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겉보기와 달리
“아, 에이젠…….”
“이제 완전히 일어났어?”
에이젠은 저의 본능을 받으며 흐느끼는 로아의 눈가와 뺨 위에 몇 번이나 입술을 맞추었다.
품에 안긴 로아의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넘겼다. 그 반동으로 고개를 젖힌 로아는 에이젠과 시선이 맞물렸다.
“그만할까.”
코끝을 스치며 다정하게 물었다. 로아는 눈꼬리에 눈물을 맺혀 놓고도 그만하자는 말에 아무 대답 하지 않았다.
격렬하던 움직임이 잦아들고서야 로아는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싫어.”
아직 부족했다. 로아 역시 남편과 사랑의 행위를 나누는 것을 갈망하는 한 명의 여자였다. 갑작스럽긴 했어도 이대로 흐지부지 끝내는 건 싫었다.
“뭐가 싫다는 거야.”
에이젠은 로아가 무얼 말하는지 알면서도 짓궂은 얼굴로 정확히 되물었다.
“그만두지 말라구…….”
로아는 에이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두 팔로 그의 등을 꽉 끌어안고 놔주지 않으려 힘을 줬다.
그러자 잦아들었던 그의 몸짓이 다시 시작됐다.
“하, 아, 에이젠…….”
로아는 옭아매듯 에이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에이젠이, 아침에 이렇게 깨워주는 거, 읏, 좋아.”
아직 잠이 덜 깨서인지, 아니면 이미 음란했던 속마음을 들켜서인지. 로아는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자극하지 마.”
“하, 아아.”
욕구를 부추기는 듯한 로아의 말에 에이젠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으응, 정말이야.”
로아는 고집스럽게도 제 마음을 고백했다. 제 딴에는 감미로운 분위기라 생각할지언정 에이젠에게는 짐승의 피를 들끓게 하는 자극이었다.
“에이젠이 내 남편이라서 너무 좋아.”
쾌락과 고통이 뒤엉킨 와중에도 로아는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에이젠의 목에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끌어안기도 했다. 로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에이젠은 그녀의 체취를 마음껏 맡았다.
“아침이라서 적당히 절제하려 했는데.”
느른하게 중얼거리는 그는 로아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지금까지보다 배는 강한 자극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졌다.
“윽……!”
“그렇게 예쁜 말 하면 조절이 안 되잖아.”
로아는 고개를 젖히고 달아오른 호흡을 가쁘게 내쉬었다. 온몸이 빠르게 들썩거렸다. 쿵쿵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아, 아아, 에이젠, 제발 그만!”
“그만이 어디 있어. 사람 고삐 풀리게 한 게 누군데.”
로아는 에이젠의 어깨를 밀어보기도 하고 때려보기도 했지만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결국 로아는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기도 했고, 세상이 빙글 돌아 시트 위에 얼굴을 묻기도 했다.
“너무해. 너무해, 에이젠!”
“괜찮아, 로아. 사랑해.”
절륜한 남편과의 시간은 아침저녁 할 것 없이 힘겨웠다.
***
침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분주하게 각자의 준비를 했다. 평소보다 좀 더 늦게까지 자버린 탓에 모든 게 촉박했다. 그럼에도 꼭 에이젠이 저택을 나서기 전 두 사람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급한 와중에도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는 것은 결코 빼먹지 않았다.
“오늘은 뭐 하면서 기다릴 거야?”
“음, 에이젠이 일하고 돌아왔을 때 기분이 좋도록 정원을 가꿀 거야.”
로아다운 대답에 에이젠이 빙긋 웃었다.
“그럼 열심히 해줘.”
“응.”
에이젠은 말에 올라타기 전 마지막으로 로아와 입맞춤을 나누었다. 진한 여운을 남긴 채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로아에게서 손을 뗀 에이젠은 등자에 발을 딛고 단번에 말 위에 올라탔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을 거야. 저녁은 먼저 먹어.”
“어, 왜?”
로아는 눈썹 끝을 늘어뜨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멀리 나가야 할 일이 있어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릴 거야. 그래도 취침 시간 전에는 돌아올게.”
“알겠어. 조심히 다녀와.”
“갈게.”
로아는 그가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몸을 빙글 돌렸다. 아직 아침이라 찌뿌둥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제인!”
“네, 마님.”
저택 안에 있던 제인은 로아의 부름에 곧장 다가왔다.
“카일론이 화초와 묘목으로 쓸 종자를 보내줬던 거 어디에 뒀더라?”
“준비하겠습니다. 어느 부지에 심으면 될지 말씀해주시면 정원사님께…….”
“오늘 같이 정원 꾸며 보자.”
제인은 깜짝 놀라 토끼처럼 커진 눈을 깜빡거렸다.
“마, 마님도 같이하시는 거예요?”
