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23)화 (23/107)

23. 절벽에 핀 꽃

“어떻느냐. 너도 내 손을 잡고 싶어졌느냐.”

깔깔대던 유다르가 겨우 웃음을 멎은 채 로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로아는 유다르가 저를 향해 뻗은 손에서 더 물러났다.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한 로아의 대답에 유다르는 심기가 불편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정도로 겁을 줬으면 생각을 바꿀 만도 했다. 그러나 로아는 자신의 가족을 건드는 발언에도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유지했다.

“남편 가는 곳에 아내도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여유롭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기까지 했다. 그와 반대로 유다르는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아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내 남편이 반역자라면 저도 함께 가두세요.”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존재하지 않는 법. 로아는 유다르가 저에게 베푼 호의마저 내쳤다. 그에게 특별 대우를 받으며 다른 이들까지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언젠가 빠져나갈 구멍조차 사라져버릴 테니까.

차라리 혐의를 의심받는 남편을 따라 구치되는 게 나았다.

“하하.”

유다르는 바싹 고정된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더욱 깔끔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착잡한 그의 심경이 담긴 움직임에도 로아는 전혀 눈치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완강히 거부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분노가 피어오르던 것도 잠시, 유다르는 저를 밀어내는 여자 로아에게 더욱이 호기심을 느꼈다. 황태자인 자신을 감히 거절하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무슨 심보인지는 몰라도 그녀를 향한 소유욕이 더욱 짙어졌다. 잡기 어려운 먹잇감일수록 집요하게 쓰러뜨리고 싶은 그런 심리인 듯했다.

“순순히 내 말을 따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네.”

유다르는 단숨에 로아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로아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유다르는 잽싸게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 꽉 붙잡힌 손아귀의 힘을 이기지 못한 로아의 고개가 유다르에게로 돌아왔다. 코끝이 스칠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자네는 감히 황태자인 내 청혼을 거절했지. 그때부터 봐주고 있었더니 설설 기어오르는군그래.”

로아는 아랫입술을 말아 넣고 숨을 흡, 참아버렸다.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나 로아의 턱을 움켜쥔 유다르는 그럴 때마다 힘을 더 꽉 주었다.

그녀의 맑디맑은 푸른 눈동자가 저를 볼 때까지 고통을 주었다. 끝내 힘을 버티지 못한 로아가 감았던 눈을 치켜떴다. 그제야 유다르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말아 올라갔다.

“절벽에 핀 꽃이야말로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꺾고 싶은 법이지.”

그렇게 어렵게 품에 안게 되었을 땐, 얼마나 큰 성취감과 환희를 느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속에서부터 짜릿했다. 유다르는 바로 눈앞에 있는 로아를 당장이라도 충동적으로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얻어졌다면 이 여자에게 관심을 가졌을 리도 없었겠지. 유다르는 잡았던 로아를 놓아주었다.

손이 떨어지고서도 유다르가 쥐었던 곳에서 아린 고통이 느껴졌다. 한 손을 들어 올린 로아가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만진 곳이 불쾌했다. 구겨진 로아의 미간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럼에도 유다르는 흥미롭다는 눈을 거두지 못했다.

“근데 자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게 참으로 애석해.”

영리하고 소신 있는 여자라 생각했건만 가끔은 허술한 부분도 메꿔주고 싶은 매력으로 다가왔다.

“나를 거역할수록 누가 위험해지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허리를 숙인 유다르는 앉아있는 로아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줄곧 흔들림 없던 로아의 동공이 잘게 떨려왔다. 유다르는 이번엔 로아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고개의 방향을 틀었다. 로아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간 유다르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자네의 고집을 꺾을 방법이 트로네 공을 처치하는 것뿐이라면, 나는 어떻게든 상황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기운이 그녀를 싸고돌았다. 무릎 위로 손을 올린 로아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고, 움켜쥔 주먹은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을 뻔한 것도 잠시. 로아는 곧바로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만들어 보십시오.”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듯 단호한 톤이었다. 유다르는 의아함에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로아도 고개를 들어 올려 저를 내려다보는 유다르의 눈을 마주했다.

“내 남편은 아무 혐의도 없을 테니까요.”

자신감에 찬 눈이었다. 확의에 찬 건방진 눈을 지독하게 짓밟고 싶을 만큼.

