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왜 나 때문에
로아는 일정보다 이른 시간에 루베른가를 나섰다. 애초에 벨라니스를 만나러 간 건 자신의 가장 기쁜 소식을 친구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뻔한 덕담을 들어도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재미 삼아 보러 간 포춘텔러에게 악담을 들은 로아는 없던 걱정을 사버린 셈이었다.
“아가씨. 성에 도착했습니다.”
“흐음.”
마차 안이라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 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잡념이었다. 무사히 귀가한 로아를 위해 클라리온 백작을 비롯한 가족들이 입구에서 기쁘게 맞아주었다.
“루베른 백작 부인은 잘 만나고 왔니?”
클라리온 백작이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로아는 어두워졌을 안색을 얼른 정비하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네. 그렇게 남단에 있는 영지를 방문한 건 처음이었는데 정말 더웠어요.”
로아는 가족들에게 루베른 성과 영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이 보고 들고 겪은 이야기를 대부분 털어놓았다. 그중에서 루베른 성내의 포춘텔러에 대한 이야기는 제외했다. 로아의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클라리온 백작이 온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로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선물이 도착했던데.”
“선물이요?”
“응접실에 가보렴.”
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에 가보라고 한 것이, 선물이라는 게 물건은 아닌 듯했다. 깜짝 놀라게 할 반가운 손님이라도 찾아온 걸까. 응접실 앞에 다다른 로아는 문손잡이를 잡기 전 잠시 멈칫했다.
그녀가 반가워할 대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벨라니스는 이제 막 얼굴을 보고 올라오는 길이니 아닐 것이고, 그럼…….
끼익- 로아는 불안한 마음으로 응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로아.”
예상대로 에이젠이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듣고도 자리에서 일어나 로아에게 다가왔다.
“어, 언제 왔어?”
안 그래도 오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싱숭생숭했던 터라, 갑작스럽게 그를 만난 게 당황스러웠다.
“방문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와서 미안해. 이동하던 루트 중에 즉흥적으로 들러봤어.”
로아의 앞으로 바투 다가온 그는 굳은 듯 가만히 서 있는 로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더니 하얀 손가락 위에 입을 맞추었다.
“로아가 너무 보고 싶었거든.”
로아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포춘텔러에게 들었던 예언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결혼하면 남편 될 사람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이 결혼을 원인으로 죽음에까지 이를 운명으로 보입니다.’
로아는 에이젠에게 자신의 혼란한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타이밍이 맞아서 다행이네. 하마터면 로아를 보지도 못하고 갈 뻔했어.”
에이젠은 부드러운 로아의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로아는 곧 가야 할 것 같은 뉘앙스로 말하는 에이젠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출발하는데?”
“내일 아침이 되면 바로 가야 해.”
에이젠은 로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여독이 남았을 텐데 얼른 올라가서 쉬어.”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제 막 장거리 이동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에겐 휴식이 절실해 보였다.
그러나 로아는 쉬라는 그의 권유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간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산책이나 하러 갈까?”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에이젠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곤하지 않아?”
걱정스러운 말투와 눈으로 물었다. 로아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다정한 그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내일 당장 에이젠이 가야 한다니 아쉬워서. 조금이라도 같이 시간 보내고 싶어.”
그가 저의 상태를 눈치챌까 봐 억지로 눈을 반으로 접으면서까지 웃어 보였다.
“오늘은 정원 말고 숲으로 나가는 거 어때?”
일부러 아무렇지 않아 보이도록 더 적극적으로 굴었다. 에이젠은 그녀의 미소라면 넘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좋아.”
저택을 나온 두 사람은 성 뒤쪽의 숲으로 향했다. 로아는 어릴 적, 카일론을 따라 이곳에 자주 나왔었다. 푸르른 녹음과 향긋한 풀내음, 쾌적한 공기는 복잡한 마음까지 정화시켜 줄 듯했다.
“아무리 정원을 숲처럼 꾸며놨다지만, 진짜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울창한 숲보다는 못하는 거 같아.”
로아는 긴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쥐어 살짝 들어 올렸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푹신거리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었다. 에이젠은 빠르게 앞장서 걷는 로아의 뒤를 따랐다. 오늘만은 이루지 못한 꿈인 그녀의 호위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밑바닥만 보며 걷는 로아는 위를 보지 못했다. 에이젠은 그녀의 머리에 닿을 정도로 낮게 내려온 잔가지들을 뒤에서 치워주었다.
