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사랑하는 내 남편
포춘텔러의 악담 같은 예언은 더 이상 로아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없었다. 이제 정말로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으니.
“에이젠!”
가족들과 인사를 마친 로아는 저번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에이젠의 품에 뛰어들었다.
“우리 이제 지체하지 말고 결혼 준비하자.”
보란 듯이 증명하고 싶었다. 에이젠이 자신과 결혼해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높은 명예와 재력을 거느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내조할 자신이 있었다.
“로아가 원하는 대로.”
서로를 너무나 오래 기다려왔다. 그랬기에 타이밍이 맞은 지금, 곧바로 결혼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에이젠은 가장 먼저 로아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갔다. 신혼집이 될 곳을 함께 꾸리고 싶었다. 이제부터 그녀를 도울 사용인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쪽은 앞으로 로아를 보필할 하녀 제인.”
“제인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마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로아는 기나긴 세월 자신의 옆을 함께해준 쥬디를 떠올렸다. 제인은 쥬디와 마찬가지로 로아와 나이가 비슷한 또래였다.
“나도 잘 부탁할게, 제인.”
처음으로 일을 시작한 제인은 자신에게 상냥하게 웃어주는 로아를 보며 바짝 긴장했던 것을 풀었다. 그녀의 해사한 미소를 따라 함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택을 모두 둘러본 이후 두 사람은 성내에서 가장 유명한 재단사를 찾아갔다. 그녀만을 위한 웨딩드레스를 맞추었다.
“에이젠, 나 어때?”
로아는 곧 신부가 될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며 여러 벌의 웨딩드레스를 피팅해 보았다. 에이젠은 커튼이 열릴 때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로아의 모습을 보며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
그 어떤 드레스를 입어도 감히 평가를 내릴 수 없었다. 에이젠은 그저 넋 놓고 감탄할 뿐인지라, 드레스를 고르는 데에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본식 때 입을 드레스는 에이젠에겐 아직 안 보여줄 거야.”
로아의 개구진 장난에도 에이젠은 너털웃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하사받은 수많은 보석을 클라리온 백작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값이 높고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반지를 로아에게 예물로 건넸다. 그러나 로아는 그것을 거절했다. 에이젠은 로아에게 거절당한 보석을 클라리온 백작 부인에게 선물했다.
에이젠은 직접 그녀에게 보석들을 보여주며 고를 기회를 주었다. 로아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에이젠의 독촉에 결국은 하나를 골랐다.
그가 처음으로 저에게 선물했던 것과 비슷한 빛깔을 띤 루비 반지였다.
“예물은 이걸로 충분해.”
“왜 그걸 골랐어? 훨씬 좋은 것들이 많은데.”
로아는 씩 웃으며 자신의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를 가리켰다.
“에이젠이 준 루비 목걸이랑 잘 어울리기도 하고.”
이번엔 루비 반지를 낀 손으로 에이젠의 뺨을 어루만졌다.
“에이젠 눈동자랑 닮아서 마음에 들어.”
에이젠은 잠시간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곧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손바닥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조금도 막힘없이 술술 풀리는 것에 로아는 포춘텔러의 악담 따위는 점차 잊어갔다.
흩날리는 컨페티와 만개한 꽃송이들. 그 사이를 함께 걸으며 영원한 부부가 되기로 맹세했다.
로아가 사랑해 마지않는 클라리온 백작 가문의 가족들, 사용인들, 가장 친한 친구인 벨라니스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축하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수도의 각 귀족들과 그들을 동경하는 성민들조차 그들의 결혼에 박수를 보냈다. 전쟁 영웅이 살아 돌아와 정혼자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로맨틱한 이야기는 여러 영지에 퍼졌다.
“사랑해, 로아.”
“나도, 에이젠.”
두 사람은 모두의 축복 속에서 입을 맞추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웨딩드레스와 그 가운데에 영롱하게 빛나는 루비 목걸이와 반지.
그 누구보다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 속, 두 사람은 결국 맺어졌다. 서로를 기다리느라 힘들고 고되었던 시간을 이제는 보상받을 때가 왔다. 달콤한 신혼만이 펼쳐져야 했다.
***
그와의 신혼생활은 예상대로 행복했다. 클라리온가 영지를 떠나면 슬프고 외로울 것 같았지만 그는 훌륭하게 그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흐음.”
“일어났어?”
로아는 뒤척이며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에이젠의 얼굴, 그리고 느껴지는 온기. 사랑을 나누었던 흔적. 로아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행복한 감정이 들었다. 그의 품속을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렸다.
