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쥬디.”
“네.”
로아는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맞은편에 앉은 쥬디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에이젠이 그 초대장을 본 거 같지?”
쥬디 역시 같은 생각을 했었다. 다만 로아가 상처를 받을까 봐 확답을 함부로 하지 못할 뿐이었다.
“혹시, 화가 나서 나한테 인사도 없이 가버린 건 아닐까.”
“그럴 리가요. 속상하셨을 순 있겠지만, 태자 저하의 명이니 어쩔 수 없는 건 대공 각하님도 이해하실 거예요.”
로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가려진 숲은 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빨리 결혼식을 하고 싶어.”
결혼을 빨리 하고 싶다는 사랑에 빠진 여자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행복한 고민이 아닌, 불안에 덜덜 떠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면 이 불안함이 좀 줄어들까.”
“불안해하실 게 뭐가 있으셔요. 곧 대공 부인이 되실 텐데.”
로아는 다시 쥬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쥬디는 내가 에이젠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럼요. 선남선녀세요.”
반사적으로 나오는 쥬디의 대답에 로아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은 하나도 믿음이 안 간다.”
근심만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나오자 쥬디도 한 시름 놓았다. 그녀는 비교적 편안해진 로아를 좀 더 위로해주고 싶었다.
“아가씨도 전장에 나갔던 대공 각하가 돌아올 때까지 그 어떤 가문의 혼사도 받지 않으셨잖아요. 사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좀 걱정됐거든요. 그 정도 공이면 제국의 황녀까지 하사받을 수 있는 정도의 공인데, 아가씨가 상처받는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하고요.”
로아는 쥬디의 진심 어린 위로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워냈다.
“그런데 두 분의 마음이 통해서 이렇게 이어지게 된 건 분명 운명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걸 믿는 편도 아니었는데, 두 분을 보고 정말 운명이란 게 있구나, 라고 깨달았어요.”
로아는 살풋 웃으며 이제 괜찮다는 얼굴을 지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 구석엔 씁쓸해 보이는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운명.”
여운이 남는 단어였다.
쥬디의 말대로 우리가 운명으로 이어진 관계라면 얼마나 좋을까.
“운명은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거잖아요.”
‘운명’이라는 단어를 되새기던 로아는 또다시 불길한 포춘텔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 결혼을 원인으로 죽음에까지 이를 운명으로 보입니다.’
결혼을 하면 죽게 될 운명.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
***
화려한 막이 올랐다. 제국 각지의 영지에서 올라온 젊은 귀족 영애들은 한껏 화려하게 꾸민 모습으로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내느라 바빴다. 그중에서도 로아는 다른 의미로 눈에 띄었다.
다른 영애들처럼 화려한 치장을 한 것은 같았지만, 기계적으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들과 달리 홀로 울상이 되어 있었다. 가만히 웃고만 있어도 튈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가 사색에 잠겨있기까지 하니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했다.
무도회에 참석한 미혼의 귀족 영식들도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로아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들 사이에서 에이젠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황실 무도회는 초대장을 받은 자만이 참석할 수 있는 곳. 에이젠이 보이지 않는 건, 그는 초대장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로아.”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아는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카일론!”
기다렸던 시간이 왔다. 로아는 이 지루한 곳에서 유일하게 반가운 존재인 카일론을 향해 달려갔다. 카일론이 환하게 웃으며 로아와 포옹을 나누었다.
“오늘은 모두가 바빠서 인사를 나누고 와도 좋다는 허가를 이제야 받았어.”
“잠깐이라도 얼굴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무도회는 어때?”
“신기하고 재밌긴 하지만…….”
애써 웃어 보였지만, 카일론은 로아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았다. 오라버니로서 동생의 기분을 환기시켜주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더니 한 가지 제안이 떠올랐다.
“내가 꾸민 후원 보러 갈래?”
“후원?”
로아는 두 눈에 번쩍이는 생기를 띠었다.
황원 중에서도 후원이란, 가장 비밀스러운 곳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곳이다. 물론 카일론은 정원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기에, 다른 사람보다는 자유롭게 그곳을 출입할 수 있었다.
“잠깐이면 괜찮을 거야.”
카일론이 작게 속닥거렸다. 로아는 그곳에 아무나 출입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 따분한 무도회보다 비밀의 후원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몰래 무도회장을 빠져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모두가 최대한 화려한 곳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날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뒷정원은 가장 한적한 곳이었다.
“역시 카일론의 정원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로아는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환하게 웃었다.
