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11)화 (11/107)

11. 영원한 나만의 여자

“부끄러운 말 하지 마.”

“부끄러워하는 거 귀여워.”

에이젠은 로아의 반응을 즐겼다. 로아는 그런 에이젠이 얄미우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나, 당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 혹시 변태 아니야?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하는 걸 즐기는 쪽이라기보단 그저 상대방이 에이젠이라면 뭐든 좋았다.

“더 부끄럽게 해줄 건데.”

에이젠의 미소는 이제 사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로아의 사이로 자리 잡은 그는 몸을 숙여 두 팔 안에 그녀를 가두었다.

로아는 에이젠의 팔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물리적인 힘이 가해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의 붉은 눈동자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아랫입술을 핥아 올렸다. 턱을 누르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유려하게 흘러가던 두 살덩이가 뜨겁게 얽혀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섞여 끈적한 소리를 냈다.

“아아아…….”

키스에만 집중하던 찰나 아래에서부터 쾌감과 고통을 동반한 감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에이젠은 찡그리고 신음하는 로아에게 더욱 깊은 키스를 선사했다.

“하아, 흐응…….”

숨을 몰아쉴 틈도 없이, 그녀의 안으로 그가 침투했다. 로아의 머릿속엔 오로지 에이젠뿐이었다. 이 순간만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온 감각이 그에게 신경을 쏠렸고, 몽롱해진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해, 로아.”

격렬한 몸짓 사이, 황홀한 고백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제 영원히 나만의 여자가 될 로아.”

그의 입술이 이번엔 로아의 이마 위에 촉 맞닿았다. 로아는 미간은 찌푸린 채로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응. 맞아.”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쾌락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고백에 응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에이젠도 영원히 내 거야.”

가느다란 두 팔이 에이젠의 목을 감싸 안았다. 멀찌감치 멀어지려던 그가 다시 로아에게로 이끌려갔다. 코끝이 스치는 간지러움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영광이야, 레이디.”

달콤하기만 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몸짓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흐읏, 흣!”

그의 고백보다 더 달콤한 로아의 목소리가 침소에 울려 퍼졌다.

***

드디어 혼사가 이루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기 전, 대공으로 즉위한 그가 해야 할 일은 꽤 많았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오른 만큼 방문해야 할 영지도, 인사도 많았다.

“다시 수도로 향하는 것입니까?”

“일단은 루크티아 성부터 방문할 예정입니다.”

로아는 그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에이젠 역시 자신의 업무 때문에 결혼을 과도하게 미룰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의 일정들을 소화해낸 다음, 곧장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이제 완전한 관계가 되었다. 잠시만 떨어지는 것뿐인데도 서로를 향한 아쉬움의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곧 데리러 올게, 레이디.”

에이젠은 말에 올라타기 전 마지막으로 로아의 손등과 뺨에 입을 맞추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서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인사를 나누었다. 로아는 마지막으로 그가 돌아가기 위해 망토가 휘날리는 모습조차도 눈에 담으려 했다. 제자리에 서서 점차 성을 빠져나가느라 작아지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허전한 마음은 들었지만, 이제는 그때처럼 생이별을 할 일은 없으니 안심이 됐다.

그녀는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친구 벨라니스에게 전하고 싶었다.

「벨라니스! 너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기쁜 소식이 있어! 이미 대공 각하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정혼자 에이젠이야. 청혼을 받았고 우린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그런데 아직 그에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어. 다음 주중에 네가 사는 영지에 방문하러 갈게. 그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

짧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모두 담은 편지를 고이 접어 봉투에 넣었다.

***

벨라니스는 로아의 방문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녀가 남쪽 영지로 간 이후, 벨라니스를 직접 보러 가는 건 처음이었다. 늘 우울감에 빠져있던 로아는 저택 안에서 손님을 맞이한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만나러 나간 적은 거의 없었다.

오래간만의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할 생각에 긴장되면서 설레기도 했다. 그래도 남쪽 영지는 다녀오려면 왕복 예상 시간이 길기 때문에 곧장 출발해야 에이젠과 시간이 맞을 듯했다.

“로아, 어서 와!”

듣던 대로 남쪽 영지의 햇볕은 뜨거웠다. 로아는 양산을 펼쳐 햇볕을 가리며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벨라니스와 그의 남편 루베른 백작이 함께 입구로 나와 로아를 맞이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베른 백작 부인.”

