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절대 아무에게도
확고한 빛깔을 띤 그의 붉은 눈동자 때문인지, 카일론도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유다르가 에이젠을 몰아내고 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억지스러운 수사를 진행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공 각하가 누명을 쓰는 꼴을 가만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구해내야 했다.
“죄인의 신분으로 황실에 구치되었다 함은, 로아도 혐의의 범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요.”
만일 그의 죄가 입증될 만한 단서가 조금이라도 나와선 안 됐다. 황태자 유다르의 편에 선 황실 재판관이 과장 해석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로아는 참고인 신분인 사용인들과 분리되었을 터인데, 아버지와 서신을 주고받은 바로는 로아는 본가로 보내진 건 아니라 합니다.”
그녀는 트로네 대공 저에도, 클라리온 백작 저에도 없었다.
“로아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겁니다.”
카일론은 머릿속엔 끔찍한 상상들이 몇 가지 스쳐 지나갔다. 질끈 눈을 감은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딘가에서 신문당하고 있을지도…….”
그러나 의외로 에이젠은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그 누구보다 로아를 사랑했던 남자이면서. 카일론은 평온한 에이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카일론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의심의 눈초리가 되었을 즈음, 에이젠은 운을 뗐다.
“클라리온 자작은 나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차갑게 떨어진 시선, 그 밑으론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가 보였다. 카일론은 그의 표정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나 에이젠이 이렇게까지 여유로울 수 있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습니다.”
절반은 그를 의심했지만, 절반은 그가 아니길 바라는 희망도 있었다.
“클라리온 자작은 로아의 안위를 확인해주십시오.”
카일론은 로아의 이름을 부르는 에이젠을 유심히 지켜봤다. 여태까지 강한 척하던 그가 그제야 나약한 구석을 드러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카일론은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챘다.
“만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반드시 나에게 가장 먼저 알리러 오십시오.”
카일론은 확신했다. 로아를 위해서라도 에이젠은 결코 반역 따위를 저질렀을 리 없다는 걸.
***
접견장을 빠져나온 카일론은 뒤쪽 길로 나왔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로아가 어디로 사라졌을지에 대한 추측으로 가득 찼다. 의식의 흐름대로 걸어가던 그가 멈춰선 곳은 후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단단히 잠긴 철문을 올려다봤다. 카일론은 자신의 손으로 꾸민 이 후원을 로아에게 보여줬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태자 유다르를 만났다. 그는 후원에 몰래 들어선 저와 로아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그 뒤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카일론은 그때의 음습했던 기운을 잊을 수 없었다.
에이젠에게 죄목을 씌우고 로아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됐다. 카일론은 이상하게 로아의 행방을 유다르가 알 것 같은 촉이 왔다.
“거기 누구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황궁 내부를 순찰하던 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념을 헤아리느라 주변을 전혀 경계하지 못했다. 카일론은 뒤늦게 느낀 사람 기척과 불빛 쪽으로 걸어갔다.
“클라리온 자작입니다.”
예를 갖춰 호위기사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 늦은 시간에 침소에 들지 않고 왜 나와 있는 게요.”
“내일 황제 폐하께 보고드릴 게 있는데 오늘 낮에 전정 작업을 하다 후원에 두고 온 것 같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후원에 딱히 볼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자니 로아와 관련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른 가지고 나오시오.”
기사가 후원 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카일론은 그들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뗐다. 늘 소지하고 다니는 후원으로 들어가는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열쇠를 찾으려는데 깜깜한 밤이라 잘 구별이 가지 않았다. 한참을 뒤적거리는데 발밑에 무언가 반짝거리는 물체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카일론은 열쇠 꾸러미를 다시 집어넣었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그가 발밑에서 붉은 빛깔을 띠는 물체를 주워들었다.
“이건…….”
카일론은 이 목걸이를 기억했다. 황실 무도회를 찾아왔던 로아가 착용했던 바로 그 루비 목걸이였다. 희귀할 정도로 세밀한 세공과 조그맣지만 단단한 형태를 잊을 수 없었다. 로아의 물건이 이곳에 떨어졌다는 건, 행방이 묘연한 로아가 이 황궁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본 카일론이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방금 막 순찰을 도는 기사가 떠난 자리는 휑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불이 꺼진 접견실 안으로 숨죽인 채 들어섰다. 입구에 구치소를 관리하는 조사단원이 있었지만, 꾸벅거리는 게 졸음에 빠진 듯했다.
