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죽음에 이를 운명
“어서 오십시오.”
포춘텔러가 있는 곳은 대기했던 곳보다 훨씬 어두웠다.
그녀는 두건으로 시야의 일부를 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거라고 두건 아래로 보이는 하관, 그리고 긴 소매 끝으로 나온 두 손뿐이었다.
로아는 챙 밑으로 포춘텔러의 손을 바라봤다. 적당히 자글자글한 주름이 자리한 게 연식은 제 어머니와 비슷해 보였다. 경력이 꽤 있는 포춘텔러라면 점사가 잘 맞을지도 모른다. 시선을 들어 올려 얼굴 쪽을 흘겼다.
두 사람에게도 포춘텔러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포춘텔러에게도 손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두건으로 시야를 가려 수정 구슬만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서로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 듯했다.
“무엇이 궁금하여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포춘텔러가 수정 구슬 위에 손을 뻗어 부드럽게 문지르며 물었다.
“아이를 가진 지 여섯 달 정도가 되었어요. 이 아이의 성별은 무엇일지,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가 궁금해요.”
벨라니스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그녀의 당돌한 꾀에 포춘텔러는 씩 웃었다.
“성별이라……, 아이가 태어나면 저의 점성술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는 질문이군요.”
그녀는 이번엔 양손으로 수정 구슬을 문질렀다. 무언가 의식을 치르듯 가볍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한동안 수정 구슬 안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대답을 내어놓았다.
“아빠를 닮아 아주 용감하고 멋진 남자아이입니다.”
벨라니스와 로아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매우 기뻐했다. ‘소백작이구나!’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저들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꾹 참아야 했다.
“흠, 그런데 심상치가 않네요. 영지를 다스릴 정도의 권력을 갖게 되는데.”
뜨끔한 벨라니스가 긴 모자의 챙을 황급히 내려 얼굴을 가렸다. 아무리 정체를 감추어도 점술가의 촉은 피해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저를 찾아오신 분의 계급이 평민은 아니신 듯하네요.”
헛기침을 낸 벨라니스는 일부러 목소리를 변조하여 대답했다.
“크흠, 소문 듣고 멀리에서 오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자신이 루베른 성의 백작 부인인 것을 감추기 위해 멀리서 왔다는 거짓 변명을 둘러댔다.
“아닌데. 아주 가까이에 계신 분인데.”
그러나 포춘텔러는 이미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듯 여유롭게 답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포춘텔러는 알면서도 싱긋 웃으며 넘어가 주었다.
“친구분은 무엇이 궁금하여 따라오셨습니까?”
이번엔 벨라니스의 옆에 앉아있던 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히 궁금한 건 없지만…….”
로아는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무엇을 물어야 할지 망설였다.
“곧 결혼할 예정인데, 행복한 신혼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 같은 관계만 잘 유지했으면 좋겠는데.”
곧 결혼한다고 하면 대부분은 행복하게 잘살 거라는 덕담을 할 것이다. 그런 뻔한 대답이라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듯했다.
포춘텔러가 이번에도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수정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흐음…….”
벨라니스가 질문을 했을 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포춘텔러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남편 될 사람이 지위가 아주 높은 사람인데, 친구분께서도 평민은 아닌 것 같으시네요.”
포춘텔러의 추측에 로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지위가, 그냥 높은 게 아닌데요. 전쟁 같은 데서 업적을, 세운……?”
포춘텔러가 혼자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포춘텔러의 목소리가 멈추자 로아 역시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가려진 두건과 넓은 챙 밑으로 두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로아는 얼른 다시 챙을 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포춘텔러 역시 다시 수정 구슬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 결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로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네?”
뒤늦게 그게 무슨 뜻인지 되물었다.
“본래 부부란, 이 기운이 서로에게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자분의 기운이 너무 강해요. 남편이 펼쳐야 할 기운까지 전부 억누를 정도로 강합니다.”
수정 구슬을 쓰다듬던 포춘텔러의 손길이 멈추었다. 부드럽게 리딩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결혼하면 남편 될 사람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숨이 턱 막혔다. 로아는 멍해진 얼굴로 포춘텔러에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이 결혼을 원인으로 죽음에까지 이를 운명으로 보입니다.”
