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내 말이 틀린가?
“지금 로아는 어디 있소?”
살금살금 걷던 애나가 화들짝 놀라며 카일론 쪽을 돌아봤다.
“절대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잠시만 두 분을 만나게 해드릴 테니 짧게만 접견하시고 바로 나와주셔야 합니다. 태자 저하께서 알면…….”
아직 모든 게 어리숙한 하녀인지라 이것도 저것도 확인하는 게 늦었다.
“알겠으니 어서 데려다주시오.”
카일론은 허둥대는 애나가 더욱 주변의 시선을 끌 것만 같아 불안했다. 애나의 뒤를 따라간 카일론이 도착한 곳은 예상대로 귀빈실이었다. 그리고 그 앞엔 여러 개의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나름대로 가두어두긴 했으나 유다르의 대접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애나는 열쇠 꾸러미를 꺼내 자물쇠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철컥, 하고 마지막 자물쇠가 풀렸다. 비로소 열린 문틈 사이로 카일론은 손을 밀어 넣었다.
“로아.”
귀빈실 안쪽에서 로아는 멍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저를 부르는 익숙한 카일론의 목소리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카일론!”
카일론을 마주한 로아는 겨우 안도한 듯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가볍게 총총 뛰어 카일론에게 다가갔다.
“쉿.”
카일론은 로아의 목소리나 발걸음 소리가 소음을 일으켜 주변의 의심을 살까 경계했다. 로아는 뒤늦게 뛰어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손으로는 제 입술을 틀어막았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온종일 이유 모를 피로감에 찌들어있던 로아는 오늘이 된 이후 처음으로 맑게 웃어 보였다.
“우연히 후원에 들렀다가 네 목걸이를 발견했어.”
카일론이 주머니에서 로아의 루비 목걸이를 꺼냈다. 로아는 아직 멀쩡하게 반짝이는 루비 목걸이를 보며 안심했다. 두 손을 뻗자 카일론은 그녀의 손바닥 위로 목걸이를 떨어뜨렸다.
“하, 다행이다. 다행이야…….”
자신의 의도대로 카일론이 목걸이를 발견해주어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주워가버릴까 두려웠다. 카일론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있었지만, 에이젠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았던 목걸이를 잃어버릴 것이 로아에겐 더욱 위험한 모험이었다.
튿어져버린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 순 없었지만, 다시 제 손에 들어와준 것만으로 감사했다. 로아는 목걸이를 꼭 쥔 채 품에 안았다.
“로아, 잘 들어.”
카일론이 두 손으로 로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내일이면 트로네 대공을 지원해줄 사병들이 황궁으로 올 거야.”
“뭐?”
꼼짝없이 궁지에 몰린 줄 알았더니 에이젠이 움직이고 있었다. 로아는 에이젠을 믿었던 자신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걱정되는 건 있었다. 사병을 끌어들였다는 건 그가 원하는 대로 황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 곧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거지?”
그래도 희망이 보였다. 상황을 잘 알진 못했지만 움직이고 있는 만큼 탈출구의 빛이 간절했다. 그러나 로아의 간곡한 물음에도 카일론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건 장담 못 해. 아무리 지원군이 온다 해도 태자 저하가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억지로 붙들고 있는 만큼 뜻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을 게 뻔했다.
“순순히 풀어준다면 좋겠지만, 탈출할 방법도 고안해둬야 해.”
“탈출이라니…….”
강제로 가둬놓고 탈출했다가 황실을 거역했다며 반역자의 꼬리표를 다는 건 아닐지, 이게 유다르가 의도한 최종 목적인 건지. 눈앞이 더욱 캄캄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까.
로아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순간에 떠오르는 건 그저 에이젠뿐이었다. 고되고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그를 보지 못한 지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
다음 날 아침. 유다르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그가 머무는 침소를 나오면 곧바로 보이는 곳이 후원이었다. 높은 층에서 후원을 내려다보던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태자 저하.”
황급히 그를 찾아온 한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냐.”
“이른 새벽부터 트로네 대공작을 지원하러 온 사병군이 황궁 앞에 도착했습니다.”
사병을 끌어들였다라…….
“그래?”
유다르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제 턱을 매만졌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도 구속 기간이 길어지자 에이젠이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 일의 규모를 키워가는 건 그의 입장에서 굳이 나쁘지 않았다. 그의 작은 행동이나 말에 무어라도 죄목을 씌울 명분이 생긴다면 뭐든 환영이었다.
“용건이 무어라 하더냐.”
“트로네 대공의 무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전하러 왔다 하옵니다.”
