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늘 밤은 같이
드레스의 기장이 점점 짧게 올라갔다. 그 밑으로 드러난 피부는 눈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부드럽고 여린 살결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촉감을 느긋하게 느끼려 했다. 그의 느긋한 움직임에도 로아에겐 더없이 자극적이었다.
“에이젠, 어서, 어서…….”
로아는 에이젠의 손목을 툭툭 치며 재촉했다. 고개를 든 에이젠은 안달 낸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에 그 역시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무릎을 잡아 들어 올리자 앉아있던 로아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탐스럽고 하얀 살덩이를 한입 물어버리려던 순간, 응접실 문 쪽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추었다.
“아가씨. 취침하러 올라가실 시간입니다.”
쥬디의 목소리였다. 잘 흘러가던 분위기를 방해받은 게 맘에 들지 않은 듯 에이젠이 미간을 좁혔다.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칼을 쓸어넘긴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로아 역시 흐트러진 제 옷차림을 추스르며 일으켜 앉았다.
“로아.”
“응?”
에이젠은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눈이었다. 그 매혹적인 붉은 눈으로 로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밤은 같이 있고 싶어.”
에이젠은 로아에게 손을 뻗었다. 누웠다 일어나느라 멋대로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다.
“안 될까.”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로아는 자신의 윗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그녀 역시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듯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망설이던 로아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긴장이 역력했던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젠은 로아를 두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달칵,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있던 쥬디는 로아가 아닌 에이젠이 나온 것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아, 실례하였습니다.”
“그만 가봐.”
“네? 그렇지만 아가씨께서…….”
“새벽에 올려보낼 테니 이번만 눈감아줬으면 하는데.”
쥬디는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녀는 괜히 복도 양쪽을 두리번거렸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한 분위기를 확인하고서야 안심했다.
“저, 그럼 이것만 아가씨께 전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쥬디는 들고 있던 트레이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가씨 앞으로 온 서신입니다. 아가씨는 항상 방에서 서신을 읽고 답신까지 쓰셔서 나오시면 드리려고 했습니다.”
“내가 전해주지.”
쥬디는 에이젠에게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떴다. 에이젠은 그녀에게 서신을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황실?”
달칵.
에이젠이 쥬디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로아, 황실에서 서신이 하나…….”
로아에게로 시선을 돌린 에이젠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가 잠깐 방을 나간 사이 로아는 침대 위에 쓰러져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 만도 할 정도로 그녀의 오늘 하루 일정은 길었다. 남단 영지에서 돌아오자마자 에이젠을 위해 피곤한 시간을 쪼개어 냈다. 거기다 예민한 상태로 감정을 쏟아내기도 했다. 에이젠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로아의 발밑에 뭉쳐진 이불을 끌어 올려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잘 자, 나의 아가씨.”
에이젠은 로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봉긋하게 드러난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을 내려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비록 원하던 걸 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쳤다지만, 그녀의 자는 얼굴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손에 쥐어진 서신 봉투로 눈을 돌렸다.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로아를 확인한 에이젠은 봉투를 슬며시 뜯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자 찢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봉투가 열렸다.
안에 들어있던 카드를 꺼내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카드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하마터면 구겨뜨릴 뻔했다. 다시 손가락에 힘을 푼 그가 허공을 향해 기가 찬 듯한 한숨을 뱉어냈다.
‘후원에 있는 나무 중에 향이 아주 좋은 나무가 있더군. 그 나무의 이름이 궁금했소.’
유다르 디오넬 라 메르페스. 장차 헤이든 제국의 황제가 될 황태자. 에이젠은 황궁에 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으음.”
로아의 방으로 들어온 쥬디는 창가의 커튼을 걷어냈다. 쏟아지는 햇살에 어렴풋이 잠에서 깬 로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방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잠들었던 응접실이 아닌, 자신의 방에서 눈을 떴다. 로아는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에이젠?”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봤지만, 주변에 그는 없었다. 불길한 기분까지 몰려들었다.
“저, 아가씨…….”
두 손을 모은 쥬디가 로아에게로 다가왔다.
“대공 각하께서는 이른 새벽에 출발하셨습니다.”
