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기묘하게 흘러가는
펙토르가 간 후에도 라케이몬은 한참을 황원을 산책했다. 한적한 건물 주변을 걷던 라케이몬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키가 큰 나무 쪽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라케이몬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날짐승 따위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거기 누구 있소?”
숨을 죽인 채 검을 쥐고 슬그머니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소.”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나무 위에 누군가 있었다.
“누가 이 시간에 감히 황궁을……!”
라케이몬이 검을 뽑아 들었을 때, 수형 안쪽에서 누군가 손을 뻗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항복하듯 손을 뻗은 그가 수간을 타고 내려왔다. 도구도 없이 나무를 오르느라 고생했건만 허망하게 발각되어버렸다. 라케이몬은 나무에서 내려온 자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저는 황실 조경가 카일론 클라리온 자작이라 합니다.”
아무리 황원을 관리하는 조경가라 한들, 정식으로 근무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전부 다 말하십시오.”
이 늦은 시간에 높은 나무에 올라가 있는 건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라케이몬은 카일론을 몰랐지만, 카일론은 라케이몬을 알아봤다. 일촉즉발의 순간, 카일론은 제 계획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경께서도 아시다시피 대공 각하가 반역자로 몰리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카일론은 그에게 호소하여 이들을 돕게끔 만들고 싶었다. 이 황궁 사람들은 아무도 유다르가 조작해놓은 설계에 반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에이젠이 불러온 루크티아 기사단이라면 다를 듯했다.
“제 동생 로아가 바로 대공 각하의 아내입니다. 태자 저하는 트로네 대공을 없애고 제 동생이자 그의 아내인 로아를 자신의 신부로 맞기 위해 이 말도 안 되는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라케이몬은 구구절절 제 추측을 늘어놓는 카일론이 당황스러웠다.
“하, 어찌 그런 이유로 이 지경을 거짓으로 만들어낸단 말입니까.”
“그건 제가 태자 저하께 묻고 싶은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꽤 개연성 있는 가설이었다. 황태자 유다르는 애초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였다. 전쟁을 벌여 수많은 제국민들을 희생시켰던 원인도 그의 변덕에서 비롯된 불씨였다. 자존심을 굽히고 한 발자국만 물러났으면 전쟁까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유다르가 에이젠의 등장으로 위협을 느꼈고, 그의 아내까지 빼앗고자 한다면…….
그 미치광이라면 가능성 있었다. 갖고 싶은 것에 눈이 멀어 제국을 구하고 위대한 전공을 세운 에이젠을 몰아내고도 남을 작자였다.
“제발 도와주십쇼, 라케이몬 경. 대공 각하가 그런 짓을 꾸몄을 사람이 아니란 건, 경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카일론이 라케이몬의 팔을 붙들고 애원했다.
라케이몬은 지난날 함께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가 그런 짓을 꾸몄는지 안 꾸몄는지 잘 알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라케이몬이 기억하는 에이젠은 알기 어려운 남자였다. 아무리 서자라 해도 그 위대한 트로네 대공가의 자제답지 않을 정도로 체계에 쉽게 복종하는 성향을 가졌다.
선대 트로네 대공과 총사령관이 전사했을 때 가장 먼저 그 뒤를 이어 총 지휘를 맡았던 사람이 에이젠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특유의 영특함과 사기적인 전술로 이내 제국에 승리를 안겼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트로네 대공의 서자란 이유로 의심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실력과 소신을 증명해 보였다.
짧은 순간 라케이몬은 에이젠이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그리곤 단번에 해답을 찾았다.
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황태자 유다르보다 훨씬 나은 세상으로 이끌 수 있는 작자이리라 확신했다.
“내 그대의 말을 다 믿을 순 없지만 상황이 기묘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만은 알겠습니다.”
라케이몬은 카일론을 향해 겨누었던 검을 거두었다. 카일론은 그제야 가쁜 숨을 몰아서 내쉬었다. 겨우 진정한 그가 바로 옆에 있던 건물의 특정 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위에 로아가 갇혀 있습니다.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주기 위해 이곳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탈출이라니. 이들은 황궁의 법을 거역할 셈이었다. 그러나 라케이몬은 카일론에게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됩니까.”
에이젠이 반역자로 몰리는 건 충분히 부당했다. 거기에 죄 없는 그의 아내까지 잡혀있다면 이들을 도와줄 명분이 되었다. 어차피 이 뒤는 무사히 탈출한 에이젠이 사병을 이끌고 권력을 잡은 채 해결하러 돌아올 것이다. 라케이몬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카일론의 계획을 돕기로 했다.
“대공 각하와 로아를 이곳에서 안전하게 탈출시켜야 합니다. 그 후의 처소에 대한 계획은 두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우리는 그들이 도망갈 수 있는 수단을 준비해야 합니다.”
“대공 각하는 어떻게 나올 예정입니까.”