“이리 와봐. 네가 좋아할 만한 게 있어.”
로아는 카일론이 손짓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곳엔 가장 익숙하면서 어딘가 달라 보이는 식재지가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와, 은목서인가?”
“금목서라는 나무야. 황원은 귀족 정원과 차이를 두기 위해 더욱 귀한 식재를 심는 편이거든. 여행 다녔을 때 종자를 구해놓았던 건데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
로아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나무가 풍기는 지긋한 향기를 맡았다. 확실히 은은했던 은목서의 향보다 훨씬 짙고 강한 향이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어둠 속이라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조막만 하게 맺힌 꽃의 색깔도 달랐다. 주황빛을 띠는 금목서의 꽃은 이름과 아주 잘 어울렸다.
카일론은 나무의 향기에 심취한 로아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목에 못 보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붉은 빛깔을 띠는 루비 보석은 어둠 속에서도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막만 한 주황빛 금목서 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빛이 났다.
“로아, 그 목걸이 못 보던 거다?”
“응? 이거?”
로아가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카일론이 목걸이를 묻자 잠시 잊고 있었던 에이젠이 떠올랐다.
“이게 뭐냐면.”
로아는 자신의 정혼자 에이젠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말하는 게 왠지 쑥스러웠다. 수줍음에 뜸을 들이던 차에 뒤쪽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카일론.”
카일론은 돌아보기도 전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잔뜩 긴장한 탓에 몸이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황실 무도회의 주인공인 황태자 유다르 디오넬 라 메르페스. 어느새 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가 후원에 있던 카일론과 로아를 번갈아 봤다.
“나, 나오셨습니까. 저하.”
조경가인 자신은 몰라도, 이 비밀의 후원에 멋대로 타인을 출입시킨 것은 엄연히 황궁의 법을 어긴 것이었다.
고개를 숙였던 카일론이 슬쩍 눈동자를 들어 올려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외로 유다르는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카일론의 옆에서 함께 고개를 숙인 로아였다.
“옆은?”
“아, 제 여동생입니다. 황실 무도회에 초대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올라온 김에 잠깐 인사만 나누러…….”
“그렇지. 카일론도 백작의 자제였으니.”
후원에 멋대로 출입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카일론은 이대로 넘어가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다르는 미소 띤 얼굴로 로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레이디 클라리온. 그대는 이름이 무엇이오?”
로아는 여전히 유다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로아 클라리온이라 하옵니다.”
“로아…….”
유다르가 자신의 입으로 그녀의 이름을 곱씹듯 읊어보았다.
“빛나는 머리카락처럼 아주 아름다운 이름이군.”
로아 역시 예상하지 못한 그의 반응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유다르의 눈과 마주쳤다. 얼른 다시 눈을 내리깔자 유다르는 풋, 하고 웃어버렸다.
“나온 김에 나와 산책을 하는 게 어떻소?”
“네?”
뜻밖의 제안에 로아보다 카일론의 눈이 더 동그랗게 커졌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여동생이 트로네 대공의 정혼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로아가 이 무도회에 참석한 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것을 알 텐데도, 관심을 보인다는 건 꽤 당황스러웠다.
“남매의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만.”
“괜찮습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카일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제국의 황태자고, 원한다면 트로네 대공에게서 로아를 충분히 빼앗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렇지만, 카일론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유다르는 자신의 정혼자를 고르는 데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수많은 귀족 자제와 이웃 제국과 왕국의 황녀나 공주 등 많은 여자가 그의 정혼자 후보가 되었지만, 단순 변덕으로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로아, 그럼 난 이만.”
로아는 카일론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눈인사 정도만 나눈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무도회가 재미없었나.”
“아닙니다. 다만 카일론과 조용한 곳에서 인사를 나누고 싶어서……, 함부로 출입한 것은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괜찮소. 나 또한 그대와 같은 마음으로 이곳으로 나왔지.”
유다르는 로아의 옆에 우직하게 선 금목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금목서를 보고 있었소? 나도 아주 좋아하는 나무지.”
로아는 카일론과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한 채 유다르를 상대해야 했다.
“아, 네. 저희 가문 저택에는 은목서가 많이 있습니다만, 금목서를 실제로 본 건 처음입니다. 워낙에 귀한 식재라 그 차이가 어떤지 궁금했습니다.”
“그래, 직접 보니 차이가 어떤 것 같소?”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 유다르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로아를 빼앗고 새로운 매력을 선사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