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28)화 (28/107)

28. 건방진 놈이 감히

“수장을 들여라.”

유다르는 자신을 찾아온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정확히는 그들이 이곳에 머물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이미 유다르의 명으로 황실조사단원들이 몇 명 루베른 영지로 출발했다.

“에이젠 트로네 대공 각하와 참전했던 루크티아 기사단의 단장 라케이몬 경이라 합니다.”

루크티아 기사단.

황실에서는 매년 제국의 사설 기사단을 모아 토너먼트를 시행한다. 이 토너먼트에서 승리의 화관을 거머쥐는 기사단에서는 황실 기사단으로 스카우트 제안을 하기도 한다. 루크티아 기사단은 이 토너먼트에 가장 많이 우승했으며, 황실 기사단에도 이곳 출신 기사들이 여럿이었다.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낸 명문 기사단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루크티아 기사단이 배출해낸 가장 유명한 인재는 바로 에이젠 트로네 대공이다.

즉, 이들은 가장 중립적인 위치를 가진 사병군이다.

“마를레나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가져왔다고.”

유다르는 에이젠에게 유리한 증거를 가져왔다는 이들이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신의 검은 속내를 드러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최대한 공정한 수사를 진행하는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루베른 영지의 영주 아드리온 루베른 백작을 데리고 왔습니다.”

마를레나가 숨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루베른 영지의 영주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 유다르는 저도 모르게 불편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존경하는 태자 저하, 저는 루베른 영지의 영주 아드리온 루베른 백작이라 하옵니다.”

유다르는 날렵하게 치켜떴던 눈을 애써 둥글게 휘어뜨렸다.

“루베른 영지는 워낙 수도에 떨어진 남단에 위치한 데다, 저희 가문은 선대부터 황실과 연이 닿지 못한지라 루크티아 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래, 서두는 필요 없으니 본론부터 꺼내 보거라.”

루베른 백작이 준비해온 것들을 꺼냈다. 유다르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그가 무엇을 내밀지 기다렸다. 어차피 증거라 해봤자 법정에서 채택되지 못하면 소용없었다. 루베른 백작은 종이 몇 장을 꺼내 유다르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몇 달 전부터 저희 루베른 영지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 상인이 있었습니다. 정체를 온통 가린 상점의 주인이 영지민들에게 돈을 받고 점성술을 봐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포춘텔러, 같은 거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유다르는 이게 마를레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 의아스러운 표정이었다.

“제 아내 벨라니스도 종종 그곳을 가 점성술을 보곤 했습니다.”

그의 아내 벨라니스는 처음 점성술집에 다녀왔을 때만 해도 포춘텔러를 믿지 않겠다 했다. 그 포춘텔러가 친구 로아에게 악담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서는 포춘텔러가 아기 소백작의 성별을 정확히 맞혔다며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루베른 백작은 영지의 성내에서 상인 활동하는 자들에 대한 기사를 실은 신문을 호위기사에게 넘겼다. 유다르는 그것을 받아들고도 의구심을 풀지 못했다.

“하루는 그 포춘텔러가 목 상태가 좋지 않다며 점성술의 결과를 종이에 적어 건네주었습니다.”

이번엔 그 포춘텔러가 서면으로 작성한 종이를 보여주었다. 유다르는 그것을 보고도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글씨체를 보니 어쩐지 익숙해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루베른 백작이 꺼낸 것은 꽤 오래전의 것인 듯 아주 낡아 보이는 종이 한 장이었다.

“저의 조부이신 선대 루베른께서는 생전에 쌓은 덕으로 황실에 자주 드나들면서 선대 황족들과 교류를 하셨습니다. 그 흔적이 저희 가문의 가보로 남아 저에게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루베른 가문은 비록 지금은 귀족 중에서도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루베른은 선대가 남겨두었던 황실과 교류했던 흔적 중에 그 포춘텔러를 의심케 하는 증거물을 찾아냈다.

“그중에서 선대 황제의 마를레나 황녀와 편지를 주고받은 것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편지는 약 20여 년 전, 마를레나 황녀가 자신의 데뷔당트를 위해 초대장을 직접 쓴 편지였다.

“저는 이 글씨체를 보고 저희 루베른 영지에서 포춘텔러로 활동하는 정체 모를 이 여인이 마를레나 황녀가 아닐지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유다르는 양손에 두 종이를 들고 글씨체를 비교해보았다. 한쪽엔 마를레나 황녀가 작성한 초대장을, 다른 쪽엔 정체 모를 포춘텔러가 작성해준 점성술 결과지를.

