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계속해
숲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서 목욕부터 했다.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온 로아는 곧장 에이젠이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숲에서 대공님이 조금 다치셨어. 치료제 좀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쥬디는 비상용 치료제가 담긴 상자를 들고 로아의 뒤를 따랐다.
로아의 기척이 느껴진 에이젠은 그녀가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방문을 열었다.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던 로아가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손을 거두었다.
응접실로 들어오자 쥬디는 상자를 열어 치료제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에이젠의 시선은 로아에게로 향했다.
“로아.”
“응?”
“직접 해줘.”
쥬디는 움직임을 멈추고 로아를 바라봤다. 로아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그의 부탁대로 약상자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할게. 두고 나가 봐.”
쥬디가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방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만이 남은 응접실엔 상자를 뒤적거리는 달그락, 소리만 울렸다.
로아는 소독용 알코올과 솜, 연고까지 꺼내 놓았다. 에이젠의 상처를 가까이서 확인하기 위해 그의 옆에 앉았다. 까진 생채기가 잔뜩 난 손바닥부터 확인했다.
로아는 조용히 꺼내 놓은 것들로 에이젠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알코올이 다친 상처를 닦아낼 때는 따끔거릴 만도 한데 에이젠은 조금도 고통의 신음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버티는 모습이 더 안타까웠다.
전장에서 이보다 더한 상처가 났을 거고, 이보다 더 아픈 치료와 회복을 반복했을 것이다. 로아는 또 마음속 어딘가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뒤에도 욱신거려. 봐야 할 것 같은데.”
“어디?”
에이젠은 예고도 없이 팔을 자신의 등 뒤로 가져가더니 잡아챈 셔츠를 한 번에 끌어당겨 벗었다. 갑자기 여과 없이 드러난 그의 상체에 로아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처음 보는 그의 맨몸에 자꾸만 눈이 갔다. 만져보지 않아도 바위처럼 단단할 것 같은 근육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흘끔거리는 눈길로만 보던 로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의도치 않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등 좀 봐줘.”
에이젠은 몸을 돌려 로아에게 등을 지고 앉았다. 로아는 그의 시선이 닿지 않자,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돌렸다. 숲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길짐승에게 부딪친 그의 등에는 시퍼런 멍이 넓게 퍼져 있었다.
“멍들었어.”
“씻을 때 욱신거리더라.”
“치료제 발라줄게.”
로아는 약을 바르기 위해 그의 등에 좀 더 가까이 앉았다. 손가락에 덜어낸 약을 그의 등 위에 가져가 살살 펴 발랐다.
그녀의 손길이 느껴지자 에이젠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상처에 약간의 압력이 가해지자 따끔한 고통이 따르는 것도 있었지만, 그를 더 불편하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여태 함께 있는데도 잘 참았다고 생각했건만, 제어할 수 없는 부위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다친 저를 치료해주는 그녀에게 불순한 생각을 품었다는 것에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씁, 하…….”
고개를 젖힌 에이젠이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떻게든 조절해보려는 그의 반응을 로아는 다르게 해석했다.
“아파?”
남자라면 당연히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순수한 그녀에겐 미안할 따름이었다.
“괜찮아.”
아랫입술을 꾹 문 채 겨우 대답을 건넸다. 로아가 에이젠 쪽으로 몸을 좀 더 기울였다. 뒷목에서 그녀의 숨결이 간지럽게 닿는 것 같기도 했다.
에이젠은 자신의 입술을 물고 있던 턱의 힘을 풀었다. 더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까는 언성 높여서 미안했어, 에이젠.”
등에 약을 모두 펴 바르고서야 로아는 손을 뗐다.
“나 때문에 에이젠이 다친 게 속상했어.”
에이젠은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로아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돌아보지 못하도록 힘을 꽉 주었다.
“로아 대신 내가 다쳐서 천만다행이지.”
“그런 소리 하지 마.”
로아는 에이젠이 다쳤던 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단 말이야.”
에이젠은 로아의 팔이 닿지 않는 곳까지 몸을 당겼다가 뒤를 돌았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던 로아의 두 팔이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나도 마찬가지야.”
로아는 불안해하는 자신의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얼른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에이젠이 그녀의 두 손목을 붙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네가 다쳤다면 나도 똑같이 소리쳤을 거야.”
로아는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그제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해해. 그러니까 그런 마음 갖지 마.”