“이, 이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벨라니스는 로아의 눈치를 살피며 포춘텔러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남편 될 사람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군요. 그런 분께서 여자 때문에 운명을 달리하는 건, 국가적인 손해가 매우 크겠어요.”
포춘텔러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남편 될 분을 정말 사랑하신다면, 그리고 제국을 위하고 싶으시다면.”
포춘텔러는 여유롭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결론을 냈다.
“이 결혼을 하지 않으시길 권고드리겠습니다.”
쾅-
벨라니스는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 정신 나간 여자가!”
험한 말이 더 나올 뻔했다. 그러나 점성술로 그녀들의 계급까지 꿰뚫어 본 포춘텔러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벨라니스는 자신이 더 씩씩대며 로아를 일으켰다. 로아는 혼이 나간 얼굴로 천막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부정한 기운이 가득하고 음습한 그곳을 서둘러 떠났다. 마차에 앉은 로아는 여전히 넋을 놓은 얼굴이었다. 사색에 잠긴 복잡한 얼굴로 창밖의 울창한 숲을 내다보기만 했다.
벨라니스는 로아의 기분을 살피다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로아.”
“응? 뭐가?”
“괜히 저런 걸 보러 가자고 해서 여기까지 와서 기분만 망치고.”
로아는 그제야 벨라니스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던 것을 알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아냐, 괜찮아. 어차피 미신 같은 거 안 믿기도 하고.”
로아는 손사래를 쳤다. 기분 상한 게 티가 나면 벨라니스의 마음이 좋지 않을까 봐 억지로 웃어 보였다. 임신한 친구에게 일말의 심려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미신이어도 저런 악담을 듣고 누가 멀쩡할 수 있겠어.”
로아의 웃는 얼굴에 씁쓸함이 담겼다.
“그렇긴 하지.”
대화가 끊겼다. 로아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해진 채로 다시 루베른 백작 저로 돌아왔다. 로아는 만찬을 마친 후 곧장 벨라니스가 준비해준 접대용 방으로 향했다. 루베른 백작은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왔다.
“레이디 클라리온.”
로아는 뒤돌아서기 전 피로해진 얼굴을 감추었다. 애써 밝게 웃으며 돌아봤다.
“네?”
“우리 영지에서 생산되는 산머루로 만든 와인을 대접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그의 손에 와인병이 들려 있었다. 일반적인 와인과는 빛깔이 오묘하게 다른 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정말 맛있는데 마셔 봐. 난 임신해서 함께 마실 순 없지만.”
그러나 로아는 얼른 혼자만의 공간에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장거리 이동을 한 것도 있고 몸이 좀 피곤해서 일찍 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루베른 백작이 머쓱하게 들고 있던 와인을 내려놓았다. 벨라니스가 로아의 앞으로 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쩔 수 없지. 출발하기 전에 가져갈 수 있도록 몇 병 포장해 놓을게.”
“고마워.”
벨라니스와 굿 나잇 인사를 나눈 로아는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로아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가만히 생각해봤다. 6년 전, 트로네 대공 저의 정원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로아는 그다지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에게 무조건 희망적인 말을 건넸었다.
‘음, 에이젠은 키가 크니까 멋진 기사님 어때?’
침울해진 그에게 단순히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의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아무렇게나 건넸던 ‘기사’라는 단어. 그리고 4년 후 나타난 그는 정말로 그녀가 쉽게 던졌던 말을 그대로 수용해 기사가 되어 있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그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을 거야.’
그는 본래도 대공가의 영윤으로 귀족 가문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말대로 기사가 되어 계급을 달리했고, 전쟁의 초반부터 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일 기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리고 참전했던 트로네 대공과 그의 아들 슈카트가 전사하였으니, 그는 굳이 전공을 세우지 않고도 유일하게 남은 트로네 가문의 핏줄로서 대공 작위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아, 자신 때문이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전공을 세우고 살아 돌아왔지만, 자력으로 생존한 것이다. 그를 전장의 문턱까지 내몬 것에는 자신이 일조한 셈이었다.
정말 저 때문에 그의 신변에 위험에 생기는 일이 닥치면 어떡할까.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동시에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별다른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일 없어.”
로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머리는 재미로 본 점사일 뿐이라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귓가에는 자꾸만 포춘텔러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로아는 양손으로 귀를 꽉 막아버렸다. 끈질긴 환청은 로아가 금방 잠들지 못하도록 방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