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29)화 (29/107)

29. 제국 최고형

자리에서 일어난 유다르가 로아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시신을 아주 꽁꽁도 숨겨뒀어. 그래서 찾지 못했던 거야.”

잘게 떨리던 로아의 눈동자가 이내 혼을 놓은 듯 멈춰버렸다. 파들거리던 손에도 힘이 풀려 툭 떨어졌다.

“조사가 끝나면 이번 달 안으로 재판이 열릴 것인데, 결과는 보나 마나 뻔하다.”

결과를 예상한 유다르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말려 올라갔다.

“에이젠 트로네는 제국 최고형을 선고받겠지.”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외부에서 들리는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로아의 내면에서 철렁하고 쏟아질 것 같은 심장이 내는 소리였다. 불안하게 쿵쿵대는 심장이 그녀의 귓가 바로 옆에서 뛰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자네의 끈질긴 지조도 오늘부로 다 끝을 맺는구만.”

깔깔거리는 유다르의 앞에서 로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안 그래도 하얀 그녀의 피부에서 혈기가 빠져나가 더욱 사색이 되었다.

“왜? 충격에 할 말을 잃었나?”

유다르는 이번에도 처음 보는 로아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남편 하나 잃었다고 나라 잃은 얼굴이 되다니.

이 여자가 제 여자가 되어 매일 곁에 두고 본다면 이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볼 수 있겠지.

유다르는 벌써부터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이제부터 제 계획대로 모든 게 풀려갈 것이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 정도는 줄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고. 재판 결과가 나오면 자네에게도 알리러 오겠네.”

손을 뻗은 유다르가 로아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평소라면 기겁하며 유다르의 손길을 거부했을 로아였다. 그러나 로아는 넋을 놓은 채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

유다르가 떠난 후, 로아의 잠자리를 준비하러 애나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다급히 총총 걸어온 그녀는 묵직해 보이는 바구니를 낑낑거리며 가져왔다. 끽해봤자 이불이나 침구가 들어 있을 바구니였다. 멍하게 있던 로아는 애나가 가져온 바구니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부인, 클라리온 자작께서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은 애나가 바구니를 덮었던 천을 걷어냈다. 그 안에는 로아의 탈출에 필요한 각종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오늘 밤, 자정이 되면 이 물건들을 이용해 탈출을 시도해. 같은 시각에 내가 데리러 갈게.」

결국 카일론의 말대로 로아는 황궁에서 탈출을 시도해야만 했다. 합법적으로 이곳에서 우아하게 걸어 나갈 경우는 정녕 없는 것인가. 로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카일론의 쪽지를 뒤집어 계획에 응하겠다는 짤막한 메시지를 적었다.

“이 쪽지를 오라버니에게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애나는 로아의 쪽지를 받아 입고 있던 앞치마에 야무지게 넣었다. 로아는 그런 애나를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자신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어린 하녀의 고운 마음씨가 매번 고마웠다. 동시에 저 때문에 흉한 일을 당할까 미안하기도 했다.

“매번 고마워요, 애나.”

“네? 아닙니다.”

애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애나에게로 다가온 로아가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내가 억지로 시켰다고 말하고.”

“들키지 않을 겁니다.”

로아의 신신당부에도 애나는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장담했다.

“씁.”

로아는 철없이 맑기만 한 애나를 다그칠 필요성을 느꼈다. 그녀가 저를 돕고 있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들키면 꼭 그렇게 할게요.”

로아는 애나에게서 확답을 듣고서야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어서 일 보러 가세요.”

로아에게 꾸벅 인사를 건넨 애나가 그녀의 곁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철컥, 자물쇠가 순차적으로 잠기는 소리가 났다. 로아는 애나가 가져온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접붙이면 길이가 늘어나는 튼튼한 봉이 손에 집혔다. 밧줄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천 쪼가리를 길게 이어붙인 것도 있었다. 카일론이 건넨 쪽지엔 도구를 어떻게 이용하여 탈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계획도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것을 꼼꼼하게 읽은 로아는 탈출 계획을 완벽하게 숙지한 후 쪽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창가로 걸어온 로아는 밑을 내려다봤다. 높은 곳은 언제나 두려웠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라면 이 밑으로 뛰어내릴 줄 알아야 했다. 벌써부터 등골이 오싹하고 눈앞이 아찔했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쉰 로아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에이젠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아났다. 이 정도 공포는 금방 이겨낼 수 있을 듯했다.

