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트로네 대공비
해가 떨어지자 정원에는 어둠만이 가득 찼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계단을 내려왔다. 클라리온 백작의 집무실 근처를 초조하게 맴돌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집무실 건너편에 있는 테라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를 온몸으로 쐬었다. 차가워도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았다.
“아가씨. 공기가 찬데 담요라도 두르세요.”
하녀가 그녀에게 보드라운 담요를 둘러주었다. 조금만 밖으로 나와 있을 뿐이었는데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 앞을 고집하는 이유는 있었다.
달칵.
클라리온 백작의 집무실이 열렸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아버지와 에이젠을 본 로아는 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클라리온 백작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온 에이젠은 추위에 떨며 저를 기다리던 로아를 보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에이젠, 어떻게 됐어?”
두근두근.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의 미소는 정답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의 목소리로 직접 결과를 듣고 싶었다.
“이제 익숙해져야 할 거야.”
로아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 그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응?”
로아는 생뚱맞은 그의 대답에 고개를 기울였다. 에이젠은 그러쥔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하얀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입맞춤 후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디 클라리온이 아닌……,”
“…….”
“트로네 대공 부인으로.”
로아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놀란 듯 입도 떡 벌어졌다. 뒤늦게 손으로 볼품없이 벌려버린 입을 가렸다.
“그럼 우리, 결혼하는 거야?”
에이젠은 로아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지탱했다. 중심을 잃은 로아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의 품 안에 꼭 안겨버린 꼴이었다.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러버릴 뻔한 것을 겨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에이젠은 그녀를 안은 채로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 사이를 지나 테라스로 나왔다. 허리춤 높이의 난간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빛나는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꿈 아닌 거 맞지?”
로아는 아직도 커다래진 눈으로 에이젠을 내려다봤다. 잠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에이젠이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꺼냈다. 로아의 왼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 그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오묘한 빛깔을 뿜는 보석이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레이디?”
더 커질 것도 없는 그녀의 눈이 더욱 커졌다. 멍하게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던 로아는 청혼을 건네는 에이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로, 다정한 눈으로 저를 향하고 있었다. 로아는 그의 얼굴을 바쁘게 훑었다. 당연히 그의 청혼은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고마워.”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너무 감격한 탓에 목이 잠겨든 모양이었다.
“에이젠 트로네 대공님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껴안았다. 세게, 그러면서도 서로가 너무 소중하다는 듯 조금은 다정하게.
“사랑해, 로아.”
귀가 녹아버릴 것처럼, 당장이라도 눈물이 툭 떨어질 것처럼 다정했다.
“나도. 나도 사랑해, 에이젠.”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갑자기 떨어진 두 발에 허공을 휘젓던 로아는 에이젠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에이젠은 로아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로아 역시 그의 어깨를 붙잡고 거리를 둔 채 눈을 마주 봤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행복했다.
로아는 자연스럽게 두 다리로 에이젠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지탱했다.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 위에 직접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키스가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에이젠은 로아의 입술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에이젠.”
로아는 에이젠에게 입술을 물린 채로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물었다.
“안 놔줄 거야. 내 아가씨, 로아.”
“흐흐흐흐흐.”
에이젠은 고집스럽게 로아의 입술을 문 채로 발음을 다 뭉개가며 대답했다. 로아는 우스꽝스러운 말투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에이젠은 로아를 안아든 채로 자연스럽게 응접실로 데려갔다. 클라리온가 일가족들이 침소로 사용하는 곳과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다.
“하아.”
로아의 몸뚱이가 침대 위로 던져지듯 내려왔다. 눕자마자 튕기듯 몸을 일으키려던 로아는 제 앞으로 바짝 다가온 에이젠에 상체를 반도 일으키지 못했다. 두 팔꿈치로 겨우 몸을 지탱한 채였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침소. 창가에서 들어오는 달빛만이 에이젠의 얼굴을 반쯤 비추었다. 빛에 반사된 그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코끝까지 다가온 그의 체취가 로아의 온몸을 감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아무도 없었던 터라 냉기만이 가득했던 응접실은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로 금세 뜨거워졌다.
“흐읏, 에이젠.”
