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신중을 기하여
잠시 망설이던 애나가 시간을 확인했다. 꽤 늦은 시간이라 황궁은 곧 소등에 들어갈 시간이다. 보초를 서는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곤 사용인들도 침소에 들 시간이었다.
“그럼 자정이 지나면 몰래 나갔다 오시겠어요? 제가 동행해드릴게요.”
로아에게 완전히 마음을 연 애나는 경계심을 허문 지 오래였다.
“순찰을 도는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코스를 피하면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겁니다.”
로아는 부드럽게 휘어뜨린 눈꼬리로 애나에게 보답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애나.”
고요해진 황궁. 애나는 누가 몇 시에 어디부터 어디까지 몇 분 안에 순찰을 도는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엔 거침이 없었고, 로아 역시 애나를 믿고 그 뒤를 따랐다.
발각되는 게 두렵긴 했으나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대로 새장 속 새처럼 갇혀 있는 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황실은 에이젠에게 죄목을 완벽히 씌울 때까지 조사를 끝내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뭐라도 능동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애나. 황궁의 후원에 가본 적 있나요?”
“후원이요?”
애나는 로아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늦추지 않았다.
“네. 후원을 좀 거닐고 싶은데 그쪽으로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바쁘게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던 애나는 말도 안 되는 로아의 요구에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애나는 로아의 손목을 잡고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을 법한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특별한 용건을 지시받았거나 후원에 드나들어야 하는 관계자들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곳이죠. 일부 사용인 중에 후원에 무엇을 숨겨놓았는지 궁금하다며 몰래 들어갔다가 엄벌을 받은 사례도 있었습니다.”
황궁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곳이 후원이었다. 로아는 귀빈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신분은 엄연한 죄인의 죄목을 따지기 위한 참고인 정도였다. 비록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호의를 베풀긴 했으나 무리한 요구까지 들어줄 순 없었다.
“애나도 그 후원에 가본 적 없나요?”
그러나 로아는 이번에도 여유를 잃지 않은 듯 씩 웃으며 물었다.
“네, 없습니다.”
애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황실의 후원을 본 적 있습니다.”
허리를 숙인 로아가 애나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로아의 은밀한 이야기에 애나는 호기심을 자극당한 듯 두 눈을 반짝거렸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습니까?”
아직 어리숙해서인지 참 다루기 쉬운 하녀였다. 로아는 혹시라도 누가 지나갈세라 주변을 살핀 후 애나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사실 황실의 조경을 담당하는 카일론 클라리온 자작이 내 오라버니입니다.”
“헉, 그게 정말입니까?”
애나는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어버렸다. 아차 싶어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네. 얼마 전 황실 무도회에 초대되었을 때, 카일론을 따라 몰래 후원에 들어와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후원이라면 질색을 하던 애나의 두 눈은 궁금증에 가득 차 있었다.
“후원은 어떻습니까? 황실 친족들과 최측근 사용인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출입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쪽이 더 화려하단 말이 있고, 반대로 꽁꽁 숨겨둔 은밀한 공간인 만큼 그곳이 더 아름다울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용인들도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니만큼, 그곳에 대한 가담항설은 수없이 존재했다. 한 번쯤은 극락이라 불리우는 후원을 여유로이 거니는 상상을 해볼 정도로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음, 취향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화려한 중정보다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후원이 더 좋았습니다.”
로아의 묘사에 애나는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라니……. 그건 정원이 아니라 그냥 숲 아닙니까?”
일반적인 숲을 생각하면 그렇게 멋있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리 호들갑인 걸까. 알고 보면 보잘것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관심의 불씨가 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은 커져만 갔다.
“그곳이 그렇게 궁금합니까?”
로아는 애나의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애나는 망설이듯 잠시 꾸물거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소문보다 대단한 곳이 아니라면 모두에게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 애나에게 사용인 동료들로부터 주목받게 되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나랑 같이 입구까지만 가보는 게 어때요?”
로아가 애나를 살살 설득했다. 그녀의 손을 꼭 움켜잡기도 했다. 그러나 애나는 로아가 당기는 쪽으로 끌려가지 않으려 힘을 주고 버텼다.
“그랬다간 황실에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일말의 양심과 두려운 감정이 애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로아는 부드러운 손길로 애나의 머리칼을 만져주었다.
“나와 함께 있잖아요. 발각되더라도 내 핑계를 대십시오.”