가슴이 시큰거릴 정도로 뛰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어리광마저도 어른스럽게 받아주는 그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심장이 아릴 정도로 이렇게 좋은데, 점점 더 좋아하게 될 것만 같은데. 어떻게 그를 놓아야 한단 말인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로아는 속으로 포춘텔러의 예언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얼굴도 치료해 줘야지.”
에이젠은 자신의 뺨에 긁힌 상처를 톡톡 가리켰다.
“……아.”
로아는 상자에 넣었던 연고를 다시 꺼냈다. 등이나 손바닥의 상처와 달리 뺨에 난 것은 아주 작은 생채기였다. 그런데도 잘생긴 얼굴에 흠집이 났다는 게 가장 속상한 상처이기도 했다. 로아는 알코올을 아주 살짝만 묻힌 솜을 동그랗게 뭉쳐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이번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채였다. 로아의 시선은 그의 상처로 향했지만, 에이젠의 시선은 로아의 얼굴 곳곳을 훑고 또 훑었다.
“저, 그렇게 쳐다보면…….”
로아는 그의 뺨을 닦아내던 솜을 거두었다. 가까이서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에이젠은 어쩔 줄 몰라 눈을 굴리던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왜 하다 말아? 계속해.”
슬그머니 몸을 빼내던 로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로아의 가녀린 손목을 그러쥔 채,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봤다. 시간이 멈춘 듯, 어느 쪽도 미동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에이젠이 먼저 그녀의 입술을 물어버렸다.
“읍.”
로아는 손에 쥐고 있던 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에이젠은 단단한 두 팔을 뻗었다. 한쪽 팔은 로아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쪽 팔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그의 품에 완전히 갇혀버린 로아는 허공에 맴돌던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자신의 것과 달리 바위처럼 단단한 것이 잡혔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갈수록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됐다. 말랑하고 단단한 것이 닿으면서 서로가 주는 이질감에 익숙해지려 했다.
조금의 틈도 없는 키스에 로아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팔을 다급하게 툭툭 쳐도 물러서지 않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에, 에이젠, 나 숨 막혀.”
그러나 이미 한 마리의 짐승이 된 에이젠은 그녀의 턱을 잡아 다시 제 쪽으로 돌렸다. 오히려 로아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자신의 뜨거운 숨결과 살덩이를 집어넣었다.
로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곧 질끈 감겼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목마른 사람처럼, 에이젠은 로아의 안을 탐하고 또 탐했다. 맛보면 맛볼수록 끊을 수 없었다. 그의 손길과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읏.”
그의 힘에 밀려난 로아는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잠깐 떨어진 사이 로아가 부족했던 산소를 들이마셨다. 에이젠은 쉴 틈 없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자신의 밑에 반쯤 눈이 풀린 채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쪽으로 피가 쏠리는 게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로아의 분위기까지 야릇하게 변했다. 걷어 올라간 드레스 끝자락에 감추어져 있던 다리가 드러났다. 무언가에 홀려버린 것처럼 로아는 에이젠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그녀도 그를 갈망했다. 눈앞에 형체가 선명히 보이는데, 손만 뻗으면 닿고 끌어안으면 온몸으로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로아는 에이젠이 실물이 아닌 허상인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언제 있었냐는 듯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루베른 성내에 있던 포춘텔러 때문이었다. 괜한 말을 들어서 상한 기분을 달래고 싶었다. 그녀의 말처럼 에이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멀쩡히 저와 함께할 것이라고 증명해주길 바랐다.
“하아…….”
에이젠의 뜨거운 숨결이 로아의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가벼운 차림이었던 로아의 드레스가 힘없이 양쪽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느새 로아의 등 쪽으로 향한 그의 손이 드레스 지퍼를 쭉 내려버렸다.
태를 잃어버린 옷은 유연한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점점 밑으로 향하던 에이젠의 입술은 예민한 정점에 스치듯 닿았다.
“흐읍.”
로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의 눈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로아 역시 질끈 감았던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이젠을 내려다봤다. 생생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지독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아, 에이젠…….”
그의 손은 드레스 끝단을 걷어 그 안으로 미끄러지듯 향했다. 로아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잘게 떨었다. 상체를 세운 에이젠은 로아의 뺨을 감싸더니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로아.”
심장이 떨리다 못해 아려왔다. 육체적 사랑을 나누기 전이면 그는 항상 달콤한 언어의 사랑으로 매료시켰다. 밀어내야 하는 상황에도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다. 로아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