***

밤이 깊었다. 루크티아 기사단원들과 루베른 백작을 먼저 돌려보낸 라케이몬 단장을 비롯한 소수의 단원들만 황궁에 남았다. 라케이몬이 황궁에 더 시간을 두고 남은 것은 수장으로서 루크티아 기사단 출신의 황실 기사단원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라케이몬 경.”

황실 기사단 소속 펙토르 경. 그 역시도 루크티아 기사단 출신이다. 라케이몬이 기사단에 처음 입단했을 때 수장이었던 그는 황실 토너먼트에서 기사단원들에게 승리의 화관을 안겨준 채 황실 기사단으로 이적했다.

“오래간만에 인사를 나누는군. 자네가 새로운 루크티아 기사단의 수장으로 올랐단 소식은 일전에 들었네. 바빠서 축하를 전하지 못해 미안했네.”

“괜찮습니다.”

라케이몬은 펙토르의 순찰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와 함께 순찰 겸 황원을 거닐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각자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어느덧 중정에서부터 후원까지 다다랐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 속엔 에이젠 트로네가 빠질 수 없었다. 라케이몬은 에이젠보다 다섯 살은 많았지만 같은 시기에 루크티아에 입단한 동기나 다름없었다. 펙토르는 신입 기사였던 두 사람을 교육시켰던 스승이었다. 에이젠의 얘기를 하다 보니 당연히 현시국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나저나 마를레나 트로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 들었소?”

라케이몬은 처음 듣는 소식에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펙토르는 라케이몬을 따라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봤다.

“아직 시신 부검이 남았다지만 육안으로만 봐도 사후 석 달은 됐다지?”

“예?”

이해할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라케이몬은 미간을 찌푸린 채 펙토르의 얘기를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가까이 걸어갔다.

“딱 에이젠 트로네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던 시기쯤이잖아. 대공 저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이 진술하기를, 트로네 대공이 돌아오자마자 마를레나를 쫓아냈다는 그 시기와 맞물렸다는군.”

“그럴 리가…….”

“거참 모를 일이지. 전공을 그렇게나 세우고도 황녀 한 명을 잘못 건드려 나락으로 떨어지게 생겼으니. 트로네 대공작도 기구한 인생이야.”

라케이몬은 황실에 방문하기 전 직접 루베른 영지에 방문했다. 신분을 숨긴 채 직접 마를레나로 추정되는 여인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루베른 백작이 보여준 수십 년 전 황녀의 편지에서도 흑마술에 관심이 많다는 내용도 있었다. 정황 증거도 충분했기에 사병까지 이끌고 황궁에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시신으로 발견됐다니? 그것도 석 달이나 지났다니?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루베른 백작이 마를레나로 추정되는 여인의 생존을 확인한 게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라케이몬의 이의 제기에 펙토르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황실 기사단 소속이니만큼 그가 황실의 조사 결과를 믿지 않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부검하면 정확한 결과가 나올 겁니다. 아직 결정 난 건 없으니 섣부른 판단은 지양하는 게…….”

“경은 루베른 백작의 증언을 모두 믿는가?”

펙토르는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라케이몬의 목소리를 잘라냈다. 라케이몬은 무조건 황실을 방어하려는 펙토르에 되레 내려놓았던 경계심을 세웠다. 동료였던 두 기사가 서로를 적대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트로네 대공의 부인인 로아 트로네와 루베른 백작 부인인 벨라니스 루베른이 아주 어릴 때부터 친자매같이 지내온 절친한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나.”

라케이몬은 지금 대화에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펙토르는 알아먹지 못하는 라케이몬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일부러 위협을 주기 위해 거리를 좁히는 펙토르에도 라케이몬은 물러서지 않았다.

“루베른 백작이 가져온 증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소리야.”

기가 막힌 결론이었다.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린 라케이몬이 헛웃음을 뱉어냈다.

“어떻게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겁니까.”

“라케이몬 경, 자네도 트로네 대공을 감싸는 건 이제 그만두게.”

대치한 두 사람은 어느 한쪽도 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제 헤이든 제국에서 권력을 잃을 것이야. 그를 두둔했던 자들도 혐의를 의심받아 형벌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지.”

라케이몬은 처음으로 펙토르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황실에서 저들 입맛대로 수사를 한다면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경.”

“어, 이제 가겠네.”

펙토르는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라케이몬의 옆을 스쳐 지나가기 전, 그가 잠시 멈춰 섰다.

“그러니 자네도 이제 그만 조용히 돌아가.”

라케이몬에게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홀로 남겨진 라케이몬은 고개를 들어 황궁의 전경을 올려다봤다. 그의 손은 허리춤에 채워진 검으로 향했다.

정의를 외치며 검을 뽑던 기사로서, 이걸 가만 지켜봐야만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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