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수상한 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로아는 머리 꼭대기 위에 있던 달이 기울어진 정도로 시간의 흐름을 유추해야 했다. 옴짝달싹하지 못해 온몸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까슬까슬한 가지 위에 몸을 앉힌 것도 불편한데 발밑을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의 높이에 더욱 아득해졌다. 긴장한 몸에 힘을 주고 버티느라 체력이 점점 고갈되어갔다. 밤이 깊어질수록 주변을 둘러싼 공기는 차가워졌다. 으슬으슬 오한이 들어 이가 딱딱 부딪쳤다.
몸이 차가워지니 본능적으로 열을 내려 조금씩 움직였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손으로 반대쪽 팔을 마구 문질렀다. 몸을 움직이니 주변에 닿는 나뭇잎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
로아는 누군가 다가온 것 같은 기척을 뒤늦게 느꼈다. 발밑에 불빛이 들어오는 것까지 보았다. 그제야 망부석처럼 움직임을 멈추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여기 수상한 자가 있다!”
타이밍 좋지 않게 다가온 순찰경이 나무 위 로아를 발견해 소리쳤다. 목청껏 지른 순찰경의 목소리에 주변을 돌고 있던 다른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나무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유다르의 호위기사 펙토르도 있었다.
“그 위에서 무엇하는 것이오, 어서 내려오시오!”
나무 주변을 포위당한 로아는 도망칠 방도가 없었다.
“내, 내려가겠습니다.”
항복하듯 두 팔을 흔들었다. 기사들은 혹시라도 내려온 그녀가 도망칠까 주변을 에워쌌다. 파들거리며 나뭇가지를 쥔 로아는 신중하게 나무를 내려왔다. 나뭇가지가 더는 뻗지 않은 구간에는 그들이 가져온 사다리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에서 내려오고서야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로아는 펙토르의 앞에 철퍼덕 넘어졌다. 길고 반짝이는 금발이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어디 소속 하녀야.”
로아의 앞에 선 펙토르는 소속을 물었다. 어둠 속인 데다 긴 머리를 늘어뜨려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하녀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황궁 하녀 중에 이리 반짝거리는 금발을 한 여자는 본 적 없었다. 의심이 증폭되면서 펙토르의 미간도 좁혀졌다.
“어서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해?”
로아는 자신을 무어라 소개하지 않았다. 펙토르는 로아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체를 밝히기 위함이었다. 거세게 로아의 턱을 움켜쥔 펙토르는 억지로 머리를 들게 했다.
“당신은…….”
새파란 두 눈이 달빛에 반사되었을 때, 펙토르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챘다.
“로아 트로네?”
황태자 유다르의 소환으로 임시로 황궁에 갇혀 있던 에이젠 트로네의 부인.
펙토르는 그제야 위를 올려다봤다. 귀빈용으로만 사용하는 이 건물에 유일하게 묵고 있던 자가 바로 로아 트로네였다.
“설마 저 위에서 탈출한 것입니까.”
로아는 펙토르의 물음에도 묵비권을 행사했다.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펙토르는 건물을 찬찬히 훑어봤다.
“창문은 바깥쪽에서 열 수 있도록 개조해두었는데.”
로아는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펙토르를 따라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켰다.
“조력자가 있는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내내 말을 아끼던 로아가 강하게 부정했다.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건 혼자 계획한 일입니다.”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이거늘. 펙토르는 로아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쉽게 예상했다.
“창밖을 나와 나무로는 어떻게 건너갔습니까.”
창문에서부터 나무까지는 누군가 잡아주지 않으면 건너가기 어려워 보이는 거리였다. 펙토르의 예리한 지적에 로아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이 하녀복은 또 누구의 것이고.”
펙토르는 로아가 입은 옷을 가리켰다. 로아는 얼어붙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뒤를 돌아선 펙토르는 누군가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경은 태자 저하께 가서 지금 상황을 본 대로 전하라.”
“알겠습니다.”
로아를 처음 발견했던 순찰경이었다. 그는 펙토르의 지시에 따라 곧바로 유다르의 침소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부인은 일어나서 저희와 함께 본래 계시던 귀빈실로 가시죠.”
펙토르가 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로아는 그에게 잡히지 않으려 몸을 뒤로 빼버렸다. 허공에 손짓한 펙토르는 언짢은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태자 저하께서 그대를 귀빈실로 모셨다 하여 신분을 잊은 듯한데.”
낮게 깔린 목소리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대는 혐의를 의심받는 용의자 신세요.”
겁을 덜컥 집어삼킨 로아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 부근을 부여잡았다.
“트로네 대공의 아니, 에이젠 경의 죄목은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을 터이니.”
펙토르는 에이젠의 직위를 멋대로 떼어버리고 칭했다. 로아는 경솔하기 그지없는 펙토르의 말투에 넋을 놓은 듯 입을 떡 벌렸다.
