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천성이 외향적이라
쾅-
음침한 유다르의 목소리에 로아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사용인들은 긴장한 듯 얼어버리고 말았다. 감히 황태자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이다니. 지금 당장 목이 썰려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유다르의 옆에 선 두 기사들이 섣불리 검을 꺼내 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을 거두어라.”
유다르는 여유롭게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두 기사가 검을 거두고도 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발끈한 그녀가 언제 유다르에게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로아는 두 주먹을 말아쥔 채 부들거렸다. 시신 수색에만 인력을 동원하고 있었다니. 그렇다는 건 마를레나가 살아있다는 전제를 조금도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이젠이 마를레나를 죽이지 않았고, 어딘가에 그녀가 버젓이 살아있다면 부질없는 수사나 다름없었다.
“마를레나 부인이 살아있으면…….”
“살아있다면 진작에 찾았겠지.”
아니, 이건 잘못됐다. 그들이 마를레나를 살아있다고 가정한 수사에 얼마나 큰 인력을 동원했을까. 보나 마나 뻔했다. 에이젠에게 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우기 위해서라면 애먼 자의 시신을 찾아 마를레나라고 우기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시신만 찾으러 다니는데 어찌…….”
“됐다. 나는 이만 일어날 테니 시위 그만하고 식사나 들어라.”
유다르는 따지고 들려는 로아의 말을 툭 잘라냈다. 로아는 나가려는 유다르의 뒤를 쫓으려 몸을 틀었다. 그러나 건장한 두 명의 호위기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다르가 공간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기사들도 홀연히 뒤를 따라 나갔다.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로아는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불안해진 두 눈동자는 갈 길을 잃은 듯 마구 돌아다녔다.
“이대로 있을 순 없어.”
무어라도 방법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조하게 방 안을 거닐려던 로아는 몸을 휙 돌렸다. 아직 뒤에 서 있던 한 명의 하녀가 로아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모든 사람들이 나간 줄 알았건만 아직 사용인 한 명이 남아 있었다. 하녀는 로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녀를 남겨둔 것은 아마 그녀를 더욱 감시하기 위함일 것이었다. 로아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는 법. 로아는 고개를 든 하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로아는 죄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황궁의 사용인이 이렇게까지 예를 갖추는 건 분명 유다르의 특별지시가 있을 터였다. 끔찍하지만, 미래에 자신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여자이니 깍듯이 대하라 했을지도 모른다.
“애나, 라고 하옵니다.”
자신을 소개한 하녀 애나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로아는 애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어봤다. 얼굴도 목소리도 앳된 것이 아직 어려 보였다. 말투도 그렇고 행동 하나하나에 서툰 것이 묻어났다. 이 순진해 보이는 하녀를 잘 구슬리면 제 편으로 돌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저에게까지 극존칭을 사용할 필요 없습니다, 애나.”
“태자 저하께서 깍듯이 모시라 하였습니다.”
로아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유다르의 불순한 의도가 역겨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이건 스스로 파놓은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로아는 이 구석을 이용하기로 했다.
“애나는 어쩌다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까.”
로아는 허리를 살짝 숙였다. 키가 작은 애나에게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애나 역시 로아의 배려에 슬며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로아는 애나를 안도시키기 위해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최대한 경계심을 허물게 만들어야 했다. 애나는 맑은 로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의 친모가 황녀님들을 보필하는 시녀였습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셨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저는 당연하게 이곳의 하녀가 되었습니다.”
예상보다 쉽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로아는 이 분위기를 여유로이 탔다.
“그렇군요. 애나는 나에게 궁금한 게 없나요?”
“어…….”
잠시 망설이던 애나는 양손으로 옷자락을 잡고 우물쭈물거렸다.
“부담 갖지 말아요.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렀더니 말동무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런 거니.”
로아는 망설이는 애나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었다. 그 손길에 마음이 놓인 애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트로네 대공 각하의 부인이시라 들었사옵니다.”
로아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입술을 말아 넣은 애나는 한 번 더 고민하듯 망설였다. 여전히 느껴지는 로아의 온기에 결국은 운을 뗐다.