무혐의를 입증할 증거라니. 만일 그게 정말 명백한 증거라면 제 뜻대로 상황이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치밀하게 나오는 에이젠에 유다르는 혀를 찼다.
“입증할 증거? 그게 뭔데.”
“마를레나 트로네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유다르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 마를레나는 황실수사단이 제국 곳곳을 이 잡듯 수색해도 머리카락 한 올도 나오지 않았는데 어찌 찾았단 말이지.”
유다르는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에 쉬이 신뢰가 가지 않았다. 기사는 이해하지 못한 유다르를 위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루베른 영지에서 발견되었다 합니다.”
“루베른……?”
제국 가장 남단에 위치한 루베른 영지. 수도에서도 가장 먼 곳일뿐더러, 루베른 백작이 거느리는 그곳은 중앙관리와는 관계없는 아주 작은 땅이다.
“황실수사단의 수색 리스트를 확인한 결과 수도와 가장 멀리 떨어진 루베른 영지까지는…….”
유다르 또한 알고 있었다. 루베른 영지는 황실수사단이 마를레나를 찾기 위해 수색한 지역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헛다리를 짚은 셈이었다. 제국의 고급 수사 인력을 동원해 헛수고나 시킨 셈이었다. 트로네 대공작 한 명을 꺾겠다고 말이다.
분한 기분에 말아쥔 주먹이 파들거렸다. 그렇게 날고뛰었는데도 아직도 에이젠 트로네의 손바닥 위에 놓인 기분이었다.
감히 선대 대공작의 적자도 아닌 서자 따위가. 그것도 한낱 기사부터 시작해 운 좋게 대공의 직위를 얻어먹은 그를 이기지 못한단 말인가.
만일 그와 사병군이 준비한 증거가 채택되고 트로네 대공이 무혐의로 풀려난다면?
그 후폭풍은 수사 책임자인 유다르가 짊어져야 할 게 뻔했다.
“그래서 마를레나가 거기에 살아있다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물음은 부정의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예.”
그에게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기사의 목소리도 무겁게 깔렸다.
“그녀를 산 채로 데려왔느냐.”
“데려온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럼 마를레나는 아직 루베른 영지에 있단 말이냐.”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유다르는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 다른 창에 비치는 후원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느른하게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가 후원의 나무를 하나하나 옭아매듯 훑었다.
아무리 봐도 이 아름다운 후원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얻기 위해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게 아무리 도덕적으로 흠이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던 권력자였다.
“그럼 일단 사병들을 들이거라.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할 테니.”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기사가 유다르의 대답을 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다르는 나가려 뒤돌아선 기사를 불러세웠다.
“지금 즉시 황실수사단의 일부 단원들을 루베른 영지로 파견시켜라.”
유다르의 지시에 기사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마를레나 트로네가 살아있는 걸 확인하기 위함입니까.”
기사의 물음에 유다르는 입꼬리를 싹 말아 올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그는 얄궂은 미소를 띠었다. 먼 산을 보듯 시선을 돌린 유다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지워냈다.
“마를레나가 정말 살아있다면 죽일 것이다.”
섬찟한 유다르의 발언에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야산에 묻을 것이다.”
서서히 고개를 돌린 유다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자들을 얼굴을 한 명, 한 명 훑어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자들은 날이 선 눈빛에서 살의를 느꼈다.
“마치 누군가 고의로 죽여서 숨겨놓은 것처럼 말이지.”
마를레나를 죽이고 상황을 원하는 대로 조종하겠다는 그의 포부가 담긴 말엔 다른 말도 내포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계획을 알고도 방해하는 자는, 다른 곳으로 유포하는 자는 당사자를 비롯해 가문 전체가 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병들을 보낸 후 다시 단원들을 파견시켜 마를레나의 시신을 찾아라.”
지금까지 유다르가 저질러온 횡포로 미루어 보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자였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소국과의 동맹을 배신하고 전쟁까지 일으킨 장본인. 애꿎은 제군들을 전쟁터로 몰아냈던 잔악한 전쟁광.
그 타이틀은 제국에 승리를 거머쥐게 해준 에이젠 트로네가 아닌 황태자 유다르에게 가야 할 칭호였다.
“목적지에 가려면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유다르의 말이 끝맺음을 했는데도 그 누구에게서 그를 추켜세우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턱을 치켜세워 고개를 꺾은 유다르는 바로 옆에 서 있던 기사를 빤히 바라봤다.
“내 말이 틀린가, 제군?”
살기 어린 유다르의 눈을 마주한 기사는 허튼 화살이 저에게 날아오기 전에 허리를 숙이고 말았다.
“맞습니다. 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