로아는 이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남자는 에이젠의 억울한 누명엔 관심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를 반역자로 몰아가려 하는 유다르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로아는 당황한 자신의 감정을 재빠르게 추슬렀다. 뇌리를 차갑게 식혔다. 그리고 이내 이성을 되찾았을 때. 그녀 역시 버벅거리던 자신의 말과 행동을 갈무리했다.
“존경하는 펙토르 경.”
로아는 정식으로 그에게 인사부터 올렸다. 펙토르 역시 그제야 로아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기사답게 예를 갖추는 로아의 목소리를 들어주려 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어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지레짐작하시는지요.”
로아의 표정은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떨리는 입꼬리는 진실된 감정을 드러냈다.
“그랬다간 그대에게 후회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펙토르는 감히 죄인 신분 주제에 저에게 충고하는 로아에 어이가 없었다. 한동안 무심한 얼굴로 로아를 내려다봤다. 뒤늦게 픽, 하는 비소를 흘린 그가 로아의 앞으로 다가섰다. 거대한 그의 몸집이 그려낸 그림자가 로아를 뒤덮었다.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긴장감이 올랐지만 로아는 겉으로 표 내지 않았다.
“내 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도록 하겠소.”
일반적인 죄인이었다면 모를까,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 유다르가 점 찍어둔 여자였다. 전공이 높은 대공 에이젠 트로네를 몰아내고서라도 취하고 싶은 여자. 만일 유다르의 뜻대로 일이 풀린다 하여도 차마 만만히 대할 수 없었다.
“곧 황태자비가 될 여인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을 테니 말이지요.”
로아는 짓궂게 웃으며 ‘황태자비’라는 말을 입에 담는 펙토르에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불쾌했다. 기 싸움에서 밀려나지 않는 펙토르는 로아의 불쾌한 얼굴을 보며 한쪽 입매를 틀어 올렸다.
“무엇하느냐. 태자 저하께서 행차하시기 전에 어서 부인을 귀빈실로 잘 안내해드려라.”
돌아선 펙토르가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에게 지시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몇 명의 사용인들이 로아에게로 다가갔다.
“내 몸에 손대지 마시오.”
굳건한 의지를 담은 그녀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렸다.
“내 남편 에이젠 트로네가 형을 당하더라도 나는 황태자비가 될 여자입니다.”
저를 불쾌하게 하고자 뱉은 말이겠지만, 로아는 그의 말을 인용하여 상황을 역전시켜보려 했다.
“곧 황태자비가 될지도 모르는 여인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어떡하십니까.”
그러니 함부로 저에게 손대지 말라. 그녀의 흔들림 없는 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멈칫거리는 틈을 타 로아는 펙토르에게 당당히 걸어갔다.
“조력자의 여부를 추궁하는 건 눈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곤 발걸음보다 더 떳떳한 기세로 요구했다.
“이것만 약속해주면 얌전히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하.”
펙토르는 기가 찬 한숨을 뱉었다.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펙토르가 착잡하다는 듯 뻐근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본인 입으로 말씀하셨지요.”
고개를 밑으로 비튼 펙토르는 로아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태자 저하가 정말로 당신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닐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까.”
애써 그의 눈을 피하던 로아는 펙토르가 제시한 새로운 가설에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트로네 대공을 몰아내기 위해서 당신을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로아가 펙토르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펙토르는 거의 동시에 허리를 세우더니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두 사람 사이에 교류되는 기 싸움은 자꾸만 엇갈렸다.
“나도 태자 저하가 무슨 의도로 그를 내몰고 그대를 차지하려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뒷짐 진 그가 먼 산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황태자비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를 당신과 거래를 할 필요는 없단 말이지.”
펙토르는 로아의 뒤편에 서 있던 사용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로아의 양옆으로 온 사용인들이 그녀의 양팔을 잡았다.
“놓으십시오. 내 발로 따라가겠습니다.”
믿기 어렵게도 반항기가 가득 서려있던 그녀의 눈빛이 흐물흐물해졌다.
드디어 말이 통한 건가, 펙토르는 사용인들에게 놓아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먼저 앞으로 돌아서 걸어갔다. 로아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다섯 걸음도 채 가지 않았을 때. 그녀는 재빠르게 뒤로 돌았다. 사용인들이 모두 방심한 사이, 그들 사이의 틈을 뚫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잡아!”
펙토르 역시 로아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두어 걸음 만에 멈춰서고 말았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울림. 이 알 수 없는 기척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윽!”
로아의 짧은 비명이 고요한 황원에 울렸다.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잡아 올렸다.
높이 뛰어오른 말 한 마리가 기울어가는 달빛 아래로 튀어 오르듯 자태를 드러냈다. 펙토르는 눈앞에 그려진 장면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