“이제 일어나서 나갈 준비 해야 해.”
“조금만 있다가.”
에이젠은 로아의 어깨를 잡고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로아는 그 가느다란 팔로 에이젠을 꽉 끌어안았다. 에이젠은 푸스스,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밀어내고 드러난 이마 위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여왕 폐하.”
“싫은데…….”
에이젠이 로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봤지만 그녀는 어리광을 멈추지 않았다. 에이젠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그녀의 몸 위로 빙글 올라왔다. 그러더니 자신의 밑에 누운 로아의 새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갔다.
“아, 간지러워.”
여린 살을 물고 핥았다. 장난을 치듯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로아가 입고 있던 실크 가운의 앞섶이 점차 벌어졌다. 에이젠의 입술은 미끄러지듯 밑으로 내려갔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과 혀가 지나갈 때마다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일어날게, 일어날게! 그만!”
감겼던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에이젠의 어깨를 꾹 눌러 밀어냈다. 그제야 에이젠이 옆으로 비켜주었다.
“잘 잤어?”
에이젠은 두 손으로 로아의 양 뺨을 감싸 잡았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로아가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 얼굴에 에이젠의 눈은 꿀이라도 뚝 떨어질 것처럼 사랑스럽게 변했다.
“곧 나가야 하는데 배웅해줘야지. 어서 준비해.”
“알겠어.”
알겠다는 대답에도 비몽사몽한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먼저 씻고 올 테니까 다시 잠들면 안 돼.”
“알았다니까.”
여전히 두 눈은 고이 감고 제 팔을 벤 로아의 대답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에이젠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씻으러 나간 사이 로아는 고요해진 공간에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여전히 공주처럼 누워 잠든 로아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
상체를 숙인 에이젠은 로아의 자는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곤히 잤다.
에이젠의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로아의 뺨에 톡 떨어졌다. 그러나 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다시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몸을 포근하게 덮고 있던 이불을 치워냈다. 그리고 드러난 그녀의 몸 위로 두 손을 가져갔다.
“흣…….”
에이젠은 예민한 손가락 끝으로 로아의 굴곡을 섬세하게 훑었다.
“흐으음…….”
간지러운 감각이 그녀를 현실로 이끌고 있었다.
“이래도 안 일어나?”
그의 손길이 더욱 짙어졌을 때, 눈살을 찌푸리던 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밀어 올렸다.
“흐흣, 에이젠.”
에이젠은 드디어 눈을 뜬 로아에게서 손길을 거두었다. 로아는 에이젠을 향해 씩 미소 짓더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사랑하는 내 남편. 우리 꿈속에서도 만나네.”
로아는 잠에서 깨어나고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계십니까, 레이디.”
고개 숙인 에이젠은 로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축축한 혓바닥이 여린 살결 위를 미끄러졌다.
허리 부근을 매만지던 그의 손이 점점 위를 향해 올라갔다. 풍만한 굴곡 위에 다다라 느릿한 움직임으로 살결의 감각을 느꼈다.
“하, 응, 응, 아…….”
에이젠의 진한 스킨십에 로아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잠에서 깨우려 하는 행위인데도, 로아는 황홀한 전율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흐흣, 아, 기분 좋다.”
본래는 스킨십을 할 때도 수줍음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잠결의 로아는 꽤나 솔직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눈 안 뜨면 여기서 더해버린다.”
에이젠은 잠결의 로아를 과감하게 도발했다.
“응, 해도 돼.”
로아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려드는 아침의 욕망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오히려 아침이라 그런지 모든 게 수월했다. 그가 전해주는 리듬에 맞춰 로아의 긴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 흐트러졌다.
“에, 이젠?”
더는 잠결로 인지할 수 없는 또렷한 감각에 로아는 드디어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뜨자마자 가벼워진 몸이 흩날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동자가 밑으로 향했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로아는 에이젠을 올려다보다 말아쥔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아침부터 무슨 짓이야, 이 짐승!”
그러나 로아의 주먹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려던 말을 다 잇지도 못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온몸이 금세 달아오를 정도로 짜릿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로아가 일어나지 않았잖아.”
에이젠은 상체를 일으켜 앉은 로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정돈해주었다.
“꿈이라고 생각할 땐 잘만 느끼더니 왜 그래.”
드러난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다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흐, 그거야…….”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이성이 있었다면 밀어냈겠지만 그건 조금 부끄러워서일 뿐,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무의식은 저를 갈망하는 에이젠을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