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우리가 왜, 어쩌다
앞만 보고 질주하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단단한 누군가의 팔이 제 허리를 감쌌을 때 황실 사용인에게 잡힌 줄만 알았다. 몸이 붕 뜨고 어딘가로 끌어 당겨지는 동안 로아의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갔다. 고개를 젖힌 그녀의 시야에 걸린 것은 새벽달 주변을 둘러싼 달무리뿐이었다.
“아!”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말 등에 올라탔다. 그제야 로아는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익숙한 향기 때문이었다. 제 허리를 단단히 받친 팔의 주인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에이젠?”
말을 타고 지나가던 에이젠이 튀어 오른 로아를 알맞은 타이밍에 잡아챈 것이었다. 로아는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에이젠 트로네가…….”
펙토르는 바로 눈앞에서 에이젠이 로아를 낚아채 지나간 것을 보고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어리둥절한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구치소에 있어야 할 그가 어떻게 밖으로 나왔는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나타났는지.
그러나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곧 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이 달아났다. 거기에 황태자 유다르가 그리도 탐하던 로아 트로네까지 데려가버렸다.
“성문을 닫아라!”
그의 목소리가 황원에 울려 퍼지고서야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사용인들도 순식간에 일사불란히 움직였다.
주변에 있던 말을 가져다주자 펙토르는 곧장 에이젠과 로아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그가 달리는 구간에 한 마리의 말이 뛰어들었다.
“라케이몬 경…….”
황궁에 남아있던 소수의 루크티아 기사들과 함께 나타난 수장 라케이몬이었다.
“자네인가? 저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조력을 해준 것이?”
펙토르는 고삐를 바짝 당겨 쥔 채 라케이몬에게 물었다. 한때 같은 소속의 기사단이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대치하게 되었다.
“루크티아 기사단은 트로네 대공 각하의 누명을 풀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먼저 검을 꺼내든 것은 라케이몬이었다.
“그런데 황실은 저희가 준비해온 증거를 물거품으로 만들었죠.”
날이 선 그의 검은 주인의 의지를 투영하고 있었다. 곧 몰려든 황실 기사들이 두 사람 주변을 둘러쌌다.
“황실에 반하겠다는 겐가, 자네?”
펙토르는 섣불리 검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억양이 좀 그렇습니다, 경.”
그럴수록 라케이몬은 당장이라도 진격할 것처럼 검을 가까이 겨누었다.
“굳이 따지자면 정의를 지키겠다는 겁니다.”
확고한 그의 눈빛에 펙토르는 고삐를 바짝 당겨 방향을 틀었다. 그러곤 주변을 에워싼 기사들을 향해 지시했다.
“루크티아 기사단원을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아라.”
펙토르의 지시에 따라 기사들이 검을 꺼내 들었다. 루크티아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로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라케이몬 경.”
가장 뒤쪽으로 빠진 펙토르는 마지막으로 라케이몬을 불렀다.
“자네가 내 상대는 아니지 않겠나.”
그러더니 루크티아 기사단원들을 지나 에이젠이 사라진 쪽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트로네를 쫓겠다. 뒤를 부탁한다!”
***
카일론은 에이젠에게 후원을 통해 나가는 비밀 통로를 알려주었다. 그 덕에 에이젠은 기사들이 황궁 전체를 수비하기 전에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습한 기운이 가득한 풀숲으로 들어서고서야 속도를 늦추었다. 에이젠의 앞에서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던 로아는 서서히 팔에 힘을 풀었다. 스륵 내려온 두 손이 그의 양 뺨을 감쌌다.
“에이젠, 정말 에이젠이야?”
눈으로 보고도, 피부로 만지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토록 그리워했고, 걱정했던 남자가 무탈히도 살아 돌아와주다니. 로아는 그간 유다르에게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강한 척해왔다. 그러나 에이젠을 생각하면 밤마다 무너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정말 유다르의 뜻대로 그가 몰락당하고 자신은 원치 않는 유다르의 부인이 될까 두려웠다.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부정적인 망상들은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그러나 이렇게 돌아와준 에이젠에 여태까지 그녀를 괴롭게 했던 잡념들이 깡그리 녹아내렸다.
“나야, 로아.”
에이젠은 자신을 만지는 로아의 손목을 잡았다. 밑으로 살짝 내려 자신의 목울대를 감싸도록 했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온기, 그리고 분명히 뛰고 있는 맥박. 그제야 에이젠의 존재를 실감했다.
