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선잠 속 악몽
에이젠과 카일론이 함께 성으로 돌아오기로 한 날. 로아는 전날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겨우 눈붙인 정도로밖에 수면을 취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다가올수록 정신이 퍼뜩 들었다.
덩달아 그녀의 사용인들까지 계획보다 이르게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샤워를 마친 로아가 방으로 돌아왔다. 쥬디는 그녀가 입을 옷과 장신구, 신발을 모두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로아는 오늘 자신이 입어야 할 것들을 신중하게 살폈다.
쥬디가 골라온 새하얀 드레스들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워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로아는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입어보았다. 쥬디가 그녀의 환복을 도와주는 중에도 로아는 끊임없이 제 모습을 살폈다.
“나 오늘 이 하얀 드레스에 아무것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쥬디는 로아의 머리칼을 한 움큼 그러쥐어 그녀의 어깨 앞으로 넘겼다. 등의 지퍼를 올려주려 할 때, 로아가 바르작거리며 돌아보려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갈아입을래.”
지금이야 너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지라도, 식사를 하거나 정원을 거닐 때 꼭 무언가를 묻힐 것만 같았다. 새하얀 옷이다 보니 그게 훨씬 눈에 띌 것이 걱정됐다.
“아니에요. 지금 너무 아름다우세요. 거울을 한번 보세요.”
쥬디는 전신 거울에 비친 로아를 가리켰다. 거울 속 자신을 본 로아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자신이 봐도 썩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사이에 지퍼를 모두 올린 쥬디는 로아가 가장 아끼는 루비 목걸이를 꺼냈다. 그녀의 목에 그것을 둘러 채워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가씨께서 아끼시는 루비 목걸이도 화사하게 빛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걸요.”
새하얀 드레스 위에 고고하게 자리한 붉은 보석. 에이젠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준 선물이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에이젠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로 그에게 이 목걸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흰 드레스에 대조적인 붉은 컬러는 확실히 눈에 잘 들어왔다. 로아의 입꼬리가 그제야 조금씩 말려 올라갔다.
“정말 예뻐?”
“정 걱정되시면 식사 때 무릎 위에 손수건이라도 깔아드릴게요. 드레스랑 똑같은 하얀색으로요.”
로아를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봐 온 쥬디는 이미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쥬디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로아가 못 이기는 척 도도하게 대답하자, 고개를 돌린 쥬디가 살풋 웃음을 흘렸다.
환복까지 마치자 손님을 맞을 준비는 모두 끝났다. 아직 다른 가족들은 분주하게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너무 이르게 일어난 로아는 남은 시간에 정원으로 나갔다. 그가 오기 전, 마지막으로 정원까지 점검했다.
“오늘따라 공기가 더 좋은 것 같아.”
로아는 두 눈을 감고 쾌청한 숲속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부드러운 바람이 곱게 빗어진 그녀의 금발을 흩뜨렸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아서 자꾸 눈을 감게 되었다.
“여기에 앉아서 좀 쉬고 싶어. 깔고 앉을 만한 것 좀 갖다 줄래, 쥬디?”
“네, 알겠습니다.”
쥬디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오는 바람에 로아는 쥬디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푹신한 잔디밭에 앉아버렸다.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어 앉자 안락함이 밀려들었다.
푹신한 잔디, 편안한 자세, 상쾌한 공기와 고요한 자연의 소리.
전날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로아는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다.
아주 잠깐 졸아버린 사이에도 그녀는 희미한 꿈을 꾸었다. 꿈속엔 곧 만날 에이젠이 나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로 저를 가만히 응시했다. 로아는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팔을 뻗고 싶다고 생각하자 드디어 그에게로 팔을 뻗게 되었다.
이제 닿겠다, 라고 생각할 즘 그녀의 팔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해버렸다.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내 버렸다.
분명 껴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왜 그런 짓을 해버린 걸까. 꿈속에서 로아는 혼란스러웠다.
댕, 댕-
“어…….”
누군가 성안으로 들어왔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잔디밭에서 얼른 일어난 로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깔고 앉을 것을 가지러 간 쥬디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성의 입구로 나오자 가족들은 이미 준비를 마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일어났고, 가장 먼저 나올 줄 알았던 로아가 마지막으로 그들의 옆에 섰다.
“긴장돼…….”
로아는 제 심정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른손을 살며시 윗가슴에 얹어보았다. 그녀의 설렘과 긴장을 대변하는 듯 심장이 쿵쿵쿵 요동치고 있었다. 애써 담담한 척해보려는 노력과 함께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곧 성안으로 들어서는 무리가 보였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심장 소리가 점점 커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좇았다. 전장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위력을 과시라도 하는 듯 단단해 보이는 거구의 몸집, 그의 머리카락처럼 칠흑 같은 흑마. 그는 아주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린 그가 가장 먼저 클라리온 백작의 앞으로 걸어갔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셔서 우리 영지부터 찾아주시다니, 클라리온가의 영광입니다.”
