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훌륭한 지조를 꺾는 법
로아는 유다르에게서 금목서로 눈을 돌렸다. 어두운 저녁인데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확실히 외관만 봐도 은목서보다 훨씬 화려한 느낌을 풍겼다.
“잎 모양과 크기는 거의 비슷해서 처음엔 몰라볼 뻔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꽃 색깔도 다르고 향기도 훨씬 짙습니다.”
유다르는 금목서를 훑으며 말하는 로아에게 집중했다. 오물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입술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은목서도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 있는 식재라 생각했는데, 금목서는 거기에서 좀 더 발전된 수종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황원에 잘 어울립니다.”
로아가 말을 마치며 다시 유다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다르는 씩 웃으며 금목서와 로아를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식재가 맘에 든다면 그대의 정원에도 선물하고 싶소.”
로아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유다르는 황태자가 내리는 선물을 거절하는 로아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려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금목서는 황원에 훨씬 잘 어울립니다.”
로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다. 유다르는 여전히 그녀가 무어라 변명하는지에 귀를 기울였다.
“값비싸고 귀한 것도 좋지만, 저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준 은목서가 더 좋습니다. 오랜 친구처럼 추억을 공유하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정감이 갑니다.”
귀족 가문 자제인데도 허영심 없이 소박한 것을 즐길 줄 알다니. 유다르에겐 로아가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고, 무엇 하나라도 더 타가기 위해 발버둥 쳤던 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들과 겹쳐지지 않는 모습은 유다르의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했다.
“그대는 꼭 금목서와 닮았군.”
“……네?”
“아름다운 것이 외모뿐만 아니라, 마음씨까지 그렇다는 말이오.”
“아, 아닙니다.”
로아가 고개를 숙여 황송함을 표했다. 유다르는 그녀가 고개를 숙인 사이 한 걸음 더 바짝 다가갔다. 손을 뻗어 탐나는 머릿결을 쓰다듬어보았다.
“거기에 그대에게선 아주 향긋한 향기가 나는 것 같소.”
살랑거리는 손길로 머릿결을 매만졌다. 가볍게 잡힌 머릿결이 부드럽게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에 놀란 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유다르에 한 번 더 놀라 뒤로 살짝 물러났다.
“제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향인 듯합니다.”
로아는 말을 뱉어놓고도 아차 싶었다. 태자 저하의 칭찬에 그저 황송하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의도치 않은 대꾸를 해버리고 말았다.
“……하하.”
그러나 유다르는 오히려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수많은 레이디를 만났지만, 이런 유형의 여자는 처음이었다.
“정말 재미있는 레이디로군.”
유다르는 발걸음을 돌렸다. 로아는 유다르가 걸어가는 길을 종종걸음으로 쫓아갔다. 휘적휘적 거침없이 걷던 그는 뒤에서 저를 바쁘게 쫓아오는 로아의 걸음걸이에 맞춰주기까지 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호위기사들은 평소와 같지 않은 유다르의 행동에 눈치를 주고받았다.
“사실은 그대가 트로네 공의 정혼자라는 걸 알고 있소.”
후원에 가득 찬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유다르였다. 그의 말에 로아는 제자리에 멈춰 서 자동으로 허리를 굽혔다.
“송구하옵니다. 정혼자가 있는데 불구하고 무도회에 참석하여…….”
로아가 멈춰 서자 유다르 역시 멈춰 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알면서도 일부러 초대장을 보낸 것이오.”
유다르의 발언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로아의 머릿속에는 물음표만이 가득 찼다.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매우 궁금했거든.”
허리를 편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가 유다르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저를, 어째서 궁금해하셨습니까?”
유다르는 씩 미소 짓더니 다시 발걸음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멍하게 있던 로아 역시 다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시다시피 트로네 공은 제국에서 훈장을 몇 개나 받았을 정도의 영웅이나 다름없소. 지금 진행되는 제국의 평화를 그가 이끌어낸 격이지.”
곧 자신의 남자가 될 에이젠의 공적을 읊는 말이었다. 로아는 저도 모르게 훌륭한 그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수많은 재산과 영지를 하사받고 또 걸맞은 명예까지 걸쳤소. 그대 같은 백작가의 영애보다 더 명예가 높은 가문 혹은 황녀까지도 하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
수도로 오는 동안 쥬디가 했던 말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출정하기 전 결혼을 약속했던 정혼자를 위해 이를 거부했소.”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었던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자신. 로아는 에이젠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상대 또한 생사도 모르는 그를 계속 기다렸다고 하니…….”
