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지극히 개인적인
에이젠은 황제 폐하의 명으로 잠시 황궁에 들렀다. 그곳에서 주어진 업무를 마친 후 다시 반대 방향의 영지를 들러야 했기에 서둘러 황궁을 나왔다.
“결혼 축하하오, 트로네 공.”
궁을 나서 정원으로 나왔을 때 유다르를 마주쳤다. 에이젠은 바쁜 와중에도 그에게 격식을 갖춰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은 내가 바빠서 참석하지 못했소.”
“괜찮습니다.”
“그래, 신혼집은 잘 꾸렸소?”
유다르는 성급하게 출발하고 싶은 에이젠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제 할 말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저택의 정원을 6년 전쯤 카일론이 꾸려놓은 것이라, 와이프가 아주 좋아합니다.”
“흠, 그거 다행이군.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네만.”
에이젠은 평소보다 느긋하게 구는 유다르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말씀하십시오.”
유다르는 손으로 턱을 만지며 ‘흠’ 하는 소리를 길게 내더니 이내 질문을 던졌다.
“공의 모친과 처의 사이는 어떻소?”
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에이젠은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부터 함께 살아야 하는데, 고부 갈등 같은 건 없나 해서.”
에이젠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마를레나 부인은 로아가 들어오기 전부터 대공 저에 없는 사람이었다.
“제국의 대공작에 오른 자네를 뒤늦게나마 알아봤네.”
고부 갈등에 관해 물으면서 뭐가 그리 흥미로운지 유다르의 입가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선대의 적자가 아니던데.”
에이젠은 유다르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유다르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듯 그에게 대답을 추궁하지 않았다.
“21년 전, 대공 저에서 일하던 하녀가 계획도 없이 임신해서 쫓겨났고, 숨어 살면서 아이를 낳았다. 12년 뒤 그 하녀는 소리소문없이 죽고, 아이는 트로네 대공 부부가 거두어 키웠다…….”
유다르는 책 속의 이야기처럼 흥미로운 목소리로 묘사하며 읊었다.
“그게 자네 아닌가? 시기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는데.”
에이젠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어금니에도 힘이 들어갔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차오를 듯한 감정을 억누른 그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맞습니다. 생모는 평민이셨습니다.”
유다르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런데 마를레나 트로네, 그녀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리가 들리더군.”
유다르는 에이젠이 자신을 서자라고 인정하는 대답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나?”
다시 마를레나로 화제가 돌아오자 에이젠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으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즉위하여 성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전쟁에서 잃고, 첩의 자식이 대공으로 즉위하기 전에 스스로 가출했다?”
“그런 듯합니다.”
그녀는 이미 없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후 만난 적도 없다. 그래야만 한다. 황태자 저하에게 거짓을 고하는 그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음, 이거 큰일이군.”
유다르는 곤란한 듯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 마를레나 트로네, 선대 황제 폐하의 황녀였던 것은 알고 있었나? 나한테는 고모 정도 되는 사람이지.”
에이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출신 따위를 갇혀 지내기만 했던 에이젠이 알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를 만난 건 열두 살 때였고, 기사가 되겠다고 출가를 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겸상을 해본 적 없었다.
마를레나에게 지독한 학대를 받아왔던 에이젠은 그녀에게 악감정만 깊게 품었을 뿐, 그녀의 출신 따위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얼핏 들었다 할지언정 아마 금방 잊어버렸을 것이다.
“물론 후궁의 황녀라지만, 황제 폐하께서도 그녀를 애타게 찾고 있소. 아무튼 황실과 관련된 사람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는 건 대외적으로도 좋지 않으니까.”
유다르는 빠르게 에이젠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분명 이와 관련된 약점 하나쯤은 잡아낼 수 있어 보였다.
“그녀를 꼭 찾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나?”
유다르의 제안에 에이젠은 고개를 숙였다.
“태자 저하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자세한 건 다음에 제대로 자리를 마련해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지.”
유다르는 먼저 발걸음을 돌려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황족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황족들은 모두 시간에 맞춰 도착해 있었다. 유다르는 예기치 않게 에이젠과 대화를 하느라 정해진 시간보다 더 늦게 식당에 입장했다. 따가운 눈총이 그를 향했지만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고고한 자태로 제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들지.”
