사용인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마를레나는 정신을 놓은 듯 발악하기 시작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마를레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자신을 끌고 나가려는 사용인들을 거세게 뿌리쳤다.
“으윽!”
그녀를 붙들었던 하녀 한 명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두 눈을 희번덕하게 뜬 마를레나가 에이젠의 앞으로 돌진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얼른 마를레나를 막아섰다.
“저, 저, 정신 나간 자식. 내 남편, 내 아들을 죽이고 이 성까지 빼앗으려 해?”
커다란 저택에 그녀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질 정도로 악을 썼다.
“못 나가!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고!”
무심하게 일관하려던 에이젠은 찌릿하게 귀청을 자극하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집사 리예드가 에이젠의 앞으로 걸어왔다.
“주인님. 노여움은 이해하나,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노마님을 내보내는 것은 좀…….”
그는 어떻게든 에이젠을 말로써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에이젠의 심기를 더욱 건드릴 뿐이었다.
에이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피로가 쌓인 뒷목의 근육을 풀었다. 고개를 들고 허공을 향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집사 리예드를 마주 봤다. 리예드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보지 못했다.
자신의 눈을 피하는 리예드부터 주변을 둘러싼 사용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6년 전에도 이 저택에서 일했던 자들이다. 마를레나가 자신을 이유 없이 학대하고 지하실에 가두었을 때 그 광경을 모두 지켜봤던 자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아는 목격자들.
그런데도 이들은 마를레나의 편에 서 있었다. 전장을 다녀온 그가 대공이 되어 트로네 가문의 가주가 되었는데도, 이 정당한 행위를 막아섰다.
에이젠의 입가에서 실소가 터졌다.
“이제부터 이 집에서 내 말을 거스르는 사용인은.”
곧장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긁히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그를 설득하려던 리예드가 살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가 쥔 칼끝이 어디를 겨눌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새로운 주인에 대한 존중이 부족해.”
에이젠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닿은 자는 바로 옆에 있는 리예드였다.
“아직 얼떨떨한 모양인데.”
겁에 질린 리예드가 뒷걸음질 쳤다. 그의 손끝에서 날카로운 빛을 내는 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본보기를 보여줘야 이해할 것 같군.”
마치 전장에서 숨어있던 적진을 발견한 듯이, 그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쇠붙이가 움직이는 기척을 냈다.
“꺄아악!”
그 끝이 향한 곳은 집사 리예드가 아닌 마를레나의 목 끝이었다. 차가운 칼끝이 피부에 닿자 비명을 지르던 것조차 멈춰버렸다.
“주, 주인님!”
사용인들은 그를 만류하고 싶었지만, 제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도 없었다.
마를레나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이젠은 그녀의 눈을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에게 바락바락 악을 쓰던 마를레나는 겨눠진 칼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멀쩡한 두 발로 걸어서 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
“목이 썰린 시체가 되어 날짐승에게 사지가 찢긴 채로 쓰레기처럼 끌려나가시겠습니까.”
선택지를 넘긴 에이젠의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그의 소름 끼치는 얼굴에 마를레나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겁에 질린 그녀가 아무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그녀의 목에서 칼을 거둔 에이젠은 고개를 들어 주변에 서 있는 사용인에게 눈길을 보냈다.
온몸에 힘이 빠진 마를레나를 다시 양옆에서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조금 전처럼 반항을 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네가 이 집에 오기 전부터 너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
마를레나는 끌려나가기 직전, 악을 쓰느라 쉬어버린 목소리를 겨우 냈다.
“날 찾아왔던 네 생모는 내게 저주를 퍼부었어. 언젠간 자기 아들이 커서 모두 다 박살 내고 빼앗아버릴 거라고 말이야.”
에이젠은 몸을 돌려 끌려나가는 마를레나를 마주 봤다.
“그래, 그 눈. 그 여자의 소름 끼치는 눈을 꼭 닮은 네 눈을 볼 때마다 불길함을 견딜 수 없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불길하게 빛나는 눈동자.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여자를 꼭 빼닮은 그녀의 아들.
“그 여자의 저주가 이루어진 거야.”
마를레나는 정신을 놓고는 깔깔 웃어댔다. 자신의 머리칼을 잔뜩 헤집어 놓기도 했다. 그러더니 일순 웃음을 멈추고 에이젠을 향해 경고를 던졌다.
“이번엔 내가 널……, 저주하겠다.”
에이젠은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려 비소를 흘렸다.
“당신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감사히 여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