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21)화 (21/107)

21. 우연이기를

로아는 사용인들과 함께 화단을 가꾼 후 저택으로 들어왔다. 본래 살던 영지보다 북부지역이라 그런지 오랫동안 야외에 머물러도 그리 덥지 않았다. 잠깐만 밖에 있어도 뜨거운 뙤약볕에 땀이 줄줄 흐르던 루베른 백작가와 상반되는 기온이었다.

“마님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온 로아는 하녀가 건네는 서신 한 통을 받았다. 마침 벨라니스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온 편지였다.

“오, 벨라니스구나. 이곳에서 벨라니스의 서신을 받은 건 처음이라 신기한걸.”

“마님. 목욕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로아는 서신을 방에 갖다 놓은 후 욕실로 향했다. 목욕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벨라니스의 서신부터 찾았다. 하녀들이 젖은 그녀의 머리를 말리고 빗겨주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봉투를 뜯었다.

로아는 편지의 첫 줄을 읽자마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세상에. 내 친구 벨라니스가 임신을 했었는데 순산을 했대! 아이도 산모도 모두 건강하대!”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제인이 빙긋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로아는 입꼬리를 내릴 새도 없이 그다음 내용을 줄줄 읽어갔다.

출산 예정일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태어나서 준비가 미흡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출산을 마쳤다는 내용이었다.

이제는 로아가 북부 영지로 떠나버린 탓에 두 사람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그래도 시간이 나면 꼭 아이를 보러 와달라는 말도 있었다.

“너무 좋겠다.”

로아는 한없이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도 곧 에이젠의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졌다. 뿌듯한 미소로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로아는 어느 한 구간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도, 편지지를 쥔 손도 미세하게 떨려왔다.

“마님? 괜찮으세요?”

로아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제인이 빗질하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불렀다. 로아는 읽고 있던 편지지를 재빠르게 접어버렸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할 일을 모두 마친 사용인들이 그녀의 휴식을 위해 방에서 나갔다. 로아는 그들이 나가고도 앉아있던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한동안 넋 놓고 있던 그녀의 손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읽다 만 편지지를 다시 펼쳤다.

「아기 소백작님의 이름은 도미닉이야. 다음에 직접 와서 이름을 불러줘.」

로아는 자신이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다시 한번 눈을 비비고 확인했다.

“……소백작.”

행복한 시간을 보내느라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 아이의 성별은 무엇일지,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가 궁금해요.’

‘성별이라……, 아이가 태어나면 저의 점성술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는 질문이군요.’

자신에게 악담과도 같은 예언을 했던 점성술사. 그녀가 벨라니스에 대해 예언한 것이 맞아버렸다.

“아냐, 그냥, 우연일지도 모르잖아.”

로아는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성별이란 건 50대 50의 확률이다. 우연히 찍어서 맞힐 확률도 절대 낮지 않았다. 그렇게 부정해보려 했지만 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애써 외면해왔던 사실이 다시 그녀를 휩싸기 시작했다. 밀어두었던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어떡, 어떡하지. 어떻게…….”

갑자기 불어닥친 두려움에 로아는 눈물을 툭툭 떨어뜨렸다.

만일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점성술사가 벨라니스의 미래를 정확히 보고 맞힌 거라면? 그러면 그녀의 충고를 무시하고 에이젠과 결혼을 강행했던 자신에게 닥칠 미래는…….

‘이 결혼을 원인으로 죽음에까지 이를 운명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또 귓가에 아른거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일었다.

“아냐,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말로는 자신을 다독였지만 흐르는 눈물과 떨리는 온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벌써 해가 떨어지고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빨리 그를 보고 싶었다. 그가 무사히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보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을 거야.’

하필이면 오늘은 그가 집을 나서기 전 평소보다 늦을 거라고 말했다. 로아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고 괴로울 정도로 불안한 감정을 토해냈다.

***

그를 기다리는 반나절이 체감상으로는 며칠이 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로아는 취침할 준비를 모두 마치고도 돌아오지 않는 에이젠에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왜 아직 안 오지?”

이불을 들춰내고 일어난 그녀가 침실 밖으로 나왔다. 로비에서 새벽 일을 하고 있던 제인이 로아를 발견하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님, 안 주무셨어요?”