특이한 각도로 휘어진 글씨체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긴 했다. 특히 문장 부호와 글자 사이에 넓은 간격을 유지하는 게 거의 흡사했다. 유다르 역시 한눈에 보고도 이 두 글은 한 사람이 작성했다고 유추할 정도였다.

“아니, 감히 확신한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가 확신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유다르는 당장이라도 이 확실한 증거물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마를레나가 정말로 살아있다면 자신은 제국의 영웅을 질투해 억울한 누명을 씌우려는 악덕한 황태자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셈이었다.

“이 포춘텔러를 조사해보는 게 어떠실지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작은 영지의 별 볼 일 없는 가문이라도 이 수사에 협조드리고 싶었습니다.”

용건을 마친 루베른 백작이 물러나기 전 한 번 더 간곡히 부탁했다.

“흠…….”

유다르는 턱을 매만지며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루베른 백작은 살짝 고개를 든 채 유다르의 반응을 살폈다.

“그대의 이야기는 잘 들었소. 내 황실조사단과 얘기를 해보고 수사의 방향을 다시 잡도록 하지.”

“고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베른 백작을 포함한 루크티아 기사단이 철수 준비를 했다. 물러나기 전 루베른 백작이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한 얼굴로 유다르에게 다가갔다.

“부디 제국의 구원자인 에이젠 트로네 대공의 누명이 하루빨리 벗겨질 수 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루베른은 수사가 옳은 방향으로 진행되기 위해 자신이 건넨 증거물이 꼭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그의 신신당부는 오히려 유다르의 신경을 건드릴 뿐이었다.

“그대의 뜻을 잘 알았소. 수사를 돕기 위해 먼 길 왔으니 내 식사라도 대접해야겠지?”

유다르의 호의적인 태도에 루베른 백작은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그게 함정인 걸 알아채지 못했다. 유다르가 파견한 황실조사단원들이 먼저 루베른 영지에 도착해 마를레나를 처리할 때까지 사병군들의 발목을 잡아두기 위함이었다.

루베른 백작을 포함한 기사단원들은 사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이동했다. 홀로 남겨진 유다르는 루베른 백작이 두고 간 증거물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마를레나가 생존해있다는 유력한 증거였다. 뜻대로 풀리지 않자 화가 난 유다르는 그 종이를 마구 구겨버렸다.

“건방진 놈이 감히…….”

유다르는 루베른 백작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제국의 구원자인 에이젠 트로네가 누명을 벗길 바라?

루베른 백작 한 사람의 의견이었지만, 이는 곧 제국민들의 생각이었다. 에이젠 트로네를 완벽하게 끊지 않으면 되레 타격을 입을 자는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어떻게든 마를레나를 죽이고, 에이젠 트로네에게 혐의를 씌워 반역자 꼬리표를 달아주는 수밖에.

***

루크티아 기사단이 물러간 지 며칠이 지났다. 로아는 여전히 호화스러운 감옥에 갇혀 허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유다르는 저를 반기지 않는 로아를 불만스럽게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저 고개를 스스로 돌릴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그가 얄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운을 뗐다.

“잘 있었나, 나의 레이디.”

로아는 에이젠이 아닌 다른 이가 저를 ‘나의 레이디’라 부르는 소리에 질겁했다. 발끈한 그녀가 몸을 일으켜 휙 돌아봤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유다르는 화가 난 로아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감정을 가지각색으로 표현하는 여자, 아주 흥미로웠다.

“속이 거북합니다.”

그녀의 앞에만 서면 황태자로서의 위엄을 잃고 말았다. 여자에게서 이런 앙칼진 대접을 받는 건 처음이라 신선하기까지 했다.

“허허, 여전히 매력이 철철 넘친단 말이지.”

유다르는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로아의 건너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내가 희소식을 가져왔거든.”

유다르는 로아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로아는 경계를 허물지 않은 얼굴로 일단 제자리에 앉았다.

“아니, 자네한텐 슬픈 소식이려나?”

불안한 기운이 로아의 주변을 싸고돌았다. 킥킥거리는 그의 비소에 소름이 돋았다.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유다르는 상체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깍지 낀 두 손을 무릎에 대고 로아에게 시선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로아는 가까이 온 그가 부담스러워 뒤로 물러섰다.

“마를레나의 시신을 찾았다.”

“……네?”

뒤통수를 묵직한 무언가로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멍해졌다. 마를레나는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시신을 찾았다니, 그렇담 그 뒤는 어떻게 진행되는 거지.

로아의 머릿속엔 끔찍한 상상만이 스쳐 지나갔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더 이상 미래를 예측하고 싶지 않았다.

“제국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영지 루베른이라고 들어나 봤나 모르겠네.”

루베른 영지. 가장 친한 친구 벨라니스가 살고 있는 루베른 백작가의 영지를 모를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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