클라리온 백작은 예의를 갖추어 에이젠을 환대했다. 에이젠은 차례로 백작 부인, 소백작인 셰인데릭, 그의 부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토록 그리웠던 여인 로아의 앞에 섰다.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다행이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로네 대공 각하.”
생이별을 한 지 1년 반만의 재회였다. 로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내어 그를 맞아주었다.
짧은 시간 안에 로아는 그의 얼굴과 몸을 훑었다. 약 2년 전에는 소년의 향기가 아직 남아있었다면, 이제는 완전한 남성이 되어 있었다. 기사 서임을 위한 훈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전장에서 다져진 그의 몸은 훨씬 단단하고 거대해져 있었다.
로아가 저의 손을 내밀자 에이젠은 그녀의 하얀 손을 쥐었다. 그의 손에는 전장에 나가기 전에 보이지 않았던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웠습니다. 레이디 클라리온.”
그가 고개를 숙여 로아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잡았던 손을 놓았을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에이젠은 로아를 향해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다정한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아무리 잔인했던 전장에서 단련되어 왔더래도 변하지 않은 건 있었다.
저를 향해 다정하게 짓는 미소. 그것만은 여전했다. 로아는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에 안심했다.
에이젠은 그녀의 목에 걸린 자신이 선물했던 루비 목걸이로 눈을 옮겼다. 그녀를 보는 욕망 서린 그의 붉은 눈동자가 펜던트보다 훨씬 빛을 내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에이젠이 클라리온 백작 가족들과 인사를 마치자 뒤늦게 마차에서 내린 카일론이 다가왔다. 로아는 에이젠의 소식을 전해준 카일론을 다소 격하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카일론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 대공 각하께 차라도 대접해드리렴.”
클라리온 백작은 오롯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내어주었다. 로아는 자연스럽게 그를 중정 테라스로 이끌었다.
“함께 차 한잔 하시겠어요?”
몇 걸음 걷던 로아는 무언가 떠오른 듯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참. 그 전에 뒷정원을 거닐지 않을래요?”
그녀가 말하는 무엇이든 좋았다. 사실 장소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디가 됐든 그녀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로아는 에이젠을 뒷정원으로 안내했다.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어. 너무 설레는 탓에 어젯밤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
오래간만의 재회인데도, 둘만의 시간이 되자 로아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에이젠 역시 씩 웃더니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피곤하지 않아?”
“전혀. 사실 에이젠이 들어오기 전에 여기에 앉아서 잠깐 눈을 붙였어. 정원인데도 숲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하더라고.”
그가 성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휴식을 취하던 곳.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이곳의 기운이 좋아 그를 데려오고 싶었다.
“그런데 선잠을 자는 동안 악몽을 꾸었어.”
에이젠은 다정한 눈으로 종알거리는 로아를 내려다봤다.
“꿈속에 에이젠이 나왔는데, 내가 에이젠을 밀쳐내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이었어.”
로아는 생생했던 꿈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가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꿈에서라도 날 밀어내면 안 되지.”
“그러니까. 꿈인데도 죄책감이 들었어. 내가 얼마나 에이젠을 보고 싶어 했는데.”
로아는 더욱 칭얼거리며 말했다. 에이젠은 로아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꿈에서 잘못한 거 지금 사과할 기회 줄게.”
능글맞게 웃어버린 그가 로아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뭐 하는 거야?”
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멀뚱히 올려다봤다.
“날 안아줄 기회를 주는 거야.”
“아…….”
로아의 양 뺨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드레스가 새하얘서인지 피부가 붉어진 것이 더욱 잘 보였다.
로아는 잠시 우물쭈물거리더니 서툴게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꿈에선 두 팔로 그를 가차 없이 밀어냈지만, 현실에선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소심하게 팔을 뻗은 로아는 에이젠의 옆구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구김살 하나 없는 그의 제복이 전부 느껴질 정도로 밀착했다.
포옹을 하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에이젠이 돌아왔다. 내가 기다렸던 남자. 보고 싶어서, 살아있는지 걱정이 돼서 매일 울게 했던 남자. 순수했던 마음을 간직하고 내게 청혼하겠다는 남자. 내가 사랑했던 남자. 에이젠 트로네.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흑, 흐흑…….”
그를 다시 봤을 때만 해도 입꼬리가 귀에 걸려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종일 웃음이 떠나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눈물이 양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감정이 조금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격하게 치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