“응. 에이젠은 아직 안 왔지?”

제인은 로아가 원하던 대답을 내어줄 수 없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죄책감을 느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네. 저희도 기다리는 중입니다.”

로아는 낮은 한숨을 뱉어냈다. 로비로 나온 그녀가 테라스 쪽으로 걸어왔다.

“커튼 전부 걷어줘.”

사용인들이 벽 전체를 채운 거대한 커튼을 걷어냈다. 바깥엔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정원만이 가득했다. 로아는 안락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깥만 주시했다.

“밖은 추운데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심이…….”

“괜찮아. 여기서 기다릴래.”

로아의 단호한 대답에 제인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잠시 방에 다녀온 그녀가 보드라운 담요를 가지고 와 로아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지?”

로아는 초조한 마음에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갔다. 제인은 그녀의 손톱에 이미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로아의 손목을 잡아 내려주자 깜짝 놀라며 제인을 올려다봤다.

“미안, 제인.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거 같지? 일하다 보면 예정보다 늦어지고 그럴 날도 있을 텐데.”

“아니에요, 이해해요. 주인님은 항상 마님을 기다리지 않게 하려고 서둘러 돌아오시곤 하셨으니까요.”

제인의 온기가 닿자 그나마 안심이 된 건지 떨림을 멈추었다. 제인은 한참이나 로아의 옆을 지켰다. 새벽이 깊어질 무렵 집사 리예드가 제인의 앞으로 걸어왔다.

“저, 마님.”

그의 부름에 로아는 담요를 떨어뜨릴 정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이젠 왔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손님이 오신 거 같습니다.”

로아는 금방 맥이 풀렸다. 의아한 듯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리다가 자신이 들은 것을 되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손님이요?”

리예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찾아온 손님을 밝혔다.

“황실수사단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네?”

로아는 예상치도 못한 손님의 등장에 어쩔 줄을 몰랐다. 얼른 제인과 함께 방으로 올라가 손님을 맞이할 옷으로 갈아입었다. 기온이 찬 새벽에 그들을 맞으러 나왔다. 중무장한 채로 몰려온 황실수사단의 모습에 덜컥 겁을 먹었다.

“늦은 시간에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부인.”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신 걸까요? 대공님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는데.”

수사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그녀에게 몇 장의 서류를 건넸다. 자신들이 정말로 황실에서 파견하여 나온 자들임을 증명하는 서류와 조사허가서였다.

“실종된 대공의 어머니인 마를레나 트로네를 찾고 있습니다. 그녀의 행방을 마지막으로 봤을 트로네가의 사용인들을 인터뷰하러 온 겁니다.”

“아…….”

로아는 자신이 협조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이 대공 저에 들어왔을 땐 이미 마를레나 부인은 사라진 후였다. 로아는 낮에 제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즉위하고 대공 저로 돌아오기 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고.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별일 없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로아와 달리 사용인들은 모조리 사색이 되었다. 사전에 방문 통보도 없었던 터라, 그들은 입을 맞출 시간조차 없었다.

사전 협의도 없이 이 많은 사용인들이 다 함께 주인을 감싸는 진술을 할 수 있을까. 미지수였다. 만일 진술이 갈린다면 거짓 진술을 한 사용인을 특정해낼 것이고, 황실에서 파견한 수사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지만, 각자의 마음이 전달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트로네 부인.”

“네?”

수사단장은 안으로 들어서려는 로아를 불러세웠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황궁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제가 황궁에요? 갑자기 왜……?”

“사용인들을 인터뷰할 동안에는 부인을 분리해놓기 위함입니다. 본래는 다른 곳으로 보내드려야 하는데 태자 저하께서 황궁으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로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에 있는 사용인들을 둘러봤다. 모든 사용인이 하나같이 그녀의 눈을 피했다.

“알겠어요. 협조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십시오.”

“혹시 남편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수사 때문에 집에 돌아오지 않은 건가요?”

로아의 질문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수사단장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곧장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로아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에이젠 트로네 공은…….”

수사단장이 이내 입을 열었다. 로아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내밀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황실 반역도모 혐의와 위증 혐의로 조사받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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