유다르는 다시 한번 발걸음을 멈추고 로아 쪽으로 돌아보았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트로네 공이 집요하게 살아 돌아올 원동력이 되었던 그 상대가 궁금했던 것이오.”
그의 두 눈에 번뜩이는 이채가 띠었다. 로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의 미소에 화답하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런 여자라면 향후 제국의 황후가 되어도 올곧은 심지를 유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로아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업적을 쌓은 그가 간절히 얻고자 하던 것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네?”
로아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여전히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로아의 되물음에 유다르는 온화한 얼굴로 단도직입적인 제안을 건넸다.
“로아 클라리온. 그대와 좀 더 깊은 시간을 가지고 싶소.”
로아는 황당함에 말을 잇지를 못했다.
“오늘 밤, 나와 있어 주겠소?”
그녀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그가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섰다.
로아는 저에게 다가오는 유다르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저의 손길을 피하는 로아에도 유다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로아는 두 사람을 둘러싼 호위기사들을 살폈다. 그들의 시선은 로아에게로 향해 있었다. 앞뒤로 부담스러운 상황에 로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저하. 아뢰옵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는 이미 정혼자가 있는 몸이옵니다.”
두 눈 딱 감고, 그에게 거절의 말을 건넸다.
“혼기가 꽉 찰 때까지 그를 기다렸고, 앞으로도 그를 저버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거절에도 유다르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고개 숙인 그녀를 빤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저하의 명을 거부한 것에는 어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모두 건넸다. 그런데도 로아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는 황태자이다. 태자 저하의 명을 거부한 것은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까지 해석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로아는 지조를 지키고 싶었다.
“흐음.”
유다르는 제 턱을 만지작댔다.
로아는 그제야 앞으로도 황실에서 일해야 하는 카일론이 떠올랐다. 할 말을 전부 내뱉어버리긴 했지만,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카일론에게 피해가 가진 않을까. 뒤늦게 아차 싶은 로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부디, 이 일과 상관없는 카일론에게는…….”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유다르는 로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지금까지 나의 정혼자가 될 후보가 되었던 여자들을 거절하기만 해봤지, 거절을 당해본 적은 처음이라 충격이 크긴 하군.”
“……송구하옵니다.”
“괜찮소. 그대의 지조가 그렇게 쉽게 꺾이진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 그렇다고 황태자인 나의 말까지 거부할 줄은 몰랐지만.”
로아는 몸 둘 바도, 눈 둘 곳도 찾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위해 유다르는 자리를 뜰 채비를 했다.
“그럼 남은 시간을 즐기다 돌아가게. 카일론과 더 시간을 보내도 좋고.”
유다르는 로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잰걸음으로 후원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의 말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넓은 아량으로 그가 에이젠과 자신의 관계를 인정해주었다.
“카일론, 가버렸나?”
두리번거리며 제 오빠를 찾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다시 궁 안으로 들어온 유다르는 아직 창가로 보이는 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더더욱 탐나는구나.”
그는 로아에게 거절당했음에도, 오히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떤 위험 상황에서도 굳은 지조를 지킬 여자야.”
유다르는 뒤를 돌아 자신의 호위기사들을 한 명씩 훑어봤다. 그러더니 그들의 허리춤에 채워진 검으로 눈을 돌렸다.
“저 훌륭한 지조를 꺾어버릴 방법은 아무래도 하나뿐이겠지.”
그의 입가에 악랄한 미소가 번졌다. 그 눈은 로아를 바라보던 온화한 표정과는 달랐다.
***
가기 전에는 죽상으로 출발했던 로아는 원래대로 해사한 미소와 함께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로아가 돌아오기로 한 날, 에이젠도 그녀의 일정에 맞추어 성에 방문했다.
황실 무도회로 가기 전부터, 가서 황태자 유다르와 만나기까지. 로아는 짧은 시간 동안 에이젠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수많은 생각을 했다.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했고,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 되더라도 자신의 짝은 에이젠이기를 바랐다. 목숨까지 위험해지더라도 자신이 그를 위해 허비한 세월을 헛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