“뭐? 왜 안 깨웠어?”
로아는 쥬디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쥬디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사실만을 전달했다.
“급하게 출발하시는 거라고, 곤히 잠드신 아가씨는 깨우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로아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에이젠이 유혹하는 얼굴로 함께 있자고 해주었는데 잠들어버렸다. 보낼 땐 밝게 웃어주려 했는데, 그 기회마저 날아갔다. 로아는 자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서신…….”
쥬디는 옆에 놓인 이동식 수납장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로아에게 건넸다. 로아는 그제야 손을 얼굴에서 떼고 서신을 받아들었다.
“어젯밤에 아가씨께 전해드리려 했는데, 대공 각하께서 전해주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가져가셨습니다. 아마도 깜빡하신 거 같아요. 응접실에 그대로 있길래 청소하다가 가져왔습니다.”
로아는 보낸 이를 확인했다. 황실에서 자신의 앞으로 보내온 것이었다. 백작 영애인 자신에게 보낼 말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의 입구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런데 단단하게 봉해져 있어야 할 입구가 다소 헐거웠다.
“혹시 이거 에이젠이 봤어?”
쥬디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로아는 불안한 마음으로 얼른 봉투 안에 든 카드를 꺼냈다.
내용을 읽어 본 로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헤이든 제국의 황태자 유다르 디오넬 라 메르페스. 그가 백작 영애 이상의 귀족 가문에서 정혼자를 찾고 있으니 공평한 기회를 위해 황실 무도회를 주최한다는 내용이었다.
곧장 일어나 나올 채비를 한 그녀가 향한 곳은 가족 식당이었다.
“황실 무도회?”
로아는 들고 있던 초대장 카드를 셰인데릭에게 건넸다. 그의 부인과 함께 가운데에 놓고 내용을 읽어보았다.
“초대장을 받은 백작 이상의 미혼 영애는 필참이라네요.”
백작 부부 역시 로아를 보며 혀를 찼다.
“어떡하죠? 전 곧 결혼할 예정인데.”
로아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 내용을 에이젠이 봤을 거라 생각하니 더더욱 신경 쓰였다.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게 아니니 참석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가…….”
셰인데릭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로아는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죽상이 되었다.
“괜찮을 거야. 제국의 수많은 여인이 황태자 저하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할 텐데, 조용히 있으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겠지.”
“그래. 황실엔 카일론이 있으니, 간 김에 얼굴이라도 보고 오면 좋겠구나.”
백작 부부도 기죽은 딸을 위로했다. 그럼에도 로아는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일로 그와 사이가 틀어지진 않을까 두려웠다.
***
로아는 그 뒤로도 며칠이나 걱정스러운 맘과 혼란스러운 맘이 공존했다. 포춘텔러의 경고대로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보고 마음이 상했으면 어쩌나 걱정됐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이대로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 황태자의 처가 되어 황후가 될 기회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제야 로아는 제 마음에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에이젠이 돌아오기 전, 황실 무도회에 가야 하는 날이 먼저 오고 말았다.
“평소에도 예쁘지만 오늘은 정말 아름답구나.”
마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백작 부인의 아름답다는 칭찬에도 로아는 우울하기만 했다. 오늘은 별로 아름답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다녀올게요.”
“카일론에게 안부 전해주렴.”
“알겠어요.”
가족들과 가벼운 포옹과 비쥬를 나눈 로아는 마차에 올라탔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고이 접고 앉았다. 곧 마차는 출발하고 로아는 창문으로 멀어져가는 가족들을 바라봤다. 마차가 방향을 바꾸고서야 더 이상 가족들과 저택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달빛에 겨우 의존하는 새벽의 울창한 숲. 로아는 창문을 살짝 열어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약간 쌀쌀하긴 했지만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클라리온 백작 저는 수도와 그리 멀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 무렵에 출발하면 다음 날 해가 중천으로 가기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 무도회를 위한 준비를 마친 다음 바로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로아는 수도로 향하는 길에도 오직 에이젠 생각뿐이었다. 분명 가는 길에 트로네 대공 저를 지나치는 구간이 있을 것이다. 그 영지에 대고 소리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달라고.
그러나 이런 로아의 마음은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