“정말 대공 각하가 반역을 도모한 사실이 있습니까?”
그녀가 이곳으로 온 후부터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그러나 애나는 자신의 가감 없는 호기심이 입 밖으로 나오고서야 아차 싶었다.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면 고개 숙여 사죄드리겠습니다.”
애나는 로아에게 잡혔던 손을 빼버렸다. 허리가 직각으로 굽어질 만큼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로아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닙니다. 고개를 드세요, 애나.”
고개 숙인 애나는 제 시야에 들어온 로아가 꿇어앉은 것을 발견했다. 어깨까지 들썩일 정도로 화들짝 놀란 애나가 얼른 로아를 일으켰다.
“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도 병사로서 전장에 다녀왔습니다.”
애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로아는 그런 애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트로네 대공 각하가 아니었다면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진심으로 트로네 대공이 이 제국을 지키고 국민을 지킨 위대한 분이라 생각하옵니다.”
그렇게 존경하던 위대한 자가 황실 반역 혐의를 받고 있다니. 사실이더라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이 애나와 같았다.
그가 도대체 왜?
로아는 유다르가 모종의 이유로 에이젠을 몰아내려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로아 역시 애나에게 확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사실은 나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로아는 에이젠에 대해 모든 걸 알지 못했다. 그가 마를레나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그가 정말 개인적인 원한을 이유로 마를레나를 죽였을까. 유다르의 말대로 그는 전장에서 수도 없는 목숨을 앗고 승리를 거머쥔 자였다. 그러니 마를레나의 목숨 하나는 아무렇지 않았을까. 로아는 그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남편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로아는 에이젠을 믿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아무런 이유가 없을 리 없었다.
“태자 저하는 내게 남편을 전부 아느냐 물었지만, 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내 남편의 따뜻함을 알고 있습니다.”
로아에게 있어서 에이젠은 언제나 다정한 남자였다. 칠흑 같던 삶에도 한 줄기 빛이 되어주던 남자. 굳건한 맹약을 목숨 바쳐 지키는 남자.
“설령 그런 일을 저질렀다 한들, 결코 반역이 목적이었을 리 없습니다.”
그가 전장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남았는지는 다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끈질긴 삶의 욕망이 있었다. 뭐가 그의 원동력이 되었을진 모른다. 만일 반역을 도모했다 한들 이리 쉽게 발각될 루트를 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허술한 자가 어찌 그 험난한 피의 전쟁에서 살아남았겠는가.
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편은 수많은 고난을 겪고, 수많은 죽음을 가까이 지켜보면서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입니다. 남은 삶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날일 텐데, 그걸 제 손으로 망쳤을 리가요.”
로아의 감정에 몰입한 애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엔 애나가 로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공감한다는 듯 녹아내린 눈빛이었다.
“황실 뒤 사용인들끼리 도는 말로는, 전쟁영웅이 된 대공 각하의 권위가 제국에서 제일로 칭송받게 되었으니 태자 저하께서는 자신의 입지를 잃을까 하는 위기감을 느끼고 계신단 말이 있습니다.”
드디어 애나를 통해 얻고자 했던 정보를 듣게 됐다.
“부디, 태자 저하께서 마음을 돌리시길 간곡히 바라겠습니다.”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애나.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는 둘만 간직하기로 하지요.”
별거 아닌 이야기를 나눈 것 같겠지만 두 사람이 비밀을 나눈 것은 서로의 목숨을 건 행위나 다름없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이를 유다르나 황실 관계자에게 유출했다간 상대방의 처사가 무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애나는 조금은 불안함이 엿보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잃을 것 없는 로아는 씩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애나를 제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 그녀를 이용해 이곳을 탈출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한 공간에 갇혀 있었더니 가슴이 답답하군요.”
로아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황실의 후원 쪽이 내다보이는 위치였다. 애나는 로아의 시선을 따라갔다.
“내가 천성이 외향적인 인간이라 한날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며칠간 이곳에 갇혀 있으니 좀 힘든데…….”
로아는 흘기는 시선으로 애나를 살폈다. 애나는 로아의 깊은 꿍꿍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 안타까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나가 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