“나뭇가지가 낮은 것들은 조심해.”
에이젠이 뒤로 바짝 다가오자 로아는 가녀린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깜짝 놀랐다. 에이젠은 로아의 얼굴을 보기 위해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나 로아는 그를 등진 채 얼른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
그를 피하기 위해 조심성 없이 나아가던 로아는 결국 낮은 나뭇가지에 이마를 부딪쳤다. 반동에 의해 잔디밭 위로 철퍼덕 넘어졌다.
“조심하라니까. 괜찮아?”
에이젠이 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로아는 그의 손을 잡지 않고 혼자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으응, 괜찮아.”
더러워진 옷을 탈탈 털고 다시 발걸음을 뗐다. 평소답지 않은 로아의 태도에 에이젠 역시 당혹스러웠다.
“로아.”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던 그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깔렸다. 앞으로 나아가던 로아는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러나 뒤돌아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은 없었다. 에이젠은 그제야 멈춰선 로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혹시 컨디션 안 좋아?”
로아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조금만 있다가 돌아가자. 역시 휴식이 필요할…….”
“에이젠은 나랑 시간 보내는 게 싫어?”
포춘텔러의 말대로 그와 헤어지는 것만이 그를 위한 것일까. 이렇게나 다정하고 저를 좋아해 주는 남자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충돌하면서 어쩔 줄 몰라 삐딱한 태도가 나오고 있었다.
“싫을 리 없잖아. 피곤해 보이는데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거 같아서.”
“괜찮다니까.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래?”
로아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버렸다. 에이젠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더니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화나게 했다면 미안.”
에이젠은 착잡한 얼굴이었지만, 로아를 위해 먼저 굽혔다. 로아는 더없이 자신이 치졸하게 느껴졌다.
“난, 난…….”
무어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루베른 성에서 있었던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또다시 그녀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에이젠은 울먹거리는 로아를 내려다보다 부스럭, 하고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눈동자를 돌렸다.
키가 작은 관목과 함께 잡초가 무성히 자란 숲 쪽에서 난 소리였다. 에이젠은 온 신경을 그쪽으로 몰두했다. 때마침 두 사람 사이로 강풍이 불어닥쳤다.
“그러려던 게 아니라.”
“로아!”
숲에서 부스럭대던 정체가 강풍에 놀랐는지 길 쪽으로 튀어나왔다. 덩치가 꽤 큰 고라니 한 마리였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로아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에이젠은 재빨리 로아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그녀를 보호하듯 품에 안은 채 고라니가 뛰어든 쪽으로 얼른 등을 올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에이젠의 등에 고라니가 부딪쳤다. 반동으로 두 사람이 함께 풀밭으로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에이젠은 로아가 다치지 않도록 그녀의 뒷머리를 꽉 붙들고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바닥으로 쓰러질 때도 얼른 한쪽 손으로 바닥을 짚어, 그녀의 뒤통수가 부딪치지 않도록 보호했다.
“로아, 다친 데 없어?”
상체를 얼른 일으킨 에이젠이 로아부터 살폈다. 로아는 다치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너무 놀라 큰 눈망울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그의 품에서 한참을 멍하게 있던 로아는 에이젠의 한쪽 뺨 긁힌 상처에서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할 때부터 정신을 차렸다.
“에이젠, 피.”
로아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가리켰다. 급격하게 움직이면서 나뭇가지에 긁힌 모양이었다. 에이젠은 손가락으로 뺨을 닦아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바닥을 짚었던 그의 손바닥도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상처 났잖아.”
로아는 얼른 다친 그의 손을 가져가 상처를 확인했다. 워낙에 잔악했던 전장을 겪어온 에이젠에게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정돈 상처도 아니지. 넌 괜찮아?”
“네가 다쳤으면서 왜 나를 걱정해!”
결국은 그녀의 맑디맑은 눈망울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으흑, 흐으윽, 왜 다쳐, 나 때문에 왜 다치냐구…….”
불길한 징조 같았다. 자신 때문에 에이젠이 위험해질 거라는 게 진짜로 이루어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로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에이젠 역시 어안이 벙벙했다. 다치지 않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로아. 무슨 일 있었어?”
다정하게 물었지만 로아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에이젠은 따뜻하게 그녀를 품에 안아주며 서툴게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