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9)화 (9/107)

9. 원만하게 지내려면

에이젠은 들썩거리는 로아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로아의 등을 서툴게 토닥거렸다. 괜찮다고 위로해주려는 목적이었겠지만, 그녀에겐 울음을 더욱 부추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품 안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그에게 예뻐 보이고 싶어 이른 새벽부터 준비했다. 생각 없이 울어버린 바람에 자신을 꾸몄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된 셈이었다.

“진정 됐어?”

로아의 흐느낌이 줄어들자 에이젠이 다정하게 물었다.

“응.”

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 제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얼굴 보여줘.”

에이젠이 자신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자 로아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두 팔에 더 힘을 주고 버텼다.

“울었잖아. 못생겼을 거야.”

로아가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젠은 사랑스러운 그녀의 금빛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동안 로아 얼굴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만나고서도 보여주지 않는 거야?”

고개를 숙인 그가 품속에 담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울어도 예뻐.”

로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예민한 귓바퀴에 그의 뜨거운 숨결과 다정한 목소리가 닿았다. 또 눈물이 날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다정함이었다.

빨개졌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녀는 그의 품에서 나오자마자 등을 돌렸다.

“이쪽으로 와. 정원을 보여줄게.”

에이젠은 빠르게 뒤돌아 걸어가는 그녀를 보다 픽,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점잖은 걸음걸이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후원으로 온 로아는 알록달록한 화초가 가득 핀 화단 앞에 멈춰 섰다.

“에이젠이 오기 며칠 전부터 내가 직접 물을 준 화단이야.”

“직접?”

에이젠은 그녀가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꽃에 물을 주다니. 그 모습을 상상하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싶기도 했다.

“해볼래?”

로아는 사용인들에게 물뿌리개를 준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로아는 한번 해봤다는 이유로 그의 앞에서 잔뜩 우쭐해져 있었다.

“손목에 힘 조절하는 게 쉽지 않아. 꽤 무겁지?”

강철로 된 무기를 수십 번, 수백 번도 들었을 그에게 물뿌리개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에이젠은 하얗고 가느다란 팔로 물뿌리개를 들고 집중하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물기를 머금으니까 훨씬 싱그러워 보인다.”

화려한 꽃잎에 물방울이 맺혀 함초롬하니 젖어들었다.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게 꼭 조그마한 보석 같기도 했다. 로아는 사소한 것에도 미소 지을 줄 아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그러네.”

에이젠은 꽃이 아닌 로아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잔혹한 광경이 하루에 수십 번도 펼쳐지고, 지독한 피비린내에 절어야 했던 전장과는 무척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참. 은목서에도 꽃이 폈어.”

물뿌리개를 내려놓은 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젠의 손목을 잡고 은목서 식재지로 향했다. 에이젠은 하얗고 긴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그러쥔 형세를 응시했다.

은목서 식재지 앞으로 온 로아가 조그맣게 맺힌 흰 꽃을 가리켰다.

“매년 은목서에 꽃이 필 때마다 에이젠이 생각났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두려움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누군가를 해하고, 죽이고 잔악한 그곳에서 악바리를 써서라도 살아남아 숨 쉬고 있는 자신이 처음으로 자랑스러웠다.

오로지 그녀와 보내는 이 사소한 시간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꼭 같이 보고 싶었는데, 내 소원이 이루어졌네.”

로아의 웃음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햇살처럼 해사했다. 에이젠은 은목서 꽃이 아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로아의 눈은 앙증맞은 꽃을 향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에이젠이 저에게 가까워지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은목서 꽃?”

자신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느껴졌을 때야 로아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뺨에 입 맞추려 가까이 다가왔던 그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걸 모르고 고개를 휙 돌려버린 탓에 뺨이 아닌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부딪쳤다.

“……아.”

하얗고 보드라운 뺨이 아닌 말랑한 입술에 먼저 다가갔던 에이젠 역시 당황했다. 순조롭게 흘러가던 분위기가 일순 어색해졌다. 그러나 곧 에이젠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아니, 너.”

로아는 깜짝 놀라 토끼눈을 뜨고 깜빡거렸다. 어쩔 줄 몰라서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화젯거리를 찾으려 했다.

“하하, 근데 여기 분위기 너무 고요하고 좋지 않아?”

로아는 그가 오기 전 이 정원에서 잠시 편하게 눈을 붙였다. 숲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전장에서 지쳤을 그가 편히 앉아 명상을 하며 힐링하기에 적합할 듯했다.

