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널 두고 어떻게
“시간이 없어. 어서 여기서 멀어져야 해.”
로아가 진정되자 에이젠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고삐를 당겼다.
“수도만 나가면 루크티아 기사단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쯤 머물고 있다 했으니까.”
에이젠은 로아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로아의 귀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꽉 잡아.”
속도를 낸 탓에 에이젠이 고삐를 바짝 당겨 잡았다. 로아가 떨어지지 않도록 에이젠의 목을 끌어안았다. 짧은 순간에라도 그의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다. 로아는 에이젠의 어깨에 편히 기댄 채 이 순간의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게 가지 않았다.
“젠장.”
빠르게 달리던 말이 급하게 멈춰 섰다. 앞발이 들린 탓에 로아는 에이젠에게 더 깊숙이 안겼다. 불안한 기분에 얼른 뒤를 돌아봤다. 안개가 자욱이 끼었음에도 희미하게 깔린 실루엣이 보였다.
“벌써 이 앞까지 포위했어.”
에이젠은 상체를 낮추어 주변을 살폈다. 기척은 조용한 편이었지만 직감이란 게 있었다.
“에이젠…….”
로아의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파들거리는 손끝이 그의 옷자락 끝을 잡았다. 그러나 에이젠은 주변을 경계하느라 로아를 끌어안아줄 여력이 없었다.
주변을 훑은 에이젠은 빠른 판단을 내렸다.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그가 로아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내려와, 로아.”
로아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도움으로 말에서 내려왔다. 에이젠은 로아의 어깨를 눌러 제자리에 앉게 했다. 에이젠은 몸을 낮춘 후 로아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내 말 잘 들어.”
속닥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로아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했다.
“내가 시간을 벌 동안 넌 언덕 위로 올라가.”
“……뭐?”
에이젠이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곳엔 높은 지형이 있었다. 로아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를 두고 저만 살기 위해 도망치란 뜻인가. 로아는 에이젠이 할 말을 하는 동안에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전력으로 달려. 이 언덕만 넘으면 마을이 보일 거야. 그곳에 묵고 있는 루크티아 기사단원들을 찾으면…….”
“싫어.”
어느새 로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에이젠은 로아가 눈물을 떨어뜨리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젖은 눈가를 훔쳐냈다. 불안에 떠는 로아와 달리 에이젠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다정한 손길에 로아는 저를 밀어내는 에이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널 두고 어떻게 가라는 거야.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울음을 집어삼켰다.
절대 오면 안 되는 순간이 바짝 다가온 것 같았다. 몇 달 전 포춘텔러의 경고에도 에이젠과 결혼을 강행한 자신을 원망했다. 아니,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한 목숨 따위 바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로아.”
우는 로아를 보고도 에이젠은 여전히 평온한 투였다. 줄줄 새어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녀의 양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각기 다른 빛깔을 띠는 두 남녀의 시선이 맞물렸다.
“우리 다시 볼 거잖아. 그치?”
에이젠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그가 전쟁터로 내몰렸을 때도 로아는 매일매일을 불안에 떨며 살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가 전쟁터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직접 보지 못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위험에 내몰릴 걸 뻔히 알면서도 두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로아는 에이젠의 설득에도 이 순간 자체를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에이젠은 그럼에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씩 미소 지으며 로아의 손등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사랑하는 와이프를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내가 죽일 놈이지. 이 시간만 지나면 평생 근심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줄게.”
부드럽게 닿는 입술의 감촉이 좋았다. 로아는 위기 상황에도 저부터 달래주는 에이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면 이럴수록 더욱 그를 놓아줄 수 없게 돼버리는데, 왜 그는 이 사실을 모를까…….
“아무도 널 건들 수 없을 만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쥐고 말 테니까.”
입술을 떨어뜨리고도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꽉 쥐었다. 오늘만큼은 그의 강한 염원을 꺾어버리고 싶었다.
“에이젠, 안 돼.”
로아는 에이젠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어 쿵쿵 찧었다.
“못 가. 싫어.”