“구치소를 관리하는 자가 깊은 새벽에 조는 시간이 있습니다. 며칠 내 유심히 관찰했더니 아주 일정한 시간에 잠들더군요. 그 앞을 자유로이 드나들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에 빠집니다.”
제국의 황실이란 곳이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고 실제로는 아주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라케이몬은 생각지도 못한 시스템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그때 몰래 키를 훔쳐 달아나 대공 각하를 꺼내드릴 참이었습니다.”
카일론의 말을 들은 라케이몬은 턱을 짚고 사념에 빠졌다. 지금 그가 여동생을 꺼내주러 왔으니, 에이젠은 그다음인가. 그렇기엔 이동할 때 여동생을 함께 데려가야 할 것이다. 탈출하고도 황원을 버젓이 돌아다닌다면 발각될 가능성이 높았다.
“혼자 그 계획을 이루기엔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라케이몬은 꺼냈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자작의 계획대로 대공 각하는 내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움직이는 게 훨씬 효율적일 듯했다. 카일론 역시 라케이몬의 동참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티아 기사단원들 소수가 황궁에 그리고 근처에도 묵고 있습니다. 궁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들에게 호위를 시켜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케이몬은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계획을 성황리에 성공시키기 위해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라케이몬 경.”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한 라케이몬은 카일론의 부름에 멈춰서고 말았다.
“저는 대공 각하와 로아를 위해 제 한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이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불안에 덜덜 떨던 카일론은 어느새 비장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라케이몬 경도 그렇습니까? 그들을 내보내주면 당연히 탈출을 도운 우리부터 신문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뒷감당을 할 수 있느냐, 묻고 있었다. 그러나 라케이몬은 자신이 저질러야 할 일에 비해서 같잖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에이젠 트로네와 황태자 유다르 중 굳이 정의를 꼽자면, 에이젠 트로네 대공 쪽이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둘을 비교하기에도 에이젠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기사의 숙명이고.”
각오를 묻는 카일론에게 라케이몬의 대답은 완벽에 가까웠다.
루크티아 기사단은 에이젠을 변호하기 위해 사병까지 끌고 왔다.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대표로 수장만 들렀어도 됐다. 그러나 에이젠이 굳이 사병군을 부른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확실한 증거를 가져왔으니 제대로 수사하지 않으면 언제든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단 메시지였다.
“트로네는 맨몸으로 나가도 루크티아 기사단을 총지휘할 능력이 충분히 있는 자입니다.”
라케이몬은 두 사람을 탈출시킨 후의 계획까지 머릿속으로 그려냈다. 딱히 걱정할 필요 없을 정도로 에이젠은 듬직한 지휘관이었다.
“그를 믿어요.”
그가 대공작으로 즉위하지 않았더라면 루크티아 기사단장은 그가 되었을 정도로 우수한 통솔력을 가진 자였다.
“부당한 사회에 혁명은 불가피합니다.”
반역이 아니었는데 반역으로 몰린다면. 억울함을 풀기 위해 계획에도 없던 반역을 저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라케이몬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제 앞길을 향해 걸어갔다. 카일론은 자신보다 훨씬 굳은 각오를 다진 라케이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건물로 향했다. 다음 순찰경이 오기 전에 로아를 탈출시켜야 했다.
로아가 머물렀던 곳은 본래 귀빈실이었다. 그러나 유다르는 그녀를 가두기 위해 창문 바깥쪽에 잠금 장치를 만들어두었다. 나무 위로 올라선 카일론이 길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툭 끊었다. 창문 잠금장치 쪽으로 막대를 쭉 들이밀었다. 아슬아슬하게 걸린 막대가 잠금 장치를 옆으로 밀어냈다.
“……로아!”
툭툭거리는 소리에 로아는 모습을 드러냈다. 카일론이 미리 준비해놓은 하녀복을 입은 채였다.
“조심히. 내 손을 잡아.”
로아는 창문틀을 한 손으로 꽉 붙든 채 카일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한 손이 겨우 서로를 붙잡았다. 로아는 밑이 두려웠지만 카일론을 믿고 과감하게 발돋움을 했다.
튼튼하고 키가 큰 주목은 잎이 빼곡해 어둠 속에선 충분히 기척이 가려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로아는 아득하게 먼 바닥이 무서워 기둥을 꽉 붙잡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순찰경이 곧 올 시간이니 쥐 죽은 듯이 이 위에 숨어 있어. 이 구간 순찰이 지날 때쯤 내가 다시 데리러 올게.”
거기다 카일론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로아를 두고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로아는 양팔에 힘을 꽉 주고 나무를 끌어안았다.
긴장을 늦출 수도 없었다. 잘못 움직였다간 바닥으로 추락할까 두려웠다. 또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순찰경이 왔을 때 들키지 않을 수 있을지 스스로가 못 미더웠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로아는 힘을 준 두 팔을 파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