“그럼. 내 유일한 취미야. 못 하게 하면 나 울 거야.”
로아는 야무지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전용 정원사가 따로 있는데도 로아는 정원을 직접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트로네 대공 저로 온 이후 정원을 둘러보러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클라리온 백작 저와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큰 정원이었다.
“확실히 대공 저는 정원도 너무 커. 내가 살았던 곳과는 비교가 안 된다니까.”
모두 둘러보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을 흘려보냈다. 로아는 능숙하게 화단을 꾸밀 부지를 정했다.
“화단은 이만큼 꾸민다 해도 빈 땅이 남네. 저기다 뭘 하면 좋을까?”
조그만 공간도 빈 땅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턱에 손을 올려놓고 고민해보던 로아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텃밭을 가꿔볼까? 토마토 같은 간단한 작물을 키워서 식재료로 쓰는 건 어때?”
제인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성내에서 최고급 식재료를 매일 받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직접 키운 건 다르지. 맛이 없어도 상관없어. 키우는 게 재미잖아. 응? 같이 해보자.”
귀족 가문 영애가 사서 고생을 하는 모습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제인은 반짝거리는 로아의 눈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마님께서 원하신다면.”
“고마워, 제인! 그럼 카일론한테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강한 종자로 보내 달라고 해야겠다. 에이젠도 좋아할 거야.”
로아는 정말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제인은 그런 로아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마님은 정말 주인님을 사랑하시는 게 느껴져요.”
“어?”
제인의 직접적인 말에 로아는 티가 나도록 양 뺨을 붉혔다.
“음, 아무래도 에이젠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니까, 지친 채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예쁜 꽃이라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 같아서.”
다 큰 성인인데도 이렇게 순수할 수 있을까. 로아에게선 사랑을 듬뿍 받고 올곧게 자란 아가씨의 태가 났다.
“에이젠도 어릴 때부터 예쁜 식물들을 좋아했거든. 겉보기와 달리 참 순수하지?”
로아는 에이젠과 처음 만났던 이 트로네 대공 저에서 함께 정원을 구경했던 때를 회상했다.
“그건 그냥 마님이 좋아해서 어울려 준 거 아닐까요?”
“……응?”
로아는 화들짝 놀라며 제인 쪽을 돌아봤다.
“사실 마님이 들어오시고 주인님이 정말 많이 바뀌셨어요.”
제인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추측에 무게를 실었다.
“즉위하신 후에 가문을 재정비하신다며 한바탕 소동이 있었거든요. 숨소리도 함부로 못 낼 정도로 살얼음 같은 분위기였어요.”
제인은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했다. 거침없이 사용인들의 눈앞에 장검을 꺼냈던 에이젠. 그는 아직 바뀐 주인을 적응하지 못한 사용인들이 호칭을 실수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사용인들 입장에서 당혹스러웠던 것도 이해가 가.”
어렸던 에이젠이 마를레나 부인에게 학대당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봤을 그 사용인들. 그들은 에이젠이 마를레나 부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며 알게 모르게 에이젠을 경시하곤 했다.
그런 에이젠이 대공으로 즉위하고서 단 한 명의 사용인도 해고시키지 않았다. 사용인들은 그런 에이젠에게 감사하면서도 불안에 떨었다. 혹시 복수를 계획한 건 아닌지 두려운 감정도 공존했다.
그러던 중에 햇살같이 밝은 로아가 트로네 대공 부인이 된 것은 생명줄 같은 일이었다. 살기를 띠던 그가 따뜻하게 웃을 줄 알게 되었으니 사용인들도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를레나 부인은 어떻게 됐어?”
로아는 에이젠과 결혼하기 전부터 마를레나 부인과 어떻게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바쁜 결혼 준비와 행복한 신혼생활에 그녀의 존재가 없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마를레나 부인의 부재를 느낀 로아가 제인에게 물었다.
“…….”
그러나 제인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로아는 궁금하다는 듯 제 눈을 피하려는 제인을 요리조리 쫓았다.
“스스로 저택에서 나가셨어요.”
제인은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잔악무도한 주인을 유일하게 녹여내는 존재인 아내 로아. 그녀가 에이젠에게 실망할 만한 것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긴, 두 사람이 한 곳에 있기는 서로 불편했을 거야.”
다행히 로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다.
“아무튼, 처음엔 주인님이 너무 무서워서 이 저택에서 계속 일하는 게 맞나 걱정했었는데 마님이 오신 이후로 주인님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서 깜짝 놀랐어요.”
제인은 이 틈을 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렇게 잘 웃고 다정한 분인 줄 전혀 몰랐거든요. 저택의 분위기가 좋아진 건 순전히 마님 덕분이에요. 저뿐만 아니라 사용인들 모두 마님께 감사하고 있답니다.”
로아는 부끄러운 듯 또 한 번 뺨을 붉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