본래는 그래선 안 되지만 카일론은 구치소 관리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발걸음 소리도 죽인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대공 각하.”
에이젠은 늦은 시간, 어두운 공간에서도 자지 않고 두 눈을 버젓이 뜨고 있었다.
“하아, 하…….”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참았던지라 목적지 앞에 도달하니 차오르는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각하, 로아가 황궁 안에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에이젠은 돌아온 카일론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로아’의 흔적을 찾은 듯한 그의 말에 얼른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 루비 목걸이는 로아의 것입니다.”
에이젠은 카일론이 내민 목걸이를 내려다봤다. 처음으로 그가 로아에게 선물했던 그 목걸이가 맞았다.
“하지만 각하와 같은 수사단 산하의 구치소엔 없는 게 확실합니다.”
현재 이 구치소에 죄인 신분으로 수감된 자는 에이젠 트로네 대공,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럼 도대체 어디에…….”
카일론은 헐레벌떡 들어오느라 정신이 없어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러나 두 주먹을 말아쥔 에이젠은 황궁 안에 있다는 로아가 어디쯤에 있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유다르…….”
그가 제국의 황태자의 이름을 감히 맨입에 올렸다. 중저음으로 낮게 깔린 나지막한 목소리에 카일론이 고개를 들었다. 후원 앞에 섰을 때, 카일론 또한 유다르를 의심했었다.
“자작도 알고 있을 테죠. 태자 저하가 로아를 노리고 있었다는 걸.”
카일론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로아의 남편인 에이젠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검은 속내를 드러낸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어…….”
처음 접견을 왔을 때와 달리 그의 눈이 불안하게 떨려왔다. 힘줄이 다 돋아날 정도로 세게 쥔 주먹은 당장이라도 바닥을 내리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에이젠은 이성을 되찾은 채 카일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일 안에 나를 도울 사병이 황궁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예?”
그에게 계획이 있을 거라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다. 그런데 지원군이 직접 황궁에까지 들이닥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행위는 도박에 가까웠다. 사병들이 그가 명백하다는 증거를 가져온다면 모든 게 쉽게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모호하다면 이 또한 반역 행위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부탁이니 내일까지 반드시 로아의 안위를 확인해 주십쇼.”
그러나 수 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카일론은 에이젠을 믿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이 끝나기 전에 로아를 찾아내겠습니다.”
카일론은 늦기 전에 접견실을 빠져나왔다. 동이 트기 전까지 황궁 내 어딘가에 숨어 있을 로아를 찾아야 했다.
유다르가 구치소에 로아를 가두지 않았다는 건, 다른 공간으로 불러놓았다는 것인데. 로아에게 흑심을 품은 유다르라면 아마 귀빈을 대접하는 곳을 내어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카일론은 귀빈객실이 모여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하필이면 누군가의 기척을 마주하고 말았다.
“거기 누가 계십니까?”
늦은 시간에 아직 귀빈 객실에서 일하고 있는 사용인이 있었다. 그가 알기로 현재 황궁에 들어온 귀빈은 없다. 그런데도 사용인이 있다는 건…….
그가 아직 생각을 마치지 않았을 때, 멀리서 걸어오던 사용인이 카일론의 앞까지 도달했다.
“클라리온 자작님. 이 밤 중에 어딜 가시는 겁니까?”
마땅히 둘러댈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당황한 카일론이 얼른 두 손을 마구 휘저어댔다.
“아무것도 아닌…….”
“아, 혹시 여동생분을 뵈러 들르신 겁니까?”
그곳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자는 애나였다. 그녀는 방금까지도 로아의 처소를 정리해주고 나오는 길이었다. 로아가 자신의 오라버니라 했던 카일론이 이곳에 찾아오다니, 당연히 알고 온 것이라 여겼다.
“자작님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저는 이곳에서 트로네 부인을 임시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지금 로아는 어디 있소?”
카일론은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알고 온 척. 들킬까 조마조마해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이성으로 눌러 담으며 물었다.
“절대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주변을 살핀 애나가 카일론에게 바짝 다가와 단단히 일러두었다.
“잠시만 두 분을 만나게 해드릴 테니 짧게만 접견하시고 바로 나와주셔야 합니다. 태자 저하께서 알면…….”
“알겠으니 어서 데려다주시오.”
긴말을 나눌 시간조차 낭비였다. 카일론은 다급한 손으로 애나의 등을 떠밀어 앞장서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