황제 폐하의 말과 함께 황족들이 식기를 들었다.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다르는 입을 열었다.
“에이젠 트로네 공. 그는 트로네 대공가의 적자가 아닌 대공 저에서 일하던 하녀에게서 태어난 서자였습니다.”
선대 트로네 대공이 의도적으로 숨겼던 터라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유다르는 어떻게든 에이젠의 약점을 잡아내기 위해 그를 뒷조사하였고, 알아낸 사실을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식사 중에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유다르에게 곱지만은 않은 시선이 쏠렸다.
“우리 헤이든 제국의 대공작 자리에 오른 자의 출신이 이리 미천해서 되겠습니까?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자, 황제 폐하를 기만한…….”
“유다르.”
황제가 들던 식기를 그릇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묵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모두들 음식을 먹던 것을 멈추었다.
“그는 위기에 빠질 뻔한 헤이든에 평화를 되찾아준 제국의 영웅이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 제국의 백성들이 영지를 빼앗기고 인력이고 재물이고 전부 전리품이 되었을 것이다.”
유다르는 에이젠을 옹호하는 듯한 황제의 말에 멍해져 버렸다.
“단순하게 대공가의 자제이기에 대공으로 즉위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목숨을 살렸고, 값을 매길 수 없는 제국의 보물과 유산을 지켰고, 우리 제국 자체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를 함부로 모함하는 것은 제국의 황태자라도 쉽게 용납할 수 없다.”
할 말을 마친 황제는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유다르는 테이블 밑으로 꽉 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저도 황제 폐하의 말씀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유다르의 시선은 자신의 건너편에 앉아 오만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황자 오필리안에게 향했다.
“……오필리안.”
유다르는 건방진 동생을 향해 살기 어린 눈을 띠었다. 그러나 오필리안은 조금도 꿈쩍하지 않고 제 의견을 더욱 피력했다.
“백성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한 나라를 살린 트로네 공의 출신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오필리안은 유다르의 눈을 똑바로 보며 할 말을 전했다. 그의 말엔 다른 뜻도 내포되어 있었다. 황태자로서 당신의 입지는 이미 줄어들었다고.
유다르는 태클을 건 사람이 오필리안이라서 더욱 부들거렸다. 그는 평소에도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넘보며 황제와 저를 이간질해댔었다.
유다르의 위협적인 눈에도 오필리안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찮다는 눈빛과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려 비소를 흘렸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제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전쟁까지 일으킨 형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시선을 거둔 그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갔다.
“트로네 공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황제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마를레나를 수색 중인 건 어떻게 됐지?”
뒤에 서서 그를 보필하던 자작이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수도 주변의 영지들은 샅샅이 뒤졌으나 아직까진 별다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흠.”
황제는 보고 내용이 바라던 것이 아니자, 사색에 잠긴 듯 미간을 좁혔다. 그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유다르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씨익 올라갔다.
“폐하.”
황제는 여전히 못 미더운 눈으로 저를 부르는 유다르에게 눈을 돌렸다.
“마를레나의 실종 수색 건의 수사는 이제부터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유다르의 목소리는 꽤 자신만만한 투였다.
“유다르 네가?”
황제는 놀란 듯 커다래진 눈으로 되물었다.
“오는 길에 트로네 공을 마주쳤습니다. 그가 도와준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위풍당당한 기세로 자신하는 유다르를 보며 오필리안은 또다시 비웃음 소리를 냈다.
“자기 생모도 아닌 사람을 찾는 걸 도우면 얼마나 돕는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차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다르는 오만한 황자 오필리안이 아무것도 몰라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의 목표는 정말로 마를레나를 찾아내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에이젠이 죽여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그녀의 시신을 찾고 싶었다. 만일 그녀가 살아있다면 자신이 죽여서라도 에이젠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울 계획까지 있었다.
대공작 에이젠 트로네가 황실 관계자인 마를레나를 해했다. 그거라면 전쟁 영웅으로서 만백성에게 칭송받는 그를 처형대에 올릴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역적의 반역 행위가 더욱 커지기 전에 수면 위로 끌어내고, 자신은 공을 인정받는다. 완벽한 계략을 꿈꾸는 유다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부터 당장 적극 수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