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22)화 (22/107)

22. 본성이 잔악한 전쟁광

로아는 수사단장의 말에 넋을 놓아버렸다. 그녀가 무어라고 질문을 건네보려 했으나, 입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버버하는 동안 양팔을 붙잡힌 그녀가 마차에 태워졌다. 그녀를 케어해줄 사용인이 한 명도 동행하지 않은 채로 마차는 출발했다.

“왜, 왜지? 이게 무슨…….”

뒤늦게 이게 무슨 일인지, 어떻게 된 건지 묻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자신의 저택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새벽을 꼬박 달려 수도로 향했다.

황궁의 귀빈실로 안내받은 로아는 더더욱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다녔다. 누명이 됐든 뭐든 에이젠은 죄인의 신분이라고 했다. 그의 아내인 자신 역시 추궁당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화려하게 준비된 귀빈실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해서도 멍하게 있던 로아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귀빈실의 문이 열렸다. 황실 무도회에서 딱 한 번 본 적 있는 황태자 유다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로아는 그를 잔뜩 경계했다. 겉으로는 격식을 차려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긴장한 그녀의 얼굴은 조금도 거짓 미소를 지어내지 못했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클라리온가에 가있으면 되는데 어째서 저를 황궁까지 불러주신 겁니까.”

“일단은 먼 길 왔을 테니 여기 앉도록 하게.”

유다르는 불안하게 묻는 로아의 말은 가뿐히 무시하고 느긋하게 굴었다.

“……지금 제 남편은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 놀라서, 그리고 너무 다급해서 오히려 차분하고 덤덤한 투가 되었다.

“저는 아무 설명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가 황실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니, 자세한 정황을 듣고 싶습니다.”

유다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내는 로아를 보며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선대 트로네 공의 본처였던 마를레나 트로네. 그녀는 선대 황제와 후궁의 황녀였소.”

그녀의 앞에 마주 보고 앉은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로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뒤로 빼냈다.

“에이젠 트로네 공이 그녀를 죽인 것 같소.”

“그게 무슨…….”

로아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겁을 먹은 그녀의 모습에도 유다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소?”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다시 뒤로 편하게 기댄 그가 아무렇지 않은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엄연한 황실에 대한 반역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로아는 단호하게 그의 추측에 부정했다. 유다르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로아에 불편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남편이 그랬을 리 없습니다.”

로아는 황태자인 유다르의 앞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를 변호했다.

“그럼 부인은 마를레나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알고 있소?”

그 해답은 로아가 알 리 없었다.

에이젠은 어릴 적 마를레나 부인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는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젠이 대공으로 즉위한 후 트로네가로 돌아오자마자 사라진 마를레나 부인. 로아는 그녀의 부재를 미리 알아채고 에이젠에게 묻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제인 역시 그녀가 스스로 저택을 나갔다고 말했다. 이제 와서 진술을 번복한 건 전부 다 모함 같았다.

“온 제국의 영토를 이 잡듯 뒤져도 그녀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소.”

로아는 자신의 추측에 자신감을 잃어갔다. 아직 에이젠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진실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답답할 뿐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밖에는 설명할 게 없지 않겠소?”

유다르의 비아냥거림에 로아는 테이블 밑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반드시 있다. 머리를 잘 굴리고 대답을 잘하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시신은 찾았습니까?”

로아의 물음에 유다르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표정 한구석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어금니를 꽉 깨문 로아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직.”

정황이야 어찌 됐든 시신이 나오지 않으면 결국은 아직 실종 상태인 것이다. 자신감을 가진 로아는 유다르에게 절대 밀려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를레나 부인이 죽었다는 증거도 없는데 어찌 이렇게 막무가내로 죄목을 뒤집어씌우는지요.”

유다르는 제법이라는 듯 로아를 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많이 남아있었다.

“공은 황태자인 나에게 감히 거짓을 고하였소.”

황실법상 거짓을 고했다는 것만으로도 반역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공으로 즉위하고 트로네가에 돌아왔을 때, 이미 마를레나는 집을 나가고 없었다고 말했지.”