“아마 뒤집어씌울 명분조차 없어 태자 저하께서 손쓸 수도 없을 것입니다.”

로아는 에이젠을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그의 순수한 모습을 믿었다. 전장에서 수많은 무고한 목숨을 죽인 잔인한 남자라고? 그건 제국을 위한 일이었다. 황태자 유다르는 전쟁이 일어난 주된 원인인 주제에, 용맹한 전쟁영웅에게 감히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를 붙였다.

은혜를 모르는 황태자가 추후 이 제국을 이끌 황제가 될 자격이 있을까.

로아는 유다르에게 경멸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하.”

유다르는 그런 로아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황태자로서 고작 백작 영애 따위에게 멸시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런 앙칼진 로아의 태도는 유다르를 자극할 뿐이었다.

“건방진 게 자꾸 빠져들게 만드는구나. 트로네 공도 이런 매력으로 꼬드긴 건가.”

유다르는 부드러워 보이는 로아의 금빛 머리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닿기 전, 로아는 얼른 몸을 비틀었다.

“제 몸에 손대지 마십시오.”

로아는 경우에 어긋난 태도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미 임자는 있는 몸인지라.”

유다르는 머쓱하게 허공에 맴돌던 손길을 거두었다. 로아에겐 당장 수많은 죄목을 붙여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서두를 건 없었다. 서서히 공략해서 결국은 무너뜨리는 맛이야말로 그가 진정 원하는 거였다.

“자네는 트로네 공의 혐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있어줘야겠네.”

***

황실 구치소에서 조사를 받는 에이젠과 달리 로아는 황궁 내부의 최고급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로아는 차라리 저를 수감시키라 요구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귀빈실에 갇힌 채 아무도 그녀를 신문하러 오지 않았다.

그곳엔 하루에도 수많은 하녀들이 오가며 로아의 수발을 도왔다. 도저히 에이젠과 같은 반역을 도모한 자의 생활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로아를 귀빈 대접하듯 대했다. 그러나 로아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황태자 유다르가 시킨 대로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로아는 유다르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녀들이 준비하는 식사는 거르기 일쑤였고, 목욕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갈아입을 여러 드레스도 준비해 주었지만 로아는 입고 온 드레스만을 고집했다.

시위하는 로아의 소식을 들은 유다르는 시간을 내어 직접 그녀를 보러왔다.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 들었다.”

유다르의 물음에도 로아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릴 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불복하는 것이냐.”

불복이라. 자신의 행위가 유다르에게 잘 전달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내 굳어있던 로아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제가 태자 저하를 따르지 않는 것도 반역에 해당되는 것입니까.”

마치 자신을 반역자로 몰아달라 애원하는 꼴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걸로 하지요. 남편을 따르는 게 아내의 도리라면 말입니다.”

에이젠이 어딜 가든 그곳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령 그의 죄목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라 해도.

“갈수록 맹랑해지는구나.”

그러나 유다르는 로아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럴수록 재밌어. 내가 쉽게 포기할 것 같으냐?”

로아를 약 올리듯 유다르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러나 로아 역시 유다르와의 기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태자 저하야말로 제가 쉽게 넘어갈 것 같으십니까.”

로아의 반격에 유다르는 말문이 턱 막혔다.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다. 여유를 유지하는 겉모습과 달리 그는 점차 초조해졌다. 입안에서 굴리는 혓바닥은 어떻게 해야 이 난제를 퀘스트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남편의 혐의 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겁니까.”

로아는 에이젠을 생각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유다르에게 건방진 태도를 유지하던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유다르는 아직도 그녀의 지조를 꺾지 못했다는 것에 슬슬 열이 올랐다.

“감히 황실의 기밀까지 알려고 하다니. 건방이 하늘을 찔러, 아주.”

“아내로서 저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녀 앞에서만은 황태자의 위엄 따윈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태자 저하께서 저를 아무런 명분 없이 붙잡아두고 있다 한들, 제가 어찌 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로아는 끊임없이 에이젠이 아닌 유다르를 의심했다. 유다르는 욱, 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제까짓 게 날뛰고 기어봤자 제 손바닥 안에 있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아직 진행 중이다.”

로아는 미간을 잔뜩 좁히며 이해할 수 없다는 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마를레나의 시신을 찾기 전까지 조사는 계속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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