“쥬디, 깔고 앉을 만한 것 좀…….”

로아는 하녀 쥬디를 찾다가 그제야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맞다, 쥬디. 아까 왜 안 온 거야?”

“매트를 가지러 올라갔다가 마님께 급한 부탁을 받아서요. 죄송합니다.”

쥬디가 갑자기 사라진 탓에 하마터면 에이젠을 맞이하러 가는 시간에 맞추지 못할 뻔했다. 로아는 그녀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사정이 있었다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알겠어. 됐으니까 얼른 깔고 앉을 만한 것 좀 가져다줘.”

저택으로 들어간 쥬디는 이번에는 빠르게 매트를 준비해 정원으로 돌아왔다. 하녀들이 잔디 동산에 매트를 깔아주자 로아는 자연스럽게 매트 위로 몸을 던졌다. 귀족 가문 영애답지 않은 털털한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건 사용인들이었다. 에이젠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로아의 모든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훑고 있었다.

“잔디 위라서 그런지 엄청 푹신해.”

에이젠은 로아가 민망하지 않도록 그 옆에 함께 누웠다. 로아는 에이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복 안 불편해?”

“괜찮아.”

푹신한 곳에 몸을 누이고,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자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까 졸았는데도 또 잠들 거 같아.”

“눈 좀 붙여. 거의 못 잤다면서.”

에이젠 역시 로아 쪽으로 돌아누웠다. 로아는 반쯤 감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제 눈앞의 에이젠을 한시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한 노력이었다.

“싫어. 에이젠과 시간을 더 즐길 거야.”

에이젠은 씩 웃더니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가 하품을 하듯 호흡을 잠시 멈추었다.

“나도 잠 오는 거 같아.”

“많이 못 잤어?”

“이동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으니까.”

“에이젠이 나보다 더 피곤할 거 같아.”

에이젠은 먼저 눈을 감았다. 로아는 그의 눈 감은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가 저를 본다고 의식하면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었는데, 그가 눈을 감으니 마음껏 볼 수 있어 좋았다.

“같이 낮잠 잘까.”

에이젠이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벌써 그의 목소리는 피로감에 잠겨버린 듯했다. 로아 역시 나른해진 그의 기운에 물들었다. 억지로 뜨고 있는 눈꺼풀에 힘을 풀자 자연히 감겼다.

“그럴까.”

눈을 감자마자 로아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쌔근쌔근, 고르게 내쉬는 그녀의 숨소리에 에이젠은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그는 잠든 로아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혹시라도 자신의 뒤척임에 그녀가 깰까 숨소리마저 죽였다.

변함없이 순수한 영혼을 껴안아주고 싶다. 이미 할 짓 못 할 짓 다 하고 돌아온 더럽혀진 저와는 전혀 다른 영혼. 하나만을 보고 악착같이 살아남은 만큼 그녀를 향한 그의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너무 소중해서 자기 자신도 머리카락 끝 하나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존재. 이제는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었다.

***

만찬의 시간이 되기 전 로아는 방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는 동안 에이젠이 돌아올 날을 상상해봤다. 드디어 혼사를 요청하기 위한 시간일 것이다.

당연히 아버지가 그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아버지의 승낙까지 받아낸다면, 정말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될 것이다. 벨라니스처럼 자라온 영지를 떠나야 할 것이다. 오로지 에이젠 트로네라는 한 사람만을 믿고 그의 뒤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가게 될까.

그는 트로네가를 출가하여 기사가 되었다. 전장에서 그의 아버지와 형이 전사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럼 다시 그 트로네 대공 저로 들어가는 걸까. 하지만 그곳엔 아직 트로네 대공의 부인이었던 마를레나가 있을 것인데…….

‘난 마를레나 부인의 자식이 아닙니다.’

‘마를레나 부인은 나를 인정하지 못해서…….’

유년 시절의 그는 마를레나 부인에게 구박을 받고 지하실에 갇혀 지냈던 것 같았다. 그가 다시 트로네 대공가로 향하면 마를레나 부인과 마찰이 생기진 않을까. 로아는 걱정부터 밀려왔다.

“원만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겠지. 그녀에게 결혼은 설렘과 두려움의 감정이 정확히 절반씩 공존했다.

창밖의 정원을 내려다본 로아는 심란했던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이 정원은 그곳에도 있으니까.”

고향 영지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슷한 느낌의 자연풍경식 정원. 로아는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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