“그건 거짓이 아닙니다.”

로아는 자신 있게 유다르의 말을 부정했다. 왜냐하면 제인 역시 그렇게 말했으니까. 분명 트로네가의 사용인들이 에이젠의 억울함을 풀어줄 진술을 해줄 것이다. 로아는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아니, 전부 거짓으로 드러났어. 모든 것을 지켜본 트로네가의 사용인들이 방금 진술했거든.”

로아는 유다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젠 트로네가 장검으로 마를레나를 위협하며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며 내쫓아내 버렸다는 것을. 그 뒤로 쫓아가서 죽였을지 묻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닌가?”

로아는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황태자 앞에서 화가 난 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높아진 언성을 자신의 귀로 듣고 나서야 아차 싶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유다르의 뒤에 서있던 호위 기사들이 그녀에게 다가서려 했다. 그러나 유다르는 손짓으로 기사들을 막았다. 로아의 무례한 태도에도 그저 미소 지을 뿐, 별다른 경고를 하지 않았다.

“자네가 그 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지?”

로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자네에겐 얼마나 다정하고 잘해줬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제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에서 몇 명이나 무고한 목숨을 죽인 자일세.”

그의 말대로 로아는 저에게 다정한 모습만 보이던 그의 본래 모습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즉위하신 후에 가문을 재정비하신다며 한바탕 소동이 있었거든요. 숨소리도 함부로 못 낼 정도로 살얼음 같은 분위기였어요.’

‘처음엔 주인님이 너무 무서워서 이 저택에서 계속 일하는 게 맞나 걱정했었는데 마님이 오신 이후로 주인님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서 깜짝 놀랐어요.’

제인이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오기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에이젠. 그는 정말 잔악무도한 사람이었을까. 혼란이 찾아왔다.

“트로네 공은 자네 환상만큼 인간다운 자가 아니라는 거지.”

유다르는 로아의 혼란에 쐐기를 박았다.

“내가 자네를 황궁으로 부른 이유가 있지.”

유다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로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트로네 공이 마를레나를 해하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처벌에 경중은 달라질 수 있어도 그는 대공 직위를 박탈당하고 처벌받을 것이다.”

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꽉 쥐었던 주먹이 미세하게 떨렸다. 유다르는 그런 그녀의 떨림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반역 혐의가 유죄로 판결이 나온다면 제국 최고형을 선고받게 될 거야.”

최고형. 로아는 상상만으로 끔찍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사를 지켜온 트로네라는 가문 자체가 박살이 날 거고, 이미 그자와 결혼을 올린 자네 역시 피해갈 수 없어. 자네의 친정인 클라리온가도 마찬가지고.”

유다르는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로아의 긴 머리칼을 장난치듯 빙빙 돌렸다. 좀 더 다가가 귓가에 대고 비밀스럽게 속닥거렸다.

“가여운 자네를 황태자인 내가 구제해주고 싶어 이곳으로 불렀네.”

로아는 뒤로 살짝 물러난 채 고개를 들었다. 눈에 경계를 바짝 세운 채 유다르를 올려다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의 반역도모죄가 성립하기 전에 관계를 정리해.”

이해할 수 없는 제안에 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혼,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황태자비가 되어라.”

더더욱 의미 모를 제안이 내어졌다.

“그게 너와 클라리온가가 이 반역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어찌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로아는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유다르는 살풋 웃으며 그녀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트로네 공과 클라리온 백작 영애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는 이제 제국에서 모르는 자가 없지.”

날을 세운 로아와 달리 유다르는 천하태평한 모습을 유지했다.

“자네는 본성이 잔악한 전쟁광에게 속은 순진한 여자고, 난 가여운 자네를 구원해준 아량 넓은 황태자가 되는 거지.”

유다르는 만족스러운 듯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로아는 그를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더는 대꾸할 힘도 없었다. 귓가에 또다시 포춘텔러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그가 죽을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저주 같은 예언.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도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그녀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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