로아는 제 드레스 끝을 잡고 격식을 차려 인사를 건넸다. 겉으로 보기엔 귀족 가문끼리의 예의 바른 인사였으나,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두 사람에겐 낯간지러운 장난이었다.

“로아 네가 그렇게 부르니 어색하잖아. 우리끼린 편하게 불러도 된다니까.”

벨라니스는 다시 해사한 미소를 되찾은 로아를 보자 덩달아 안심이 됐다.

“우리 영지에서만 특별히 재배되는 차를 준비해드릴게요, 레이디.”

날씨가 좋은 탓에 야외 테라스로 향했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너무 뜨거운 햇볕에 곧 땀이 흐를 것 같았다. 남쪽 영지의 테라스에는 그늘막이 필수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늘 밑으로 들어와 앉으니 그나마 괜찮아졌다. 로아는 뜨거운 영지의 기온에 적응하지 못해 앉자마자 몸을 늘어뜨렸다.

벨라니스는 로아와 달리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조심조심 걸어왔다. 배와 허리를 받친 채로 천천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로아의 눈은 자연스레 벨라니스의 배로 향했다. 늘씬했던 그녀의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벨라니스.”

“응?”

“너 설마…….”

로아는 벨라니스의 얼굴과 배를 번갈아 봤다. 벨라니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려 씩 웃었다.

“아, 눈치챘어?”

벨라니스가 자신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로아는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세상에.”

로아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라니스의 옆으로 가 앉은 그녀가 볼록해진 배를 내려다봤다.

“나도 만져봐도 돼?”

“그럼.”

벨라니스는 로아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 위로 살포시 올렸다. 그러자 배 속에 있던 생명이 반갑게 인사하듯 태동했다.

“어머, 어머. 방금 움직인 거지?”

“엄마와 가장 친한 친구인 걸 알아본 걸까? 널 환영해주나 봐.”

로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배 위에 귀를 갖다 대보았다. 좀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의 태동은 없었다.

“소백작님일까? 아니면 레이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건강하게만 태어나줬으면.”

로아는 행복해하는 벨라니스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얼굴색은 이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임신을 하면 심적으로 힘든 것도 많아지고, 신체도 많이 변한다는데 벨라니스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 같았다.

“로아 너도 머지않았어.”

자신도 벨라니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낯설지만 새롭고 따뜻한 영지. 다정한 남편과의 함께하는 행복한 신혼생활. 그리고 아이를 갖게 된 것까지.

곧 자신도 에이젠과 하게 될 생활이었다. 그와 부부가 될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루베른 백작님은 잘해주셔?”

“임신하고 나서는 굳이 하녀들 시켜도 될 일을 직접 해주고 싶어 한다니까.”

로아는 ‘와’ 하고 감탄의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자신이 임신을 하면 에이젠은 어떨까. 다정한 남자라서 루베른 백작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로아는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어 혼자 피식거렸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마신 벨라니스는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으며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다.

“맞다. 어제 산책 나갔다가 들었는데 성 내에 미래를 점 쳐주는 점성술집이 하나 생겼다나 봐.”

“점성술?”

“응. 나도 그런 걸 봐본 적은 없는데 궁금하긴 하더라고.”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었기에 로아는 딱히 흥미를 갖지 못했다.

“한번 같이 보러 가볼까? 우리 아이 건강하게 잘 태어날지 이런 거 물어보고 싶은데.”

벨라니스는 다가올 미래를 궁금해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로아 역시 궁금해진 게 생겼다. 에이젠과의 결혼 생활은 어떨지, 자신도 벨라니스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지.

“그래. 가보자.”

벨라니스와 로아는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챙이 커다란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썼다. 루베른 백작의 부인이 검증되지 않는 점성술을 보러 다닌다는 소문이 성안에 퍼져봤자 좋을 게 없었다. 저택을 나설 때도 그들은 로아가 타고 온 마차를 타고 함께 이동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성내를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꽤 음습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작고 허술해 보이는 천막 하나가 점성술집을 표시하는 전부였다. 바깥으로 내어놓은 입간판 하나도 없었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였지만, 천막 안쪽은 꽤 북적거렸다. 벨라니스는 모자를 더욱 눌러썼다. 두 사람이 함께 자리에 앉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 안내에 따라 포춘텔러가 기다리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가만히 있는 포춘텔러에게선 포스가 느껴졌다. 그 분위기에 압도당한 로아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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