“어떡해. 너무 보고 싶었어.”
벅차오른 감정에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에이젠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게 했다. 저의 품에 안겨 우는 로아가 진정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주기 위해서였다.
한 번 터져버린 감정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 그만 울고 싶어도 마음처럼 조절되지가 않았다. 그럴수록 에이젠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에이젠은 말없이 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에 닿았다. 그 역시도 그녀를 그리워했다. 저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한 건 아닌지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나마 버텨준 로아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다친 덴 없어?”
겨우 고개를 든 로아가 눈물 젖은 눈으로 물었다.
“응.”
에이젠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로아는 올린 그의 팔뚝에 깊게 베인 듯한 상처를 발견했다.
“거짓말. 이건 뭐야?”
화들짝 놀란 로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에이젠은 고통스러운 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버텼다.
“다친 거야?”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로아가 다그치듯 언성을 높였다. 에이젠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큰 상처 아니니까…….”
“가만히 있어.”
에이젠은 다친 팔을 자꾸 숨기려 했다. 그러나 로아는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마땅히 지혈할 것을 찾지 못했다. 있는 거라곤 풀과 나무뿐인 숲이니 당연했다. 그러다 문득 제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하녀복을 입은지라 허리를 감싼 새하얀 앞치마가 있었다.
로아는 그 앞치마를 풀어내 에이젠의 팔에 감싸주었다. 꽉 틀어 매자 그래도 잠시 지혈할 정도는 되었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의 얼굴을 가만 내려다봤다. 마냥 웃음이 나올만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됐다. 여전히 저를 먼저 생각해주는 것도 참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속상해.”
로아는 고개를 들어 다시 에이젠의 얼굴을 봤다. 깊은 어둠 속이라 그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암순응이 된 건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입술도 이게 뭐야.”
입술 옆이 터진 듯 상처가 있었다. 로아는 손가락으로 상처 부위를 만지려 했다. 그러나 따가워하는 에이젠에 금방 손을 거두었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육탄전이 좀 있었어.”
자신을 구하러 오기까지 얼마나 고되고 힘든 과정이었을까. 아픈 가슴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로아는 에이젠 쪽으로 바투 당겨 앉았다.
“로아?”
에이젠의 얼굴을 붙잡은 로아는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키스라도 하려는 듯 비튼 고개에 에이젠이 뒤로 물러났다.
“움직이지 마.”
그러나 로아는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상처 좀 보려는 거니까.”
어둠 속에서도 불그스름해진 그녀의 뺨이 보였다. 에이젠은 로아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로아는 에이젠을 끌어당겨 제 입술로 그의 입술을 매만졌다. 예민한 입술의 감각은 거칠어진 그의 상처를 금방 찾아냈다. 살짝 벌어진 입안도 꼼꼼히 탐했다. 깊은 안쪽에도 씁쓸한 피 맛이 느껴질 정도의 상처가 있었다.
상처를 모두 확인한 로아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에이젠의 어깨 위로 떨어뜨렸다.
“우리가 왜,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는 제국을 위해 온몸을, 그리고 젊음을 바쳤을 뿐이다. 귀빈 대접을 받아도 모자랄 판국에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도대체 왜…….”
그 이유를 찾던 로아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게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남편 될 사람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남편 될 분을 정말 사랑하신다면, 그리고 제국을 위하고 싶으시다면 이 결혼을 하지 않으시길 권고드리겠습니다.’
몇 달 전. 루베른 성내에서 봤던 포춘텔러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혹시, 그녀가 말했던 게 이런 걸까. 자신이 아니었다면, 에이젠이 이렇게까지 내몰리지 않았던 걸까. 알면서도 사랑하는 에이젠과의 결혼을 강행했던 제가 잘못한 걸까.
로아는 끝없이 빠져드는 절망의 구렁텅이 끝에 매달렸다.
‘알면서도 일부러 초대장을 보낸 것이오.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매우 궁금했거든.’
‘로아 클라리온. 그대와 좀 더 깊은 시간을 가지고 싶소.’
유다르는 황실 무도회에서부터 저에게 강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이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유다르는 끊임없이 제 탐욕을 드러냈다.
‘황태자비가 되어라.’
‘자네는 본성이 잔악한 전쟁광에게 속은 순진한 여자고, 난 가여운 자네를 구원해준 아량 넓은 황태자가 되는 거지.’
궁극적으로 유다르의 최종 목표는 자신이었다. 고개를 든 로아는 지쳐 보이는 에이젠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 모든 건 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