“그래도…….”
“출입을 한 것도 아니니 그리 큰 엄벌을 내리진 않을 겁니다.”
황태자 유다르가 탐하는 여자. 이 여자가 제 뒤를 받쳐준다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눈동자는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두 발은 어느새 로아의 뒤를 쫓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보초의 경계망을 피해 무사히 후원 입구까지 왔다. 그러나 거대한 철문과 담벼락이 후원으로 가는 길을 철저히 막아서고 있었다. 뒤편의 키가 큰 주목만 살짝 보일 뿐, 안쪽이 어떤 형태인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선 뒤쪽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애나는 닿지 않을 게 뻔했지만 괜스레 까치발을 높게 들었다.
“그렇군요. 이렇게 닫힌 건 처음 봐서 저도 착오가 있었습니다.”
로아는 애나가 후원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틈을 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만에 하나의 확률로 이 근처를 지나가다 카일론을 마주치진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애나의 말대로 대다수의 사용인들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카일론도 마주칠 수 없었다.
로아는 짧은 시간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카일론에게 알릴 수 있을까. 골이 아파올 정도로 생각하던 로아의 뇌리에 번뜩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로아, 그 목걸이 못 보던 거다?’
카일론과 함께 후원을 구경하던 날, 카일론은 로아가 착용하고 온 루비 목걸이를 가리켰다. 로아는 카일론이 이 목걸이가 자신의 것임을 기억하리라 생각했다. 이걸 근처에 두고 간다면 자신이 이 황궁 어딘가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아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릴 뿐 섣불리 풀어내지 못했다. 사랑하는 에이젠이 처음으로 저에게 건넨 선물이었다.
“늦기 전에 이만 돌아갑시다.”
아쉬움을 가득 담은 애나의 목소리에 로아는 저도 모르게 펜던트를 꽉 쥔 채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툭, 끊어진 목걸이 끈은 로아의 손아귀 안에 쥐어졌다.
“주변을 잘 살피셔요.”
휙 돌아선 애나의 뒤를 따르기 전, 로아는 얼른 뜯은 목걸이를 후원 입구 앞에 내던졌다. 초록의 풀잎과 짙은 갈색의 철문 사이로 떨어진 루비가 반짝거렸다. 로아는 애나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흘끗거렸다.
***
황궁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곳. 황실 조사단 산하에서 관리하는 구치소는 지하에 위치했다. 어둠 속에서 랜턴 불빛을 쥔 카일론은 가장 은밀한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불빛이 비춘 곳에 한 남자가 주저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각하.”
벽에 기대어 있던 에이젠은 사람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클라리온 자작이 이곳에 어찌 출입한 것입니까.”
카일론은 에이젠과 눈을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높이가 맞자 그의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늘따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섬찟하게도 느껴졌다.
“소식 들었습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카일론은 에이젠과 사돈 관계로서 정당한 접견 요청을 했다. 자신이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에이젠의 안부는 가족 모두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 나가십시오. 이곳에 있다간 자작도 나 때문에 괜한 의심을 사게 될지 모릅니다.”
“대공 각하, 반역을 도모했다는 거 거짓이지요?”
카일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에이젠은 초조해 보이는 그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을 온전하게 믿는 건 아니라는 것을.
“조사 결과가 말해줄 것입니다.”
긴말 해봤자 한낱 황실 조경을 담당하는 자작이 저에게 도움이 될 리 없었다. 에이젠은 되레 나서려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카일론을 밀어내야 했다.
“황실수사단이 그렇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수사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카일론은 현재 에이젠이 닥친 상황이 곧 자신의 가문에까지 불똥이 튈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태자 저하는 어떻게 해서든 각하를 역적으로 몰 것입니다. 조사 결과가 어떻든지요.”
유다르 황태자가 트로네 대공에게 말도 안 되는 죄목을 씌워 몰아내려고 한다. 황실 관계자라면 암암리에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건, 각하뿐만 아니라 로아도 그리고 저희 클라리온가에도 위험이 닥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디, 부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생각해주심이…….”
랜턴을 든 카일론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에이젠은 흔들리는 불빛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클라리온 자작.”
나지막한 목소리가 공간을 낮게 메웠다. 파들거리던 카일론의 떨림이 멈추었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공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대도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분명 그의 눈동자는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서슬 퍼런 날이 선 것처럼 서늘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