두 팔을 아예 그의 옆구리 사이로 집어넣었다. 허리를 꽉 끌어안곤 놓지 않았다. 더는 그와 떨어지기 싫었다. 지금 떨어지면 다신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 온기를, 이 손길을, 이 입술을. 더 이상 닿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로아.”
에이젠은 떨고 있는 로아를 진정시키려 등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를 새겨넣었다.
“날 믿는다면 가.”
로아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더니 떨어뜨렸다. 로아는 벌게진 눈가로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에이젠은 무섭지 않은 걸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확고하고 결연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전부 널 위해서였어. 너 하나만을 위해서. 살아 돌아와서 너와 결혼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고마우면서 안타까운 고백이었다. 여자 하나만을 위해 살아온 남자가 결국은 그 여자로 인해 죽음에 다다르게 된다는 애석한 결말. 또다시 눈물샘이 터진 듯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 삶은 6년 전에 진작 끝났을 거야.”
그날 한 줄기 빛 같은 동아줄을 내려준 사람. 아무렇게나 툭 던진 말에도 위로를 얻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온 모든 삶이, 그가 세운 모든 업적이, 그가 걸어온 모든 길이 결국 로아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떳떳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 우아하게 자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에이젠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마다 로아의 해사한 미소를 떠올렸다. 지독하게 삶을 갈망했다. 그 미소를 더 보고 싶으니까. 여기서 죽으면 더는 볼 수 없게 되니까.
“네 앞에선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했어.”
권력 따윈 어떻게 돼도 상관없었다. 무엇을 하사받든 관심 없었다. 명예욕도 재물욕도 그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하지만 난 로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잔인한 사람이라서 말이지.”
모든 건 그녀만을 위해서였다. 잔악하게 사람을 죽인 것도, 그렇게 쌓인 시신을 밟고 일어선 것도, 저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을 땅을 정복하려 나선 것도 전부.
로아를 만나기 위해서. 로아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 로아의 듬직한 남편이 되기 위해서.
그러나 그런 에이젠에게도 마지막 자존심은 있었다.
“내가 사람을 해하는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제 손을 더럽히더라도 그녀에게는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 무섭고 힘든 건 다 자신이 할 테니 그녀는 티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길만 걷길 바랐다.
“에이젠…….”
로아는 목이 메어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의 이름을 되뇌는 것뿐이었다. 정신없었던 로아는 그제야 에이젠의 몸을 훑어봤다. 그는 갑옷을 입지도 않았고, 무기로 사용할 만한 검 한 자루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몸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운이 좋아 목숨은 건사한다 치더라도 분명 큰 부상을 입게 될 것이다.
“울지 말고.”
에이젠은 우는 로아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언덕을 등진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
“뒤돌아보지 말고.”
따뜻하게 안아주던 그의 손은 이제 로아를 떠밀고 있었다.
“가.”
로아는 에이젠이 떠민 만큼 밀려났다. 두어 걸음 물러선 로아는 그 이상 도망가지 못했다. 멍한 얼굴로 에이젠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래선 안 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그와의 마지막 시간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곧 쫓아갈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어렴풋이 멀게 느껴졌던 실루엣이 어느덧 바짝 가까워져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혼자서……!”
로아는 하려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단장님, 이 안쪽에 트로네 대공 각하와 그의 부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멀찌감치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로아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태자 저하의 명이다. 로아 트로네는 생포하고, 반역자인 트로네 대공은 사살해도 좋다.”
단장의 지시를 들은 로아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굳어버린 두 발은 더욱 땅바닥에 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이젠, 나 못 가…….”
로아가 에이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소리가 들렸던 반대쪽 수풀에서 다그닥, 하고 빠르게 접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아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제자리에 앉아버렸다. 에이젠은 곧바로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바짝 다가온 말은 허무하게 에이젠의 앞을 지나쳤다. 에이젠은 자신을 지나쳐 황실 기사단 앞에 멈춰 선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격을 중지하라. 명령이다. 진격을 중지하라.”
그는 황실 기사단 앞에서 당당히 지시를 내렸다. 로아 역시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내는 남자를 바라봤다.
“나는 헤이든 제국의 황자 오필리안이다. 당장 진격을 중지하고 물러나라.”