고개 숙인 에이젠은 로아의 쇄골 위로 혀를 할짝였다. 이질적인 감각에 로아가 몸을 움츠러뜨렸다. 그렇다고 피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이 행위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슴이 뛰었다. 이다음은 그의 입술이 무엇을 할지 궁금했다. 그의 손이 어디로 향할지 기대됐다.
아무렇게나 눕혀지면서 슈미즈 끝단이 올라갔다. 로아는 끝자락을 잡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그런 로아의 손을 잡아 저지했다. 그러더니 다른 손으론 슈미즈를 더 위로 걷어내고 그 안으로 스멀스멀 파고들려 했다. 화들짝 놀란 로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이젠과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싫어?”
에이젠은 로아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참 이상했다. 싫으냐 물으면서 그의 목소리는 밀어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으응, 아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싫지 않았다. 그의 손길이 스쳤을 뿐인데, 이상하게 다리 안쪽이 뜨거워졌다. 자꾸만 다리를 오므리고 꾸물거리게 됐다. 달아오른 공기에 취한 건가. 로아는 느긋한 에이젠이 오히려 답답했다.
“그럼 좋아?”
에이젠은 짓궂게도 자꾸만 물었다. 로아는 차마 제 입으로 좋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에이젠을 제외하면 남자 경험도 없으면서 밝히는 여자로 보이긴 싫었다.
에이젠은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앙다문 로아를 내려다봤다. 대답을 회피하는 것만으로 그녀가 어떤 심정을 갖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씩 미소 지은 그는 단단한 팔로 로아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 몸에 더욱 가까이 밀착시켰다.
“아…….”
저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마치 온몸이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로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그의 복근 위로 가져갔다. 옷을 입은 위로도 태가 드러나는 그였기에 한 번쯤은 만져보고 싶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어 얼른 손을 거두었다.
“어때.”
에이젠은 마음대로 흐트러진 로아의 긴 머리카락을 모아 뒤로 넘겼다. 드러난 목선 위로 입술을 가져가 쪽쪽거렸다. 그 여린 살결을 핥아 맛보기도 했으며 잘근잘근 깨물어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기분 좋아. 흐흣.”
로아는 간지러운 감각에 웃음기 섞인 신음을 냈다. 문득 입술을 떼어낸 에이젠이 로아의 어깨를 잡아 바로 눕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어느새 장난기는 사라져 있었다.
그의 눈을 마주 보면 부끄러워서 먼저 피하게 되곤 했다. 그런데 왜 이 순간만은 피하고 싶지 않을까. 그가 좀 더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촉촉해진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 주변에 무거운 적막이 가라앉았다.
“자꾸 그렇게 보면 나 못 참아.”
“참지 마.”
로아는 숨 쉴 틈도 없이 대답했다.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잡았다.
“나도 원해.”
사르르 녹는 듯한 눈웃음을 지었다.
원한다는 로아의 말에 에이젠은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녀가…….
“윽…….”
그의 손길이 예민한 부위를 스쳐 지나갔다. 온몸으로 퍼지는 전율에 로아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예뻐. 소리 내.”
목덜미에 닿는 에이젠의 부드러운 입술과 뜨거운 숨결이 그녀를 더욱 부추겼다.
“그치만 밖에 누가 있을지도…….”
“없어.”
“그걸 에이젠이 어떻게 알아?”
로아는 태평하게 대답하는 에이젠을 향해 앙칼진 눈으로 따졌다. 그러나 그의 손이 여린 살결에 닿았을 때, 다시 아랫입술을 말아 넣어 깨물었다.
손으로는 로아의 몸 곳곳을 탐색하고 있으면서 눈으로는 그녀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따라왔다.
“있어도 상관없어.”
천천히 파고드는 손길에 로아는 온몸을 흠칫거렸다.
“뜨거워, 로아.”
“읏, 그런 말…….”
에이젠은 로아에게 부끄러워할 틈도 주지 않았다.
무자비하게 두 허벅지를 잡아 갈라놓았다. 당황한 로아는 벌어진 모양새를 보다가 잘게 떨리는 눈으로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놀란 로아에 비해 에이젠의 행동은 과감했고 얼굴은 여유로웠다.
“표정 좋네.”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사랑스러워 미치겠어.”
로아는 이번에도 입을 틀어막았다. 밀려드는 자극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